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죽은 흑표범…태국 재벌을 심판하다

입력 2021.12.10 (08:0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재벌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전무죄' 태국에서는 드문 일이다. 태국은 재벌 3세가 술을 마시고 자신의 페라리로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해도 처벌을 못 하는 나라다.

2018년 2월 3일. 태국 퉁야이 나레수안 국립공원Thungyai Naresuan national park. 이탈리안-타이개발(ITD)의 '쁘렘차이 까르나수타(64)회장이 국립공원을 찾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통야이 국립공원은 대부분 민간인 출입이 어렵다. 이날 쁘렘차이 일행은 '자연학습'을 한다며 출입 허가를 받았다.

2018년 2월 체포 당시 쁘렘차이회장, 자신의 운전기사와 요리사 그리고 사냥 가이드도 함께 체포됐다. 사진 통야이국립공원2018년 2월 체포 당시 쁘렘차이회장, 자신의 운전기사와 요리사 그리고 사냥 가이드도 함께 체포됐다. 사진 통야이국립공원

ITD는 32개 계열사를 가진 재벌 그룹이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을 건설했고, 지금도 방콕 지상철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재벌총수가 방문하자 국립공원 측이 저녁식사를 제안했는데, 그들은 식사를 따로 준비해왔다고 했다).

다음 날 저녁, 숲속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현장을 찾은 국립공원 직원들이 사슴과 칼리지페즌트(꿩과의 조류), 그리고 흑표범의 사체를 발견했다. 3정의 사냥총과 수백 발의 탄창도 압수했다. 흑표범은 이미 도륙이 끝나 가죽만 남아있었다.

태국에서 흑표범은 희귀종이며 멸종위기종이다. 쁘렘차이와 그의 운전기사, 그의 요리사와 사냥 가이드 등 4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친 뒤였다. 저녁식사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한 죽은 흑표범의 길이를 재고 있다. 쁘렘차이 일행은 흑표범으로 요리한 수프를 먹다 현장에서 적발됐다. 사진 SNS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한 죽은 흑표범의 길이를 재고 있다. 쁘렘차이 일행은 흑표범으로 요리한 수프를 먹다 현장에서 적발됐다. 사진 SNS

도륙된 흑표범
태국은 불교국가다. 유독 살생을 꺼린다. 환경단체들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쁘렘차이의 집을 압수수색한 경찰이 여러 정의 총기와 4개의 대형 코끼리 상아를 찾아냈다. 4명 모두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가이드는 3년 5개월을 선고 받았다. 정작 쁘렘차이회장은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을 앞두고 갑자기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또 '유전무죄'가 되풀이됐다. '불공정'에 지친 시민들이 분노했다.

허기져 야생동물을 잡아먹은 서민들은 처벌받고, 권력층은 취미로 사냥을 즐기는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환경운동가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법원 주변 골목에 죽은 흑표범을 상징하는 벽화가 그려졌다.

(지난 9월 태국은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다. 진원지는 방콕 시내 통러의 유흥가였다. 1%의 부유층이 다니는 고급 VIP 클럽들이 영업을 하면서 확진자를 양산했다. 반면 감염돼도 병원에 가기 힘든 서민들은 비교적 방역원칙을 잘 지켰지만, 이후 도시봉쇄로 피해는 결국 대부분 도시 서민들에게 돌아갔다)

SNS에는 시민들의 패러디가 수없이 올라왔다(그해 2월 공교롭게 마블의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다). 성큼 자란 환경에 대한 인식과 공정에 대한 요구가 모아져 '여론'이 됐다. 이 여론은 가뜩이나 인기가 없는 정권에 부담이 됐다.

