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고쳤으니까 봐주겠다”…공정위의 기준은 어디에

입력 2022.01.13 (06:08) 수정 2022.01.13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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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국내 사업자들도 문제가 된 것과 유사한 표시를 사용하고 있고, 신 차종 취급설명서에는 해당 표시를 삭제했다"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소회의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심의 대상인 업체 측이 한 말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공정위 측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당연하게도 심의 결과는 업체 측에 '경고' 조치만 내리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에 그쳤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위법성' 인정되지만…'과징금·시정명령' 아닌 '경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정위는 자동차 수리에 쓰이는 '비순정부품'의 품질을 거짓·과장해 부당하게 표시한 현대자동차(주)와 기아(주)에 경고 조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완성차 업체들은 제작 당시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OEM 생산품을 '순정부품', 이외의 부품을 '비순정부품'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현대차와 기아는 그동안 차량 취급설명서에 '순정부품을 사용해야만 안전하다', '비순정부품의 사용은 차량의 성능 저하와 고장을 유발할 수 있다' 등으로 표시해왔습니다.

순정부품만이 안전하고 비순정부품을 쓰면 고장이 날 수 있다는 건데 공정위는 이같은 표시가 '거짓'과 '과장'에 해당한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비순정부품 중에는 현대차와 기아에 부품을 공급하는 현대모비스에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 방식으로 납품되는 것과 동일한 부품도 있습니다. 같은 부품인데 '순정부품'과 '비순정부품'으로 나뉘는 겁니다.

또 자동차관리법에 근거해 정부(국토교통부)가 지정한 인증기관에서 성능과 품질을 인증 받은 '인증대체부품'이 있습니다. 가격은 더 저렴하지만 품질은 최소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서 정부가 인증대체부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는데, 현대차와 기아는 이들 제품도 품질이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위험한 것처럼 알려왔다는 겁니다.

기아 스포티지 차량 취급설명서기아 스포티지 차량 취급설명서

문제는 제재 수위입니다.
표시광고법 시행령은 과징금 부과 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공정위는 현대차와 기아의 표시 행위가 "공정한 거래질서를 저해했고, 소비자들을 오인하게 했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특히 자동차 부품은 소비자에게 생소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 정보의 비대칭이 큰 만큼 이같은 오인 효과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값비싼 순정부품을 팔아온 현대차와 기아에 부당이득이 발생한 것도 당연합니다.

결국 위 3가지 항목 모두를 충족했는데, 공정위는 뜻밖에도 '경고' 처분만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로 공정위가 언급한 것이 바로 처음에 나오는 2가지 내용입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아닌 다른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비슷한 표시를 사용하고 있고, 2018년 11월 이후에 출시된 차종의 설명서에는 해당 표시를 삭제했다는 겁니다.

■ '그때그때' 다른 기준…현대차는 지금도 문제 표현 사용

업체 스스로 시정했다는 것만으로 '경고' 처분이 내려지지는 않습니다. 당장 지난해 공정위는 의류 건조기의 콘덴서(열교환기)를 자동세척한다고 거짓·과장 광고한 LG전자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당시 LG전자가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무상수리를 거의 마무리했고, 자진시정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현대차의 경우 제대로 시정한 것도 아닙니다.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2020년식 팰리세이드 모델의 경우 취급설명서에서 여전히 '순정부품을 써야만 안전하다', '비순정부품의 사용은 차량의 성능 저하와 고장을 유발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다.

지금도 현대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차량 취급설명서에는 팰리세이드 외 다수의 차종에서 같은 표시가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공정위가 향후 시정명령(향후 행위 금지명령)을 하지 않은 탓에 현대차와 기아는 앞으로 얼마든지 이같은 표현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대차 팰리세이드(2020년식) 차량 취급설명서에 문제가 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018년 11월 이후 해당 표시가 삭제됐다는 공정위 설명과 배치되는 부분이다.현대차 팰리세이드(2020년식) 차량 취급설명서에 문제가 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018년 11월 이후 해당 표시가 삭제됐다는 공정위 설명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 '밀실심사'에 내부 견제는 어려워

특히, 취재 과정에서 의문이 더 드는 건 공정위의 이번 소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됐다는 점입니다. '영업비밀' 내용이 포함됐다는 업체측 주장을 공정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누구나 차량 취급설명서만 열어보면 확인할 수 있는 표시 사항에 대한 심의인데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업체 측 주장도, 이를 받아들인 공정위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논의에서 누가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를 외부에서는 끝내 알기 어렵습니다. '밀실 심사', '깜깜이 심사'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공정위는 조사 결과 법 위반에 해당할 경우 업체에 심사보고서를 발송하는데, 이는 검찰의 공소장에 해당합니다. 이후 소회의 또는 전원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데 이는 법원의 1심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검찰이나 피고인 등은 불복할 경우 항소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 제재에 대해 당사자인 기업도 행정소송 등에 나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공정위 내부에서는 이를 뒤집을 방안이 없다는 겁니다. 제재 수위 등을 놓고 이견이 생기더라도 이를 추후에 고치거나 견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취재 결과 이 사건 회의에서도 상당한 이견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경고' 처분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2016년 공정위 소회의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한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면죄부'라는 비판과 함께 외압 논란까지 불거졌고, 이듬해 TF의 조사 결과 당시 사건 처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공정위에 신고한 참여연대의 김남주 변호사는 "형사 사건의 항고나 재정신청 같은 불복신청 절차가 공정거래법에는 없다"라며 "공정위 처분이 약하거나 아예 제재를 하지 않는 경우에 신고인 측에서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없는 만큼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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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고쳤으니까 봐주겠다”…공정위의 기준은 어디에
    • 입력 2022-01-13 06:08:21
    • 수정2022-01-13 06:08:32
    취재후·사건후

