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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의 아침] 영산강변 정자 중 압권은 풍영정…당대 지식인들 편액 ‘빼곡’
입력 2021.12.08 (11:37) 수정 2021.12.08 (11:40) 광주
-무등산 자락과 영산강변에 정자 100여 곳...광주 풍영정이 압권
-승문원 판교(정3품) 지낸 김언거가 낙향해 광주 신창동에 조성
-이황, 김인후, 기대승, 한석봉 등 당대 지식인들이 쓴 편액 즐비
-‘바람 쐬며 시 읊조린다’는 風詠亭의 風자 기울어진 일화도 전해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2월 8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CuKxHwJ1u0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무등산 자락 그리고 영산강변에는 100여개가 넘는 정자가 있습니다. 나름 경관과 사연을 안고 있지만 제가 볼 때 단연 압권은 풍영정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은 풍영정에 깃든 전설, 풍영정이 품은 뜻 등 풍영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광주 광산구에 있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영산강 자락에 위치한 풍영정. 100개가 넘는 정자 중에 단연 압권이라고 하셨잖아요?

◆ 노성태: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 지창환: 아까 광산구라고 하셨는데 일단 정확한 위치부터 말씀해주시지요.

◆ 노성태: 동림동 쪽에서 하남대로를 따라서 흑석 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가 나오는데 광신대교거든요. 영산강에 걸린 광신대교 오른쪽 벼랑 위에 거기 광산구 신창동 853번지인데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요.


◇ 지창환: 영산강변 여러 정자 중 단연 압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보통 정자하면 다들 주인공이 있잖아요. 풍영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 노성태: 조선시대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던 기구가 승문원인데 정3품 승문원판교를 지냈던 16세기 때 인물, 칠계 김언거라고 하는 분이 그 주인공이지요.

◇ 지창환: 요즘으로 하면 외교관인가요?

◆ 노성태: 외교 문서를 작성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정자의 주인공이 김언거 선생, 조금 낯선 인물인데 소개해주실까요?

◆ 노성태: 본관이 광산이고요. 호가 칠계인데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풍영정 앞을 지나던 극락강 이름을 칠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칠이 많이 났던 지역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칠천에서 따서 호를 칠계로 삼았고요. 중종 21년 1531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리고 홍문관에서 교리, 응교, 봉사시정이라고 하는 내직을 거쳐서 상주, 연안 등의 군수를 지냈던 분이신데 그해 마지막 관직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외교 문서를 작성했던 승문원 판교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30여년 동안 관직이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고요. 정치적인 갈등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피곤했던 그가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낙향해서 꿈꿨던 삶은 그의 정자 이름 풍영정에 그대로 묻어 있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그 당시 성종, 연산군, 중종 시대, 선비들 험난했던 시기잖아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김언거 선생이 낙향해서 꿈꿨던 삶이 정자 이름에 묻어 있을 것 같은데 풍영정, 풍영 뜻이 궁금해집니다.

◆ 노성태: 우리가 아는 공자가 제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 중에 최고로 치는 논어 선진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공자가 묻습니다. ‘너희의 꿈이 무엇이냐?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자 많은 제자들이 제가 국무 총리되면, 장관 되면, 국회의원 되면 세상 어떻게 바꾸겠어요 이렇게 포부를 밝히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공자 입장에서는 제자들로부터 진정 원했던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런 것 같습니다. 구석에서 비파를 타던 제자 증점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왈 막춘자 춘복기성 관자오륙인 동자륙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라고 대답하는데 공자가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고 하는 이 대목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명에 시중들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시나 읊조리다가 돌아오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무릎을 치면서 칭찬했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증점은 당대 권력 호의호식을 버리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사욕 없이 살고자 했던 자신의 뜻을 표현했던 것인데요.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에서 풍 자를 따오고요. ‘시나 읊조리다’에서 영 자를 따와서 풍영을 새긴 것을 보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연을 벗 삼고 살고자 했던 사욕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김언거의 어떤 뜻이 풍영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 지창환: 풍영이라는 말이 바람이나 쐬며 시나 읊조리다 돌아오겠다. 사욕 없는 삶을 살겠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바람 쐬며 시를 읊조린다고 했으니까 그냥 아무 데서나 바람 쐬며 시를 읊을 것 같지는 않고 풍영정 주변 경관도 대단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어떤 정자치고 경관이 안 좋은 데가 없는데요. 오늘 풍영정은 제가 가끔 찾습니다만 삐쭉삐쭉 근처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막히고. 그래서 당시보다는 멋이 조금 덜한 것 같습니다만 당시 풍영정의 경관을 볼 수 있는 시 한편을 제가 읊어 보겠습니다. 풍영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동으로는 무등 영봉, 남으로는 금성산, 나주에 있는 산이지요. 백 리 밖에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북녘 담양 용추산에서 발원하여 연중무휴 흐르는 칠천이 풍영정 절벽 기슭을 휘감고 돌아 앞으로 십여 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 버드나무 숲 광할한 들녘인데, 라는 시한 편을 들으면 앞에 전경이 그려지지 않나요? 멀리 무등산이 보이고 금성산, 월출산까지 보였던 것 같고요.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십여 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이라든가 버드나무숲이 장관을 이뤘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호남의 유명산이 다 보이고 백사장도 있고 모래톱도 있고 버드나무숲도 있고 경치가 좋았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풍영정에는 편액도 많이 있다면서요?


