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운전 사고·살해 시도 해놓고 “심신미약”…법원 판단은?

입력 2022.01.04 (07:0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강력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이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또 법원이 이를 인정해 처벌이 감경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알려질 때마다 '심신미약'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되고 있다며 공분을 사기도 하는데요.

최근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하거나 살인을 시도한 뒤 잇따라 심신미약을 주장한 남성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 갓길 걷던 70대 남성 숨지게 한 음주 뺑소니범 징역 7년 선고

60대 김 모 씨는 지난해 5월 6일 새벽 1시 반쯤 충남 천안시 동남구에서 술을 마시고 승용차를 몰았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라 주의해서 운전해야 했지만 술을 마신 김 씨는 도로 갓길을 따라 걷던 70대 남성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남성은 목뼈 쪽을 크게 다쳐 쓰려졌지만 김 씨는 그대로 차를 몰고 달아났고 결국, 남성은 사고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김 씨는 이른바 '윤창호법'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도주치사 혐의가 적용돼 재판에 넘겨졌는데요.

1심 법원은 김 씨가 아무런 조치 없이 달아나 피해자가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도주치상과 음주운전으로 여러 번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데도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 "금연약 먹은 상태에서 술 마셔 심신미약"...징역 7년 무겁다며 항소

그러나 김 씨는 금연약을 먹은 상태에서 술을 마셔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며 징역 7년은 너무 무겁다고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한 금연보조제의 주의 사항을 보면 음주를 동반할 경우 때때로 공격적인 행동과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며 알코올 섭취를 피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실제로 이런 증상이 나타나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 "위험성 인식하고도 스스로 심신장애 초래"...항소 기각

항소심 재판부는 일단 김 씨가 금연약을 복용하면서 술을 마신 뒤 범행을 저지른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형법 제10조 3항,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일으킨 자는 심신미약으로 형을 감경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김 씨가 술을 마시고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는데도 차를 운전하는 등 스스로 심신장애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 건데요.

여기에 피해자를 구하지 않고 달아난 점이 죄질이 나쁘고 피해자 유족과도 합의되지 않았다며 김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 70대 남성, 부인이 자신 내쫓을 것이라며 살해 결심

부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해 놓고 심신미약을 주장한 남성도 있었습니다. 대전에 거주하던 79살 A 씨는 부인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부터 주거지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토지보상 절차가 진행되자 부인이 부산에 있는 딸에게 부동산 소유권을 넘겨줬는데요.

이때부터 부인이 자신을 거리로 내쫓고 딸에게 갈 것이라고 의심하며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부인이 딸 집에 갔다가 오랜 기간 머물고 돌아오자 이런 의심에 사로 잡혀 부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스스로 경찰에 신고한 뒤 부인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살인미수 혐의로 기소

A 씨는 부인을 살해하고 교도소에서 여생을 마감하겠다며 범행 전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가정싸움이 크게 나서 사람이 죽게 생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 A 씨는 쇠로 된 둔기를 가져와 부인의 머리를 수차례 내리치고, 배와 팔 등을 마구 밟았습니다.

이어 둔기로 부인을 살해하려고 했는데요. 그 순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 "종교적 과대망상·집에서 내쫓길 것이라고 생각"...심신미약 주장

A 씨는 범행 당시 종교적 과대망상 또는 집에서 내쫓겨 생존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 역시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A 씨가 수사기관에서 범행 경위와 당시 정황을 질문에 맞게 대답하는 등 자신의 행동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A 씨가 스스로 112에 신고하면서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말한 점, 신고 이유에 대해서도 부인이 살 운명이었으면 경찰관이 일찍 도착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경찰관이 늦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진술한 점을 보면 자신의 행동으로 부인이 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봤습니다.

종교적 과대망상이 있었다는 주장도 재산 다툼을 더 큰 원인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1심 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고, A 씨가 항소했지만 항소심 역시 같은 취지로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김 씨는 상고했고, A 씨는 아직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는데요.