"다른 국내 사업자들도 문제가 된 것과 유사한 표시를 사용하고 있고, 신 차종 취급설명서에는 해당 표시를 삭제했다"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소회의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심의 대상인 업체 측이 한 말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공정위 측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당연하게도 심의 결과는 업체 측에 '경고' 조치만 내리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에 그쳤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위법성' 인정되지만…'과징금·시정명령' 아닌 '경고'

내용은 이렇습니다. 공정위는 자동차 수리에 쓰이는 '비순정부품'의 품질을 거짓·과장해 부당하게 표시한 현대자동차(주)와 기아(주)에 경고 조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완성차 업체들은 제작 당시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OEM 생산품을 '순정부품', 이외의 부품을 '비순정부품'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현대차와 기아는 그동안 차량 취급설명서에 '순정부품을 사용해야만 안전하다', '비순정부품의 사용은 차량의 성능 저하와 고장을 유발할 수 있다' 등으로 표시해왔습니다.

순정부품만이 안전하고 비순정부품을 쓰면 고장이 날 수 있다는 건데 공정위는 이같은 표시가 '거짓'과 '과장'에 해당한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비순정부품 중에는 현대차와 기아에 부품을 공급하는 현대모비스에 OEM(주문자 상표부착 생산) 방식으로 납품되는 것과 동일한 부품도 있습니다. 같은 부품인데 '순정부품'과 '비순정부품'으로 나뉘는 겁니다.

또 자동차관리법에 근거해 정부(국토교통부)가 지정한 인증기관에서 성능과 품질을 인증 받은 '인증대체부품'이 있습니다. 가격은 더 저렴하지만 품질은 최소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서 정부가 인증대체부품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는데, 현대차와 기아는 이들 제품도 품질이 떨어지거나 심지어는 위험한 것처럼 알려왔다는 겁니다.

기아 스포티지 차량 취급설명서
문제는 제재 수위입니다.
표시광고법 시행령은 과징금 부과 기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공정위는 현대차와 기아의 표시 행위가 "공정한 거래질서를 저해했고, 소비자들을 오인하게 했다"고 스스로 밝혔습니다. 특히 자동차 부품은 소비자에게 생소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 정보의 비대칭이 큰 만큼 이같은 오인 효과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값비싼 순정부품을 팔아온 현대차와 기아에 부당이득이 발생한 것도 당연합니다.

결국 위 3가지 항목 모두를 충족했는데, 공정위는 뜻밖에도 '경고' 처분만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로 공정위가 언급한 것이 바로 처음에 나오는 2가지 내용입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아닌 다른 국내 완성차 업체들도 비슷한 표시를 사용하고 있고, 2018년 11월 이후에 출시된 차종의 설명서에는 해당 표시를 삭제했다는 겁니다.

■ '그때그때' 다른 기준…현대차는 지금도 문제 표현 사용

업체 스스로 시정했다는 것만으로 '경고' 처분이 내려지지는 않습니다. 당장 지난해 공정위는 의류 건조기의 콘덴서(열교환기)를 자동세척한다고 거짓·과장 광고한 LG전자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당시 LG전자가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무상수리를 거의 마무리했고, 자진시정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현대차의 경우 제대로 시정한 것도 아닙니다.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2020년식 팰리세이드 모델의 경우 취급설명서에서 여전히 '순정부품을 써야만 안전하다', '비순정부품의 사용은 차량의 성능 저하와 고장을 유발할 수 있다'고 나와있습니다.

지금도 현대차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차량 취급설명서에는 팰리세이드 외 다수의 차종에서 같은 표시가 발견됩니다.

그럼에도 공정위가 향후 시정명령(향후 행위 금지명령)을 하지 않은 탓에 현대차와 기아는 앞으로 얼마든지 이같은 표현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대차 팰리세이드(2020년식) 차량 취급설명서에 문제가 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018년 11월 이후 해당 표시가 삭제됐다는 공정위 설명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 '밀실심사'에 내부 견제는 어려워

특히, 취재 과정에서 의문이 더 드는 건 공정위의 이번 소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됐다는 점입니다. '영업비밀' 내용이 포함됐다는 업체측 주장을 공정위가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누구나 차량 취급설명서만 열어보면 확인할 수 있는 표시 사항에 대한 심의인데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는 업체 측 주장도, 이를 받아들인 공정위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되면 논의에서 누가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를 외부에서는 끝내 알기 어렵습니다. '밀실 심사', '깜깜이 심사'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공정위는 조사 결과 법 위반에 해당할 경우 업체에 심사보고서를 발송하는데, 이는 검찰의 공소장에 해당합니다. 이후 소회의 또는 전원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수위를 결정하는데 이는 법원의 1심과 같은 효력을 지닙니다.

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검찰이나 피고인 등은 불복할 경우 항소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 제재에 대해 당사자인 기업도 행정소송 등에 나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공정위 내부에서는 이를 뒤집을 방안이 없다는 겁니다. 제재 수위 등을 놓고 이견이 생기더라도 이를 추후에 고치거나 견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취재 결과 이 사건 회의에서도 상당한 이견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경고' 처분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2016년 공정위 소회의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관련한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에 대해 사실상 무혐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면죄부'라는 비판과 함께 외압 논란까지 불거졌고, 이듬해 TF의 조사 결과 당시 사건 처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공정위에 신고한 참여연대의 김남주 변호사는 "형사 사건의 항고나 재정신청 같은 불복신청 절차가 공정거래법에는 없다"라며 "공정위 처분이 약하거나 아예 제재를 하지 않는 경우에 신고인 측에서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이 없는 만큼 조속한 입법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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