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 교수 100여 명에 연락”…학생들의 외침 통했다

입력 2021.12.15 (16:27) 수정 2021.12.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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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네가 나서야겠느냐, 네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분들도 할 수 있지 않느냐, 혹은 꼭 그렇게까지 중요한 거냐고 말씀했지만, 오늘 재판 결과로만 봤을 때 저희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욱/수능 응시생)

"이번 소송은 출제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고만 하는 평가원에 대해 집단지성으로 힘을 합쳐 저항한 학생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선/수능 응시생 소송 대리 변호사)

올해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은 '출제 오류'를 주장하며 시험 문제를 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평가원은 대형 로펌을 선임해 끝까지 맞섰지만, 법원은 오늘(15일)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강태중 평가원장은 결국 사퇴를 표명했고, 학생들을 상대로 한 항소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수능 문제와 정답에 오류가 있었던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8번의 사례가 있었고, 이때마다 복수정답 처리되거나 전원 정답처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소송까지 간 뒤 1심에서 곧바로 평가원이 패소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평가원은 그동안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는데요.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된 셈입니다.

대입 일정에 혼선을 빚고 학생과 학부모들이 불편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평가원이 끝까지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오만한' 태도가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 소송 나선 92명의 학생들…"풀고 또 풀었지만 답 없었다"

이의제기에도 평가원은 꿈쩍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체 카카오톡방을 만들었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소송에 나섰습니다. 지난 10일 열린 재판에도 직접 찾아가 목소리를 냈습니다.

"20번 문제의 답을 구하려고 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하면서 풀고 또 풀고 검토했습니다. 그래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이 문제에 10분 넘게 투자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나머지 두 문제를 풀려고 했으나 찝찝함으로 두 문제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제가 시간을 허비했고 엉터리가 돼버렸습니다." (이주원/수능 응시생)

목소리에 힘을 보태기 위해 관련 교수들과 학회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은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끔 답변이 와도, 자신의 전공이 아니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소송을 대리한 김정선 변호사는 "학생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교수님들과 학회는 끝까지 침묵과 무관심으로 답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 "교수 100여 명에게 메일 보냈다"…美 스탠퍼드대 석좌 교수가 답변

답변은 의외의 곳에서 왔습니다. 조너선 프리처드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지난 11일(현지시각) 자신의 트위터에 박사 과정에 있는 매튜 아기레 연구원의 문제 풀이를 공유했습니다. 아기레 연구원은 생명과학Ⅱ 20번을 풀이하며 "터무니없이 어렵고 사실 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썼습니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20살 임 모 학생은 "제가 이름 들어본 대학부터 시작해서 100여 명의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며 "스탠퍼드 대학의 생물학과 교수님들에게도 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문제와 풀이 해설을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학생은 "사실 보낼 때는 이미 국내 교수님들의 답변이 거의 안 와서, 외국 교수님들께 전혀 답변이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며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명확하고 명백한 답변이 왔을 때 더 좀 더 기뻤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임 모 학생이 직접 해외 석학들에게 보낸 메일 내용임 모 학생이 직접 해외 석학들에게 보낸 메일 내용

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생명과학Ⅱ 문제 내용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생명과학Ⅱ 문제 내용

■ 평가원 "문제 풀이에 필요 없는 조건 그냥 지나쳤다…책임 절감"

이번 사태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평가원은 "문제를 풀이하는 데 필요 없는 조건이라고 하는 부분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판단하고 지나갔던 것 같다"며 "문항에 오류가 발견되는 부분들까지 검토 과정에서 이뤄지지 못해 완전한 문항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책임을 절감한다며, 재발을 막기 위해 제도 전반을 점검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학생과 학부모들은 대입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고, 큰 불안과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생명과학Ⅱ 응시생은 전체 응시생의 1.5%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서울대나 의대 등을 지망하는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입니다. 20번 문항을 모두 정답 처리 하면서 평균점수가 올라갈 경우 기존에 정답을 선택했던 학생들은 표준점수가 떨어지며 등급이 하락할 수도 있습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올해 이과 상위권에서 수학 고득점자가 대거 발생함에 따라 과학탐구영역의 변별력이 높아졌다"며 "표준점수가 1점가량 하락하게 된 만큼 정시에서 생명과학Ⅱ를 선택한 수험생들이 다른 과학탐구 과목 선택한 학생들에 비해 불이익을 받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생명과학Ⅱ를 응시한 수험생은 오늘 오후 6시부터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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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과학 교수 100여 명에 연락”…학생들의 외침 통했다
    • 입력 2021-12-15 16:27:41
    • 수정2021-12-15 19:32:53
    취재K

