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사도광산’은 정말 꼼수가 아닐까?…스스로 ‘함정’ 판 일본

입력 2022.01.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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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7일, 일본 니가타현지사와 사도시장, 지역 정치인 등이 무리를 지어 문부과학상을 찾아갔습니다. 사실상 '항의 방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서둘러 추천해달라는 '요망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니가타현지사는 2022년 신년기자회견에서도 일본 정부에 '세계유산 후보 결정'을 촉구했습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건 10년도 더 지난 2010년입니다. 그 후 수 차례 경쟁 후보에 밀려 탈락하다가 11년 만인 지난해 12월, 일본 내 단독후보로 '선정' 됐습니다.

하지만 일본 문화청은 이례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국내 추천후보의 '선정'은 추천의 '결정'이 아니다.

이를 토대로 향후 정부 내에서 종합적인 검토가 이뤄진다.

사도광산이 국내 후보로 최종 결정될지 '불투명'하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도 잇따랐습니다. 외교당국이 국제사회의 시선을 우려해 '종합적인 검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강제징용'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메이지 이후 갱도 도유코(道遊坑)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메이지 이후 갱도 도유코(道遊坑)

일본은 군함도에 이어 이번에도 '강제징용' 언급의 논란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전후 사도광산에는 최소 1,200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취재진은 사도광산 인근 마을에서 조선인 명부와 생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도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명부는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연초(담배) 배급 명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정연령자 연명부'입니다.

세 권의 연초 명부 표지에는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무질서하게 끼워진 종이들에는 조선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로 이동에 따른 담배 배급과 배급 중단을 신청하는 내용들입니다.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연초 배급 명부’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연초 배급 명부’

정부의 공식 문서는 아니지만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감을 찍었고, 미쓰비시사도광업소가 제작한 종이도 사용됐습니다. 담배를 배급받기 위해 개명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명부에도 조선인 수백 명의 이름과 본적이 등장합니다.


취재진은 옛 지도를 토대로 조선인 가족 사택과 세 곳의 기숙사(제1·3·4 상애료)가 있던 자리를 찾아가봤습니다.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마을에서 사도광산의 상징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가 보인다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마을에서 사도광산의 상징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가 보인다

제1상애료 자리에 들어선 아이카와구치지소는 문화재로 지정됐고, 제3상애료, 제4상애료 터엔 수풀만 무성했습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가족사택은 폐가로 방치되고 있고, 식당이 있던 자리에는 콘크리트 밑동만 남아 있습니다. 취재진과 동행해 준 향토사학자 하마노 히로시 씨는 조선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들려주었습니다.

"모두들 강에서 빨래를 하는데 조선인 부인들은 가장 아래 부분에서 그릇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일본인 부인들이 당신들 왜 그렇게 더러운 곳에서 씻느냐고. 이쪽으로 오라고 해서 함께 씻었다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광산 진료소에서 간호사의 보조를 했는데요. 조선인 노동자들이 진단서를 써달라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후유증이 있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의사한테 부탁하러 왔던 거죠. 의사가 "그런 건 써줄 수 없다" 고 하면 하염없이 울었다고도 합니다"

■'절반의 역사'만 평가해달라?

일본의 태도를 보면, 사실상 사도광산의 '강제징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도광산의 금맥이 발견된 건 1601년. 그 후 1989년까지, 사도광산 채굴의 역사는 4백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지난 4월 문화청에 제출한 사도광산 세계유산 후보 추천서 '현저한 보편적 가치의 언명' 부분에는 절반의 역사만 언급됩니다.

16세기 후반~19세기 중반, 극동 일본의 풍부한 금광산 섬으로서 국가의 관리·운영 하에 해외 기술교류가 제한된 환경에서 유럽과 다른 시스템으로 발전을 이뤘고, 세계에 내세울 만한 질과 양의 금을 생산한 전통적 수공업에 의한 대규모, 장기간의 금 생산 시스템을 보여주는 산업유산으로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