시민들이 그린 흑표범 벽화. 2018년. 사진 SNS시민들이 그린 흑표범 벽화. 2018년. 사진 SNS

시민들의 분노는 여러 패러디로 이어졌다. 죽은 흑표범이 쁘렘차이의 ITD 본사 건물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석방 된 뒤에 2심에 출석한 쁘렘차이회장(우)  사진 트위터/ Wadee D. and Ati_New18시민들의 분노는 여러 패러디로 이어졌다. 죽은 흑표범이 쁘렘차이의 ITD 본사 건물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석방 된 뒤에 2심에 출석한 쁘렘차이회장(우) 사진 트위터/ Wadee D. and Ati_New18

한 환경운동가가 쁘렘차이의 체포 당시 모습을 재연했다. 죽은 흑표범 대신 영화 속 ‘블랙 팬서(흑표범)’가 등장했다. 블랙팬서는 마침 사건이 벌어진 2018년 2월 개봉했다.한 환경운동가가 쁘렘차이의 체포 당시 모습을 재연했다. 죽은 흑표범 대신 영화 속 ‘블랙 팬서(흑표범)’가 등장했다. 블랙팬서는 마침 사건이 벌어진 2018년 2월 개봉했다.

흑표범, 심판의 날 (12월 8일)

대법 판결이 나기 전날, 시민들은 방콕문화예술센터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행사 제목은 "흑표범, 심판의 날". 트위터 해시태그에 #sueydam(흑표범의 태국식 발음) 와 #blackpanther가 수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8일, 사건 4년만에 대법원 재판이 열렸다.

쁘렘차이는 지팡이를 짚고 왼쪽 눈에 붕대를 붙인 채 재판에 출석했다. 대법원은 쁘렘차이에게 가석방없는 '징역 3년 2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 나왔다.

(태국 검찰은 대법 판결 직전 쁘렘차이가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고 발표해서 모든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지 언론은 그가 흑표범의 심판을 받았다고 했다. SNS에는 '흑표범의 저주'라는 글도 많았다. 물론 그가 또 어떤 방식으로 또 풀려날 지는 지켜봐야 한다. 대법원 판결 하루만에 쁘렘차이는 병보석을 신청하고 방콕 시내 병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죽은 흑표범이 '공정'과 '환경보호'에 대한 태국인들의 인식을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죽은 흑표범이 산 재벌을 잡았다.

대법원 재판에 출석한 이탈리안-타이 개발(ITD) 쁘렘차이회장, 지팡이를 짚고 눈에 붕대를 감고 출석했다. 대법원은 징역 3년 2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사진 AP대법원 재판에 출석한 이탈리안-타이 개발(ITD) 쁘렘차이회장, 지팡이를 짚고 눈에 붕대를 감고 출석했다. 대법원은 징역 3년 2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사진 AP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죽은 흑표범…태국 재벌을 심판하다
    • 입력 2021-12-10 08:02:09
    특파원 리포트

재벌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전무죄' 태국에서는 드문 일이다. 태국은 재벌 3세가 술을 마시고 자신의 페라리로 경찰을 치어 숨지게 해도 처벌을 못 하는 나라다.

2018년 2월 3일. 태국 퉁야이 나레수안 국립공원Thungyai Naresuan national park. 이탈리안-타이개발(ITD)의 '쁘렘차이 까르나수타(64)회장이 국립공원을 찾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통야이 국립공원은 대부분 민간인 출입이 어렵다. 이날 쁘렘차이 일행은 '자연학습'을 한다며 출입 허가를 받았다.

2018년 2월 체포 당시 쁘렘차이회장, 자신의 운전기사와 요리사 그리고 사냥 가이드도 함께 체포됐다. 사진 통야이국립공원
ITD는 32개 계열사를 가진 재벌 그룹이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을 건설했고, 지금도 방콕 지상철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재벌총수가 방문하자 국립공원 측이 저녁식사를 제안했는데, 그들은 식사를 따로 준비해왔다고 했다).

다음 날 저녁, 숲속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현장을 찾은 국립공원 직원들이 사슴과 칼리지페즌트(꿩과의 조류), 그리고 흑표범의 사체를 발견했다. 3정의 사냥총과 수백 발의 탄창도 압수했다. 흑표범은 이미 도륙이 끝나 가죽만 남아있었다.