◆ 노성태: 경관도 방금 들으신 것처럼 대단했지만 풍영정의 격을 한 층 더 높인 것은 정자 내 걸려 있었던 70여개의 편액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안동에 사는 퇴계이황 선생인데 이황이 써 보냈던 아름다운 시문을 비롯해서 문묘에 배향된 호남 유일의 인물이 하서 김인후 선생인데 이분의 시, 임란 당시 67세의 고령임에도 의병장이 되었던 박광옥, 또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광주 출신 기대승, 문과에 장원급제 했던 고경명, 이런 분들 뿐만 아니라 이덕형, 이안눌, 권필 당대 최고봉들의 시문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정자가 풍영정이지요. 앵커님 조선시대 때 글씨 제일 잘 쓴 분이 누구인줄 아세요?
◇ 지창환: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석봉 아닌가요?

◆ 노성태: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거라. 한석봉이 주인공인데 한석봉이 썼던 제일호산이라고 하는 편액도 걸려 있습니다.

◇ 지창환: 편액이 70여개나 되는데 이황, 김인후, 기대승, 이덕형, 한석봉...

◆ 노성태: 당대 최고봉들입니다. 그분들 다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거기 가면.

◇ 지창환: 다들 그분들이 붓으로 종이에 편액의 글자를 써서 보내주면 걸었다는 것이지요?

◆ 노성태: 새겨서 걸지요.

◇ 지창환: 그러면 현판 풍영정 아까 사진도 미리 봤는데요. 글씨가 조금 삐딱하더라고요.

◆ 노성태: 앵커님이 보기에도 삐딱한가요?

◇ 지창환: 네.


◆ 노성태: 삐딱하니까 재밌는 일화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풍영정할 때 영정은 정자로 쓰여 있는데 풍 자가 삐딱하거든요. 많은 일화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일종의 상상력인 셈이지요.
◇ 지창환: 풍영정의 글씨 중에 풍 자가 조금 기울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러지요?

◆ 노성태: 김언거가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낙향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임금인 명종이 기뻐하면서 전라도 무주 구천동의 기인 갈 처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분에게 가서 글씨를 받아서 걸라고 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2번이나 갔는데도 만나지를 못해요. 13번째 가서 담배밭에서 갈 처사를 겨우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찾은 이유를 묻자 갈 처사가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서 풍영정이라고 하는 정자 이름을 써주는데 신신당부하는 것이 있지요. 절대 집에 갈 때까지 펴보지 마라 이렇게 당부를 하게 됩니다.

◇ 지창환: 그런데 옛날이야기 들어보면 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대개 펴보게 되잖아요. 그래야 이야기 되는 것이잖아요.

◆ 노성태: 견디지를 못하지요. 김언거는 글씨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래서 정자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 쉬었던 장소에서 그냥 살짝 이렇게 종이를 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순간 돌풍이 불면서 풍 자가 날아가 버리지요. 김언거가 다시 갈 처사를 찾아가서 풍 자를 써주기를 간청했지만 갈 처사가 크게 나무란 뒤 써주지 않고 지리산에 사는 그의 제자 황 처사를 소개를 해줍니다. 황 처사가 풍 자를 써주었기 때문에 영정의 두 글자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지요. 스승인 영정은 갈 처사가 썼고 풍 자는 황 처사가 썼기 때문에 다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이지요.