사도광산의 세계적인 가치가 '에도시대 전통적 수공업에 의한 금 생산 공정'에 있다고 정리한 겁니다.
4백 년 역사 중 앞의 '절반'만 보고 평가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에도시대'에 집중했던 건 아닙니다.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2019년까지만 해도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광산의 유산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취재진은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두 자치단체의 최초 제안서(2007)를 확인했습니다. 우선 '사도광산이 동아시아 광산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며 근대기 사도광산을 높이 평가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문화유산 자산목록에는 조선인 기숙사 터에 지어진 구치지소를 비롯해 근대기 사도광산의 시설물들이 대부분 등장합니다. 이대로였다면 조선인들이 사도광산에 오게 된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심지어 '조선인 유학생'들이 사도광산에서 기술을 배워갔다, 평안남도의 한 광산에 사도의 기술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조선의 광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도 주장합니다.


취재진은 니가타현 측에 시기를 '에도 시대'로 한정한 이유를 반복해 물었습니다. 담당자는 계속되는 정부의 지적 때문에 '사도광산만의 세계적인 가치'를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제징용 언급을 추가로 검토할 계획은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지적'은 강제징용 언급을 빼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다 유미코 / 니가타현 세계유산등록추진실장
"외교상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담당할 수밖에 없겠죠. 일개 자치단체 직원으로서 답하기는 곤란합니다"

■무모하고도 어설픈 '꼼수'

사실 '시대 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현재 관광지화 돼 있는 사도광산의 갱도는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소다유코(宗太夫坑)'라는 이름의 에도시대의 채굴 현장, 또 한 곳은 메이지시대 이후의 갱도 '도유코(道遊坑)'입니다.

소다유코에는 실제 손도구를 이용해 바위를 깨거나 금을 캐고, 휴식을 취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움직이는 인형으로 실감나게 재현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도시대'와 광산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광산주변에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대부분 근대의 산물입니다. 시각적으로 주변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근대의 핵심 시설이었습니다.

50미터 시크너(농축장치, 1940)50미터 시크너(농축장치, 1940)

다카토 저장사(1938)다카토 저장사(1938)

기타자와부유선광장(北沢浮遊選鉱場, 1935)기타자와부유선광장(北沢浮遊選鉱場, 1935)

다카토수갱(1952년 현재 모습으로 축소)다카토수갱(1952년 현재 모습으로 축소)

추운 날씨와 코로나 확산 우려에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도 부유선 광장과 시크너 등 대표 시설에서는 야간에 라이트업(light up) 행사까지 열고 있습니다.


사도광산의 상징인 V자형 봉우리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금맥을 찾아 손으로 직접 파내려간, 즉 '수공업에 의한 금 채굴'의 대표적인 현장으로서 도유노와리토를 내세웁니다. 대부분의 사도광산 홍보물에 대표 이미지로 등장하고, 세계유산 후보 추천서의 표지에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산 형태는 에도시대 때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움푹 패인 V자의 아래쪽 끝 부분의 커다란 굴(아래 사진)은 1,800년대 후반 시작된 광산 재개발과 다이너마이트 폭파에 의해 생겼고, 지금의 모습도 그에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공동 제작한 '사도금은산(佐渡金銀山) 시찰자료집'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이 쉽게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약 4백년 간 이어진 산업유산에 대해 '에도시대'의 가치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제징용 언급을 애써 피하기 위한 '어설픈 꼼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꼼수 거듭하다 스스로 판 '함정'

12월 28일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했다는 소식이 나오자 한국 정부는 곧바로 주한 공보문화원장을 초치해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50명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중단하라'는 결의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서 국제사회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와 관련해 '전체 역사를 기재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버텨왔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해 7월에도 '전시에 동원된 한반도 출신자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며 개선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채택했습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도 군함도와 비슷한 꼼수를 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쉽게 통할 분위기가 아닌 겁니다.

일본으로서는 섣불리 사도광산을 또 추천했다가는 유네스코 심사과정에서 군함도와 함께 '국제적인 망신'만 당할지도 모릅니다.