결론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들의 심신미약 주장, 인정받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음주운전 사고·살해 시도 해놓고 “심신미약”…법원 판단은?
    • 입력 2022-01-04 07:00:04
    취재K

강력 범죄를 저질러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이 법정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하고 또 법원이 이를 인정해 처벌이 감경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알려질 때마다 '심신미약'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되고 있다며 공분을 사기도 하는데요.

최근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하거나 살인을 시도한 뒤 잇따라 심신미약을 주장한 남성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 갓길 걷던 70대 남성 숨지게 한 음주 뺑소니범 징역 7년 선고

60대 김 모 씨는 지난해 5월 6일 새벽 1시 반쯤 충남 천안시 동남구에서 술을 마시고 승용차를 몰았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라 주의해서 운전해야 했지만 술을 마신 김 씨는 도로 갓길을 따라 걷던 70대 남성을 들이받았습니다.

이 남성은 목뼈 쪽을 크게 다쳐 쓰려졌지만 김 씨는 그대로 차를 몰고 달아났고 결국, 남성은 사고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김 씨는 이른바 '윤창호법'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도주치사 혐의가 적용돼 재판에 넘겨졌는데요.

1심 법원은 김 씨가 아무런 조치 없이 달아나 피해자가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도주치상과 음주운전으로 여러 번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데도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 "금연약 먹은 상태에서 술 마셔 심신미약"...징역 7년 무겁다며 항소

그러나 김 씨는 금연약을 먹은 상태에서 술을 마셔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며 징역 7년은 너무 무겁다고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한 금연보조제의 주의 사항을 보면 음주를 동반할 경우 때때로 공격적인 행동과 기억상실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며 알코올 섭취를 피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실제로 이런 증상이 나타나 범행 당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 "위험성 인식하고도 스스로 심신장애 초래"...항소 기각

항소심 재판부는 일단 김 씨가 금연약을 복용하면서 술을 마신 뒤 범행을 저지른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형법 제10조 3항,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일으킨 자는 심신미약으로 형을 감경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김 씨가 술을 마시고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는데도 차를 운전하는 등 스스로 심신장애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 건데요.

여기에 피해자를 구하지 않고 달아난 점이 죄질이 나쁘고 피해자 유족과도 합의되지 않았다며 김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 70대 남성, 부인이 자신 내쫓을 것이라며 살해 결심

부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해 놓고 심신미약을 주장한 남성도 있었습니다. 대전에 거주하던 79살 A 씨는 부인과 종교 문제로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러다 2019년부터 주거지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토지보상 절차가 진행되자 부인이 부산에 있는 딸에게 부동산 소유권을 넘겨줬는데요.

이때부터 부인이 자신을 거리로 내쫓고 딸에게 갈 것이라고 의심하며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부인이 딸 집에 갔다가 오랜 기간 머물고 돌아오자 이런 의심에 사로 잡혀 부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스스로 경찰에 신고한 뒤 부인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살인미수 혐의로 기소

A 씨는 부인을 살해하고 교도소에서 여생을 마감하겠다며 범행 전 스스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가정싸움이 크게 나서 사람이 죽게 생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뒤 A 씨는 쇠로 된 둔기를 가져와 부인의 머리를 수차례 내리치고, 배와 팔 등을 마구 밟았습니다.

이어 둔기로 부인을 살해하려고 했는데요. 그 순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됐고 살인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 "종교적 과대망상·집에서 내쫓길 것이라고 생각"...심신미약 주장

A 씨는 범행 당시 종교적 과대망상 또는 집에서 내쫓겨 생존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 역시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A 씨가 수사기관에서 범행 경위와 당시 정황을 질문에 맞게 대답하는 등 자신의 행동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A 씨가 스스로 112에 신고하면서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말한 점, 신고 이유에 대해서도 부인이 살 운명이었으면 경찰관이 일찍 도착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경찰관이 늦게 도착했을 것이라고 진술한 점을 보면 자신의 행동으로 부인이 숨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봤습니다.

종교적 과대망상이 있었다는 주장도 재산 다툼을 더 큰 원인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1심 재판부는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고, A 씨가 항소했지만 항소심 역시 같은 취지로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김 씨는 상고했고, A 씨는 아직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는데요.

결론은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들의 심신미약 주장, 인정받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