◇ 지창환: 실제 있었던 일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일화도 있다면서요?

◆ 노성태: 또 다른 일화도 있는데요. 풍영정 뒤로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광주도 들어오거든요. 정자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 풍영정에 불을 던지려는 찰나에 현판에 새겨졌던 풍 자가 오리로 변해서 극락강 쪽으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 이렇게 명했고 그래서 12개의 정자 중 풍영정 하나만 남았다 이런 전설이 있는데요. 그때 오리가 되어 날아간 풍 자를 후대에 다시 써 넣었기 때문에 다른 두 글자가 약간 달라졌다, 이런 일화가 전해오는 것인데 그럴 듯한, 삐딱하니까 생겨난 그럴 듯한 상상력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사롭지 않잖아요. 지금 코로나 시국에 힘드실 텐데 풍영정을 찾아가 보시면 옛날 학자들도 만나볼 수 있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경관도 즐겨 보시고 힐링 했으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영산강 100여개 정자 중 가장 아름답고 또 이야기가 남아 있는 그런 정자네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 [무등의 아침] 영산강변 정자 중 압권은 풍영정…당대 지식인들 편액 ‘빼곡’
    • 입력 2021-12-08 11:37:59
    • 수정2021-12-08 11:40:27
    광주
-무등산 자락과 영산강변에 정자 100여 곳...광주 풍영정이 압권<br />-승문원 판교(정3품) 지낸 김언거가 낙향해 광주 신창동에 조성<br />-이황, 김인후, 기대승, 한석봉 등 당대 지식인들이 쓴 편액 즐비<br />-‘바람 쐬며 시 읊조린다’는 風詠亭의 風자 기울어진 일화도 전해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무등의 아침]
■ 방송시간 : 12월 8일(수) 08:30∼09:00 KBS광주 1R FM 90.5 MHz
■ 진행 : 지창환 앵커(전 보도국장)
■ 출연 : 노성태 원장(남도역사연구원)
■ 구성 : 정유라 작가
■ 기술 : 박나영 감독



▶유튜브 영상 바로가기 주소 https://youtu.be/WCuKxHwJ1u0


◇ 지창환 앵커 (이하 지창환): 스토리로 듣는 남도 역사, 오늘도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 (이하 노성태): 안녕하십니까?


◇ 지창환: 오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 노성태: 무등산 자락 그리고 영산강변에는 100여개가 넘는 정자가 있습니다. 나름 경관과 사연을 안고 있지만 제가 볼 때 단연 압권은 풍영정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은 풍영정에 깃든 전설, 풍영정이 품은 뜻 등 풍영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지창환: 광주 광산구에 있지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영산강 자락에 위치한 풍영정. 100개가 넘는 정자 중에 단연 압권이라고 하셨잖아요?

◆ 노성태: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 지창환: 아까 광산구라고 하셨는데 일단 정확한 위치부터 말씀해주시지요.

◆ 노성태: 동림동 쪽에서 하남대로를 따라서 흑석 사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큰 다리가 나오는데 광신대교거든요. 영산강에 걸린 광신대교 오른쪽 벼랑 위에 거기 광산구 신창동 853번지인데 여기에 위치하고 있지요.


◇ 지창환: 영산강변 여러 정자 중 단연 압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보통 정자하면 다들 주인공이 있잖아요. 풍영정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요?

◆ 노성태: 조선시대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던 기구가 승문원인데 정3품 승문원판교를 지냈던 16세기 때 인물, 칠계 김언거라고 하는 분이 그 주인공이지요.

◇ 지창환: 요즘으로 하면 외교관인가요?

◆ 노성태: 외교 문서를 작성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정자의 주인공이 김언거 선생, 조금 낯선 인물인데 소개해주실까요?