세계유산 등재 후보 추천서 마감 날짜는 2월 1일로 10여 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역사를 감추기 위해 꼼수를 거듭하다 자기 함정에 빠진 일본, 이번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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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사도광산’은 정말 꼼수가 아닐까?…스스로 ‘함정’ 판 일본
    • 입력 2022-01-13 07:00:08
    특파원 리포트

지난 1월 7일, 일본 니가타현지사와 사도시장, 지역 정치인 등이 무리를 지어 문부과학상을 찾아갔습니다. 사실상 '항의 방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서둘러 추천해달라는 '요망서'가 들려 있었습니다. 니가타현지사는 2022년 신년기자회견에서도 일본 정부에 '세계유산 후보 결정'을 촉구했습니다.

사도광산이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건 10년도 더 지난 2010년입니다. 그 후 수 차례 경쟁 후보에 밀려 탈락하다가 11년 만인 지난해 12월, 일본 내 단독후보로 '선정' 됐습니다.

하지만 일본 문화청은 이례적인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국내 추천후보의 '선정'은 추천의 '결정'이 아니다.

이를 토대로 향후 정부 내에서 종합적인 검토가 이뤄진다.

사도광산이 국내 후보로 최종 결정될지 '불투명'하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도 잇따랐습니다. 외교당국이 국제사회의 시선을 우려해 '종합적인 검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피해갈 수 없는 '강제징용'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메이지 이후 갱도 도유코(道遊坑)
일본은 군함도에 이어 이번에도 '강제징용' 언급의 논란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전후 사도광산에는 최소 1,200명의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취재진은 사도광산 인근 마을에서 조선인 명부와 생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사도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명부는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연초(담배) 배급 명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정연령자 연명부'입니다.

세 권의 연초 명부 표지에는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무질서하게 끼워진 종이들에는 조선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로 이동에 따른 담배 배급과 배급 중단을 신청하는 내용들입니다.

사도광산 조선인 기숙사 세 곳의 ‘연초 배급 명부’
정부의 공식 문서는 아니지만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감을 찍었고, 미쓰비시사도광업소가 제작한 종이도 사용됐습니다. 담배를 배급받기 위해 개명 사실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명부에도 조선인 수백 명의 이름과 본적이 등장합니다.


취재진은 옛 지도를 토대로 조선인 가족 사택과 세 곳의 기숙사(제1·3·4 상애료)가 있던 자리를 찾아가봤습니다.

조선인 기숙사가 있던 마을에서 사도광산의 상징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가 보인다
제1상애료 자리에 들어선 아이카와구치지소는 문화재로 지정됐고, 제3상애료, 제4상애료 터엔 수풀만 무성했습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가족사택은 폐가로 방치되고 있고, 식당이 있던 자리에는 콘크리트 밑동만 남아 있습니다. 취재진과 동행해 준 향토사학자 하마노 히로시 씨는 조선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들려주었습니다.

"모두들 강에서 빨래를 하는데 조선인 부인들은 가장 아래 부분에서 그릇을 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일본인 부인들이 당신들 왜 그렇게 더러운 곳에서 씻느냐고. 이쪽으로 오라고 해서 함께 씻었다고 합니다"

"제 어머니가 광산 진료소에서 간호사의 보조를 했는데요. 조선인 노동자들이 진단서를 써달라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후유증이 있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에 의사한테 부탁하러 왔던 거죠. 의사가 "그런 건 써줄 수 없다" 고 하면 하염없이 울었다고도 합니다"

■'절반의 역사'만 평가해달라?

일본의 태도를 보면, 사실상 사도광산의 '강제징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도광산의 금맥이 발견된 건 1601년. 그 후 1989년까지, 사도광산 채굴의 역사는 4백 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지난 4월 문화청에 제출한 사도광산 세계유산 후보 추천서 '현저한 보편적 가치의 언명' 부분에는 절반의 역사만 언급됩니다.

16세기 후반~19세기 중반, 극동 일본의 풍부한 금광산 섬으로서 국가의 관리·운영 하에 해외 기술교류가 제한된 환경에서 유럽과 다른 시스템으로 발전을 이뤘고, 세계에 내세울 만한 질과 양의 금을 생산한 전통적 수공업에 의한 대규모, 장기간의 금 생산 시스템을 보여주는 산업유산으로서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갖는다.