태국에서 흑표범은 희귀종이며 멸종위기종이다. 쁘렘차이와 그의 운전기사, 그의 요리사와 사냥 가이드 등 4명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친 뒤였다. 저녁식사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한 죽은 흑표범의 길이를 재고 있다. 쁘렘차이 일행은 흑표범으로 요리한 수프를 먹다 현장에서 적발됐다. 사진 SNS
도륙된 흑표범
태국은 불교국가다. 유독 살생을 꺼린다. 환경단체들이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쁘렘차이의 집을 압수수색한 경찰이 여러 정의 총기와 4개의 대형 코끼리 상아를 찾아냈다. 4명 모두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 가이드는 3년 5개월을 선고 받았다. 정작 쁘렘차이회장은 징역 1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을 앞두고 갑자기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또 '유전무죄'가 되풀이됐다. '불공정'에 지친 시민들이 분노했다.

허기져 야생동물을 잡아먹은 서민들은 처벌받고, 권력층은 취미로 사냥을 즐기는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환경운동가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법원 주변 골목에 죽은 흑표범을 상징하는 벽화가 그려졌다.

(지난 9월 태국은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했다. 진원지는 방콕 시내 통러의 유흥가였다. 1%의 부유층이 다니는 고급 VIP 클럽들이 영업을 하면서 확진자를 양산했다. 반면 감염돼도 병원에 가기 힘든 서민들은 비교적 방역원칙을 잘 지켰지만, 이후 도시봉쇄로 피해는 결국 대부분 도시 서민들에게 돌아갔다)

SNS에는 시민들의 패러디가 수없이 올라왔다(그해 2월 공교롭게 마블의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다). 성큼 자란 환경에 대한 인식과 공정에 대한 요구가 모아져 '여론'이 됐다. 이 여론은 가뜩이나 인기가 없는 정권에 부담이 됐다.

시민들이 그린 흑표범 벽화. 2018년. 사진 SNS
시민들의 분노는 여러 패러디로 이어졌다. 죽은 흑표범이 쁘렘차이의 ITD 본사 건물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가석방 된 뒤에 2심에 출석한 쁘렘차이회장(우)  사진 트위터/ Wadee D. and Ati_New18
한 환경운동가가 쁘렘차이의 체포 당시 모습을 재연했다. 죽은 흑표범 대신 영화 속 ‘블랙 팬서(흑표범)’가 등장했다. 블랙팬서는 마침 사건이 벌어진 2018년 2월 개봉했다.
흑표범, 심판의 날 (12월 8일)

대법 판결이 나기 전날, 시민들은 방콕문화예술센터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행사 제목은 "흑표범, 심판의 날". 트위터 해시태그에 #sueydam(흑표범의 태국식 발음) 와 #blackpanther가 수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8일, 사건 4년만에 대법원 재판이 열렸다.

쁘렘차이는 지팡이를 짚고 왼쪽 눈에 붕대를 붙인 채 재판에 출석했다. 대법원은 쁘렘차이에게 가석방없는 '징역 3년 2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 나왔다.

(태국 검찰은 대법 판결 직전 쁘렘차이가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고 발표해서 모든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현지 언론은 그가 흑표범의 심판을 받았다고 했다. SNS에는 '흑표범의 저주'라는 글도 많았다. 물론 그가 또 어떤 방식으로 또 풀려날 지는 지켜봐야 한다. 대법원 판결 하루만에 쁘렘차이는 병보석을 신청하고 방콕 시내 병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죽은 흑표범이 '공정'과 '환경보호'에 대한 태국인들의 인식을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죽은 흑표범이 산 재벌을 잡았다.

대법원 재판에 출석한 이탈리안-타이 개발(ITD) 쁘렘차이회장, 지팡이를 짚고 눈에 붕대를 감고 출석했다. 대법원은 징역 3년 2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사진 AP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