"굳이 네가 나서야겠느냐, 네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분들도 할 수 있지 않느냐, 혹은 꼭 그렇게까지 중요한 거냐고 말씀했지만, 오늘 재판 결과로만 봤을 때 저희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욱/수능 응시생)

"이번 소송은 출제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고만 하는 평가원에 대해 집단지성으로 힘을 합쳐 저항한 학생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선/수능 응시생 소송 대리 변호사)

올해 수능 생명과학Ⅱ 응시자 92명은 '출제 오류'를 주장하며 시험 문제를 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평가원은 대형 로펌을 선임해 끝까지 맞섰지만, 법원은 오늘(15일)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강태중 평가원장은 결국 사퇴를 표명했고, 학생들을 상대로 한 항소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수능 문제와 정답에 오류가 있었던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모두 8번의 사례가 있었고, 이때마다 복수정답 처리되거나 전원 정답처리가 됐습니다.

하지만 소송까지 간 뒤 1심에서 곧바로 평가원이 패소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평가원은 그동안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는데요. 완전히 체면을 구기게 된 셈입니다.

대입 일정에 혼선을 빚고 학생과 학부모들이 불편을 겪을 것을 알면서도, 평가원이 끝까지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오만한' 태도가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 소송 나선 92명의 학생들…"풀고 또 풀었지만 답 없었다"

이의제기에도 평가원은 꿈쩍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체 카카오톡방을 만들었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소송에 나섰습니다. 지난 10일 열린 재판에도 직접 찾아가 목소리를 냈습니다.

"20번 문제의 답을 구하려고 했지만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하면서 풀고 또 풀고 검토했습니다. 그래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이 문제에 10분 넘게 투자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나머지 두 문제를 풀려고 했으나 찝찝함으로 두 문제에 온전하게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제가 시간을 허비했고 엉터리가 돼버렸습니다." (이주원/수능 응시생)

목소리에 힘을 보태기 위해 관련 교수들과 학회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은 답변을 주지 않았습니다. 가끔 답변이 와도, 자신의 전공이 아니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소송을 대리한 김정선 변호사는 "학생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교수님들과 학회는 끝까지 침묵과 무관심으로 답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 "교수 100여 명에게 메일 보냈다"…美 스탠퍼드대 석좌 교수가 답변

답변은 의외의 곳에서 왔습니다. 조너선 프리처드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는 지난 11일(현지시각) 자신의 트위터에 박사 과정에 있는 매튜 아기레 연구원의 문제 풀이를 공유했습니다. 아기레 연구원은 생명과학Ⅱ 20번을 풀이하며 "터무니없이 어렵고 사실 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썼습니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20살 임 모 학생은 "제가 이름 들어본 대학부터 시작해서 100여 명의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다"며 "스탠퍼드 대학의 생물학과 교수님들에게도 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문제와 풀이 해설을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학생은 "사실 보낼 때는 이미 국내 교수님들의 답변이 거의 안 와서, 외국 교수님들께 전혀 답변이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며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명확하고 명백한 답변이 왔을 때 더 좀 더 기뻤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임 모 학생이 직접 해외 석학들에게 보낸 메일 내용
학생들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생명과학Ⅱ 문제 내용
■ 평가원 "문제 풀이에 필요 없는 조건 그냥 지나쳤다…책임 절감"

이번 사태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평가원은 "문제를 풀이하는 데 필요 없는 조건이라고 하는 부분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으로 판단하고 지나갔던 것 같다"며 "문항에 오류가 발견되는 부분들까지 검토 과정에서 이뤄지지 못해 완전한 문항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책임을 절감한다며, 재발을 막기 위해 제도 전반을 점검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학생과 학부모들은 대입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고, 큰 불안과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생명과학Ⅱ 응시생은 전체 응시생의 1.5%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서울대나 의대 등을 지망하는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입니다. 20번 문항을 모두 정답 처리 하면서 평균점수가 올라갈 경우 기존에 정답을 선택했던 학생들은 표준점수가 떨어지며 등급이 하락할 수도 있습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올해 이과 상위권에서 수학 고득점자가 대거 발생함에 따라 과학탐구영역의 변별력이 높아졌다"며 "표준점수가 1점가량 하락하게 된 만큼 정시에서 생명과학Ⅱ를 선택한 수험생들이 다른 과학탐구 과목 선택한 학생들에 비해 불이익을 받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생명과학Ⅱ를 응시한 수험생은 오늘 오후 6시부터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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