사도광산의 세계적인 가치가 '에도시대 전통적 수공업에 의한 금 생산 공정'에 있다고 정리한 겁니다.
4백 년 역사 중 앞의 '절반'만 보고 평가해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에도시대'에 집중했던 건 아닙니다. 니가타현과 사도시는 2019년까지만 해도 '금을 중심으로 한 사도광산의 유산군'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취재진은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두 자치단체의 최초 제안서(2007)를 확인했습니다. 우선 '사도광산이 동아시아 광산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며 근대기 사도광산을 높이 평가한 대목이 눈에 띕니다.

문화유산 자산목록에는 조선인 기숙사 터에 지어진 구치지소를 비롯해 근대기 사도광산의 시설물들이 대부분 등장합니다. 이대로였다면 조선인들이 사도광산에 오게 된 배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심지어 '조선인 유학생'들이 사도광산에서 기술을 배워갔다, 평안남도의 한 광산에 사도의 기술을 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조선의 광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도 주장합니다.


취재진은 니가타현 측에 시기를 '에도 시대'로 한정한 이유를 반복해 물었습니다. 담당자는 계속되는 정부의 지적 때문에 '사도광산만의 세계적인 가치'를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강제징용 언급을 추가로 검토할 계획은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일본 정부의 '지적'은 강제징용 언급을 빼기 위해서였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다 유미코 / 니가타현 세계유산등록추진실장
"외교상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가 담당할 수밖에 없겠죠. 일개 자치단체 직원으로서 답하기는 곤란합니다"

■무모하고도 어설픈 '꼼수'

사실 '시대 한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현재 관광지화 돼 있는 사도광산의 갱도는 두 곳입니다. 한 곳은 '소다유코(宗太夫坑)'라는 이름의 에도시대의 채굴 현장, 또 한 곳은 메이지시대 이후의 갱도 '도유코(道遊坑)'입니다.

소다유코에는 실제 손도구를 이용해 바위를 깨거나 금을 캐고, 휴식을 취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움직이는 인형으로 실감나게 재현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도시대'와 광산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건 그뿐입니다. 광산주변에서 마주하게 되는 풍경은 대부분 근대의 산물입니다. 시각적으로 주변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근대의 핵심 시설이었습니다.

50미터 시크너(농축장치, 1940)
다카토 저장사(1938)
기타자와부유선광장(北沢浮遊選鉱場, 1935)
다카토수갱(1952년 현재 모습으로 축소)
추운 날씨와 코로나 확산 우려에 관광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도 부유선 광장과 시크너 등 대표 시설에서는 야간에 라이트업(light up) 행사까지 열고 있습니다.


사도광산의 상징인 V자형 봉우리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금맥을 찾아 손으로 직접 파내려간, 즉 '수공업에 의한 금 채굴'의 대표적인 현장으로서 도유노와리토를 내세웁니다. 대부분의 사도광산 홍보물에 대표 이미지로 등장하고, 세계유산 후보 추천서의 표지에도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산 형태는 에도시대 때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움푹 패인 V자의 아래쪽 끝 부분의 커다란 굴(아래 사진)은 1,800년대 후반 시작된 광산 재개발과 다이너마이트 폭파에 의해 생겼고, 지금의 모습도 그에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니가타현과 사도시가 공동 제작한 '사도금은산(佐渡金銀山) 시찰자료집'에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처럼 모순이 쉽게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은 약 4백년 간 이어진 산업유산에 대해 '에도시대'의 가치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강제징용 언급을 애써 피하기 위한 '어설픈 꼼수'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꼼수 거듭하다 스스로 판 '함정'

12월 28일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했다는 소식이 나오자 한국 정부는 곧바로 주한 공보문화원장을 초치해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50명은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중단하라'는 결의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최종 결정이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서 국제사회의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와 관련해 '전체 역사를 기재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채 버텨왔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해 7월에도 '전시에 동원된 한반도 출신자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다'며 개선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채택했습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도 군함도와 비슷한 꼼수를 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쉽게 통할 분위기가 아닌 겁니다.

일본으로서는 섣불리 사도광산을 또 추천했다가는 유네스코 심사과정에서 군함도와 함께 '국제적인 망신'만 당할지도 모릅니다.

세계유산 등재 후보 추천서 마감 날짜는 2월 1일로 10여 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두운 역사를 감추기 위해 꼼수를 거듭하다 자기 함정에 빠진 일본, 이번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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