◆ 노성태: 본관이 광산이고요. 호가 칠계인데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풍영정 앞을 지나던 극락강 이름을 칠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칠이 많이 났던 지역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칠천에서 따서 호를 칠계로 삼았고요. 중종 21년 1531년에 문과에 급제했고 그리고 홍문관에서 교리, 응교, 봉사시정이라고 하는 내직을 거쳐서 상주, 연안 등의 군수를 지냈던 분이신데 그해 마지막 관직은 말씀드렸던 것처럼 외교 문서를 작성했던 승문원 판교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30여년 동안 관직이 순탄했던 것 같지는 않고요. 정치적인 갈등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피곤했던 그가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낙향해서 꿈꿨던 삶은 그의 정자 이름 풍영정에 그대로 묻어 있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 지창환: 그 당시 성종, 연산군, 중종 시대, 선비들 험난했던 시기잖아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김언거 선생이 낙향해서 꿈꿨던 삶이 정자 이름에 묻어 있을 것 같은데 풍영정, 풍영 뜻이 궁금해집니다.

◆ 노성태: 우리가 아는 공자가 제자들과 격의 없는 대화 중에 최고로 치는 논어 선진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공자가 묻습니다. ‘너희의 꿈이 무엇이냐?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자 많은 제자들이 제가 국무 총리되면, 장관 되면, 국회의원 되면 세상 어떻게 바꾸겠어요 이렇게 포부를 밝히게 되는 것이지요.

◇ 지창환: 공자 입장에서는 제자들로부터 진정 원했던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런 것 같습니다. 구석에서 비파를 타던 제자 증점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왈 막춘자 춘복기성 관자오륙인 동자륙칠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라고 대답하는데 공자가 무릎을 치며 칭찬했다고 하는 이 대목을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명에 시중들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 시나 읊조리다가 돌아오는 그런 삶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공자가 무릎을 치면서 칭찬했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증점은 당대 권력 호의호식을 버리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며 사욕 없이 살고자 했던 자신의 뜻을 표현했던 것인데요. ‘무우에서 바람이나 쐬며’에서 풍 자를 따오고요. ‘시나 읊조리다’에서 영 자를 따와서 풍영을 새긴 것을 보면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연을 벗 삼고 살고자 했던 사욕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김언거의 어떤 뜻이 풍영에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 지창환: 풍영이라는 말이 바람이나 쐬며 시나 읊조리다 돌아오겠다. 사욕 없는 삶을 살겠다.

◆ 노성태: 네. 그렇습니다.

◇ 지창환: 그러면 바람 쐬며 시를 읊조린다고 했으니까 그냥 아무 데서나 바람 쐬며 시를 읊을 것 같지는 않고 풍영정 주변 경관도 대단할 것 같습니다.

◆ 노성태: 그렇습니다. 어떤 정자치고 경관이 안 좋은 데가 없는데요. 오늘 풍영정은 제가 가끔 찾습니다만 삐쭉삐쭉 근처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막히고. 그래서 당시보다는 멋이 조금 덜한 것 같습니다만 당시 풍영정의 경관을 볼 수 있는 시 한편을 제가 읊어 보겠습니다. 풍영정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동으로는 무등 영봉, 남으로는 금성산, 나주에 있는 산이지요. 백 리 밖에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이 바라보이고 북녘 담양 용추산에서 발원하여 연중무휴 흐르는 칠천이 풍영정 절벽 기슭을 휘감고 돌아 앞으로 십여 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 버드나무 숲 광할한 들녘인데, 라는 시한 편을 들으면 앞에 전경이 그려지지 않나요? 멀리 무등산이 보이고 금성산, 월출산까지 보였던 것 같고요.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십여 리에 펼쳐진 백사장과 모래톱이라든가 버드나무숲이 장관을 이뤘던 것 같습니다.

◇ 지창환: 호남의 유명산이 다 보이고 백사장도 있고 모래톱도 있고 버드나무숲도 있고 경치가 좋았네요.

◆ 노성태: 그렇습니다.

◇ 지창환: 풍영정에는 편액도 많이 있다면서요?


