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 쟁취” 구호가 2022년 지금도…‘인화 경영’ LG의 기이한 사내 선거

입력 2022.01.05 (11:39) 수정 2022.01.0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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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제를 쟁취하자. 이 구호는 1980년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1987년 헌법이 바뀌었다. 이후 직접 선거는 마치 공기와 같아졌다. 내 손으로 내 대표를 뽑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됐다.

비단 정치 권력에 그치지 않는다. 분야를 막론한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도 직접 뽑는다. IT 기술 덕에 절차적 문턱도 낮아졌다. 전자투표는 간편하면서도 믿을 만하다.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1. LG전자, 30년 넘게 '간선제' 고집

그런데 LG전자는 직선제를 마다한다. 민간 회사에서 웬 선거 얘기냐고? 노사협의회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LG전자는 근로자대표를 굳이 간선제로 뽑고 있다.

■ 노사협의회란?
직원 복지와 회사 발전을 위한 노사의 논의기구. 근로자와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각 3명~10명)이 분기마다 만난다. 직원 수가 30명을 넘으면 반드시 설치해야 하고, 노조의 활동과는 별도의 기구다.

현행법은 노사협의회에 들어가는 근로자대표를 근로자들이 선거로 뽑도록 하고 있다. 당연히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를 원칙으로 한다. 말했듯이 직선제는 이미 공기와 같은 무엇이 됐으니까.

다만, 직원의 절반이 넘는 과반노조가 있을 때만 그 노조가 선출 대신 위촉할 수 있을 뿐이다.

LG전자에는 과반노조가 없다. 근로자대표를 선거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뽑는다. 독특한 구조다.

LG전자의 전체 직원은 4만여 명. 전 직원이 일종의 선거인단 격인 위원선거인을 뽑는다. 위원선거인들이 근로자대표를 뽑는 구조다.


직선제를 어겼으니 위법 아니냐고? 위법은 아니다. 법이 예외를 두고 있어서다.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있을 때는 간선을 할 수는 있다.

LG전자가 직접 선거를 못하는 부득이한 사정은 뭘까. 1분도 채 안 걸리는 전자투표가 보편화된 마당에. 그것도 IT테크 업체가. 회사는 따로 밝힐 입장이 없다고 전해왔다.

2. 제가 '그 자리' 라고요?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선거인단격인 위원선거인의 구성 방식도 이해하기 어렵다.

직원이 선거인단을 뽑지 않는다. 그럼 누가? 회사가 임명한다. 그리고 사후에 직원 동의를 받는다. 회사와 협상할 직원 대표를 뽑는 절차에 회사가 개입하는 구조다.

임명 자체도 요식행위다. 누구를 위원선거인으로 임명했는지도 충분히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이 근로자대표를 뽑을 선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

정리하면, 회사가 간접 투표에 나설 위원선거인을 대신 지명한다. 그렇게 지명된 이들이 근로자대표를 뽑는다. 투표 과정은 비밀에 부쳐진다.

선거 방식이 이러하니 최종 선출된 근로자대표도 유령에 가깝다. 존재는 하나 실체를 알 수 없다.

최근 LG전자 사무직 노조가 실태를 조사해보니, '제가 근로자대표라고요?' 라는 반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노사협의회 안건이 무언지 조차 알 리가 없는 건 두말 할 필요도 없고.

3. 고용노동부 "LG전자 위법"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지난해 8월 이 문제를 고용노동부에 진정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달 초 LG전자의 위법을 인정했다.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이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고용노동부는 위법이라는 판단은 했지만 처벌은 하지 못했다. 현행법이 근로자대표 선출 방식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대한 벌칙 조항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사협의회 자체를 두지 않으면 처벌하지만, 대표 선출 방식까지는 처벌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입법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게 너무나 당연할 것으로 전제한 것으로 보인다.

LG전자는 노사협의회를 두고 있다. 분기마다 회의도 연다. 외형적으로는 법을 잘 준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회의에 들어갈 대표자들을 밀실에서 뽑는다. 안건도 충분히 공개하지 않는다. 회의 결과도 사실상 비공개한다.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회사의 '모르쇠식' 운영을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문제적 대통령을 뽑았던 '체육관 선거'와 뭐가 다르냐고.

4. LG전자 "고용부 판단 존중…개선할 것"

대기업의 노사협의회 운영 문제를 고용노동부가 감독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용부 안에서도 의견 차가 컸다고 한다. 수사로 전환해 입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노동부는 일단 행정지도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LG전자는 "고용노동부의 행정지도를 존중해 운영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바꿀 것인지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LG의 경영 이념은 널리 알려졌듯이 '인화 경영'이다. 인화란 사람을 아끼고 서로 화합한다는 뜻이다. LG전자의 사내 선거는 인화 정신에 부합할까.