◆ 노성태: 경관도 방금 들으신 것처럼 대단했지만 풍영정의 격을 한 층 더 높인 것은 정자 내 걸려 있었던 70여개의 편액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안동에 사는 퇴계이황 선생인데 이황이 써 보냈던 아름다운 시문을 비롯해서 문묘에 배향된 호남 유일의 인물이 하서 김인후 선생인데 이분의 시, 임란 당시 67세의 고령임에도 의병장이 되었던 박광옥, 또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광주 출신 기대승, 문과에 장원급제 했던 고경명, 이런 분들 뿐만 아니라 이덕형, 이안눌, 권필 당대 최고봉들의 시문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정자가 풍영정이지요. 앵커님 조선시대 때 글씨 제일 잘 쓴 분이 누구인줄 아세요?
◇ 지창환: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석봉 아닌가요?

◆ 노성태: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쓰거라. 한석봉이 주인공인데 한석봉이 썼던 제일호산이라고 하는 편액도 걸려 있습니다.

◇ 지창환: 편액이 70여개나 되는데 이황, 김인후, 기대승, 이덕형, 한석봉...

◆ 노성태: 당대 최고봉들입니다. 그분들 다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거기 가면.

◇ 지창환: 다들 그분들이 붓으로 종이에 편액의 글자를 써서 보내주면 걸었다는 것이지요?

◆ 노성태: 새겨서 걸지요.

◇ 지창환: 그러면 현판 풍영정 아까 사진도 미리 봤는데요. 글씨가 조금 삐딱하더라고요.

◆ 노성태: 앵커님이 보기에도 삐딱한가요?

◇ 지창환: 네.


◆ 노성태: 삐딱하니까 재밌는 일화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풍영정할 때 영정은 정자로 쓰여 있는데 풍 자가 삐딱하거든요. 많은 일화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일종의 상상력인 셈이지요.
◇ 지창환: 풍영정의 글씨 중에 풍 자가 조금 기울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러지요?

◆ 노성태: 김언거가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낙향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당시 임금인 명종이 기뻐하면서 전라도 무주 구천동의 기인 갈 처사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분에게 가서 글씨를 받아서 걸라고 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12번이나 갔는데도 만나지를 못해요. 13번째 가서 담배밭에서 갈 처사를 겨우 만나서 통성명을 하고 찾은 이유를 묻자 갈 처사가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서 풍영정이라고 하는 정자 이름을 써주는데 신신당부하는 것이 있지요. 절대 집에 갈 때까지 펴보지 마라 이렇게 당부를 하게 됩니다.

◇ 지창환: 그런데 옛날이야기 들어보면 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대개 펴보게 되잖아요. 그래야 이야기 되는 것이잖아요.

◆ 노성태: 견디지를 못하지요. 김언거는 글씨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그래서 정자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 쉬었던 장소에서 그냥 살짝 이렇게 종이를 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순간 돌풍이 불면서 풍 자가 날아가 버리지요. 김언거가 다시 갈 처사를 찾아가서 풍 자를 써주기를 간청했지만 갈 처사가 크게 나무란 뒤 써주지 않고 지리산에 사는 그의 제자 황 처사를 소개를 해줍니다. 황 처사가 풍 자를 써주었기 때문에 영정의 두 글자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지요. 스승인 영정은 갈 처사가 썼고 풍 자는 황 처사가 썼기 때문에 다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이지요.

◇ 지창환: 실제 있었던 일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일화도 있다면서요?

◆ 노성태: 또 다른 일화도 있는데요. 풍영정 뒤로 11채의 정자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광주도 들어오거든요. 정자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 풍영정에 불을 던지려는 찰나에 현판에 새겨졌던 풍 자가 오리로 변해서 극락강 쪽으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 이렇게 명했고 그래서 12개의 정자 중 풍영정 하나만 남았다 이런 전설이 있는데요. 그때 오리가 되어 날아간 풍 자를 후대에 다시 써 넣었기 때문에 다른 두 글자가 약간 달라졌다, 이런 일화가 전해오는 것인데 그럴 듯한, 삐딱하니까 생겨난 그럴 듯한 상상력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예사롭지 않잖아요. 지금 코로나 시국에 힘드실 텐데 풍영정을 찾아가 보시면 옛날 학자들도 만나볼 수 있고 아직도 남아 있는 경관도 즐겨 보시고 힐링 했으면 좋겠습니다.

◇ 지창환: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영산강 100여개 정자 중 가장 아름답고 또 이야기가 남아 있는 그런 정자네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노성태: 감사합니다.

◇ 지창환: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남도역사연구원 노성태 원장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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