대문사진 : 서혜영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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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선제 쟁취” 구호가 2022년 지금도…‘인화 경영’ LG의 기이한 사내 선거
    • 입력 2022-01-05 11:39:58
    • 수정2022-01-05 14:21:18
    취재K

직선제를 쟁취하자. 이 구호는 1980년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1987년 헌법이 바뀌었다. 이후 직접 선거는 마치 공기와 같아졌다. 내 손으로 내 대표를 뽑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됐다.

비단 정치 권력에 그치지 않는다. 분야를 막론한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도 직접 뽑는다. IT 기술 덕에 절차적 문턱도 낮아졌다. 전자투표는 간편하면서도 믿을 만하다.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1. LG전자, 30년 넘게 '간선제' 고집

그런데 LG전자는 직선제를 마다한다. 민간 회사에서 웬 선거 얘기냐고? 노사협의회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LG전자는 근로자대표를 굳이 간선제로 뽑고 있다.

■ 노사협의회란?
직원 복지와 회사 발전을 위한 노사의 논의기구. 근로자와 사용자를 대표하는 위원(각 3명~10명)이 분기마다 만난다. 직원 수가 30명을 넘으면 반드시 설치해야 하고, 노조의 활동과는 별도의 기구다.

현행법은 노사협의회에 들어가는 근로자대표를 근로자들이 선거로 뽑도록 하고 있다. 당연히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를 원칙으로 한다. 말했듯이 직선제는 이미 공기와 같은 무엇이 됐으니까.

다만, 직원의 절반이 넘는 과반노조가 있을 때만 그 노조가 선출 대신 위촉할 수 있을 뿐이다.

LG전자에는 과반노조가 없다. 근로자대표를 선거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뽑는다. 독특한 구조다.

LG전자의 전체 직원은 4만여 명. 전 직원이 일종의 선거인단 격인 위원선거인을 뽑는다. 위원선거인들이 근로자대표를 뽑는 구조다.


직선제를 어겼으니 위법 아니냐고? 위법은 아니다. 법이 예외를 두고 있어서다. '사업 또는 사업장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부득이하다고 인정되는 경우'가 있을 때는 간선을 할 수는 있다.

LG전자가 직접 선거를 못하는 부득이한 사정은 뭘까. 1분도 채 안 걸리는 전자투표가 보편화된 마당에. 그것도 IT테크 업체가. 회사는 따로 밝힐 입장이 없다고 전해왔다.

2. 제가 '그 자리' 라고요?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선거인단격인 위원선거인의 구성 방식도 이해하기 어렵다.

직원이 선거인단을 뽑지 않는다. 그럼 누가? 회사가 임명한다. 그리고 사후에 직원 동의를 받는다. 회사와 협상할 직원 대표를 뽑는 절차에 회사가 개입하는 구조다.

임명 자체도 요식행위다. 누구를 위원선거인으로 임명했는지도 충분히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이 근로자대표를 뽑을 선거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

정리하면, 회사가 간접 투표에 나설 위원선거인을 대신 지명한다. 그렇게 지명된 이들이 근로자대표를 뽑는다. 투표 과정은 비밀에 부쳐진다.

선거 방식이 이러하니 최종 선출된 근로자대표도 유령에 가깝다. 존재는 하나 실체를 알 수 없다.

최근 LG전자 사무직 노조가 실태를 조사해보니, '제가 근로자대표라고요?' 라는 반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노사협의회 안건이 무언지 조차 알 리가 없는 건 두말 할 필요도 없고.

3. 고용노동부 "LG전자 위법"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지난해 8월 이 문제를 고용노동부에 진정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달 초 LG전자의 위법을 인정했다.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이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고용노동부는 위법이라는 판단은 했지만 처벌은 하지 못했다. 현행법이 근로자대표 선출 방식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 대한 벌칙 조항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사협의회 자체를 두지 않으면 처벌하지만, 대표 선출 방식까지는 처벌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입법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게 너무나 당연할 것으로 전제한 것으로 보인다.

LG전자는 노사협의회를 두고 있다. 분기마다 회의도 연다. 외형적으로는 법을 잘 준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회의에 들어갈 대표자들을 밀실에서 뽑는다. 안건도 충분히 공개하지 않는다. 회의 결과도 사실상 비공개한다.

LG전자 사무직 노조는 회사의 '모르쇠식' 운영을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문제적 대통령을 뽑았던 '체육관 선거'와 뭐가 다르냐고.

4. LG전자 "고용부 판단 존중…개선할 것"

대기업의 노사협의회 운영 문제를 고용노동부가 감독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 고용부 안에서도 의견 차가 컸다고 한다. 수사로 전환해 입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노동부는 일단 행정지도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LG전자는 "고용노동부의 행정지도를 존중해 운영방식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언제 어떻게 바꿀 것인지 물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LG의 경영 이념은 널리 알려졌듯이 '인화 경영'이다. 인화란 사람을 아끼고 서로 화합한다는 뜻이다. LG전자의 사내 선거는 인화 정신에 부합할까.

대문사진 : 서혜영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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