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처음의 언어, 선한 목소리의 공명 - 황정은 ‘백의 그림자’

입력 2022.02.06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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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언어, 선한 목소리의 공명
-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황정은의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는 2000년대 한국 소설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정은은 2008년에 나온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환상적 서사에 세상의 비애를 무심하게 새겨 넣는 스타일로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백의 그림자』는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처럼 굳어진 ‘황정은 스타일’을 서사와 상상력, 소설 언어와 현실 이해의 깊이 등 모든 면에서 경이롭게 펼쳐 보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백의 그림자』는 소설의 일인칭 화자 은교를 비롯해서 철거를 앞둔 40년 역사의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여러 인물들의 여리고 선한 마음을 옮겨 적는 언어의 발굴과 표현에서 유례없는 울림을 자아낸다.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그 언어들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지극히 ‘가난한’ 언어들이다. 그 ‘가난한 언어들’은 세상의 폭력과 불의, 탐욕의 시선이 눌어붙은 언어의 화려한 재화들을 거절한 자리에서 처음 이름을 부르고, 처음 사물과 세계를 명명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난다. 은교처럼 전자상가에서 보조 일을 하는 은교의 남자 친구 무재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긴 ‘가마들’을 ‘가마’로 통칭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말한다.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전자상가 일대를 슬럼이라고 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무재의 마음은 일어난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많이 회자되는 이 예는 기실 『백의 그림자』의 맑고 선한 언어들이 태어나는 자리를 알려주는 소설의 자기 언급일 수도 있다.

황정은은 『백의 그림자』에서 언어를 더하기보다는 언어를 덜어내고 조금씩 비운다. 여기서 덜어내고 비우는 것은 언어에 스며 있는 상투성이나 이데올로기, 상징적 폭력 등이다. 작가의 손길에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언어의 화용론을 억눌리고 배제된 자, 밀려나는 자들의 현실과 관점에서 새로이 작성해보려는 의지가 있다. 상황의 묘사나 서술에 쓰이는 소설의 언어들도 인물의 생각과 느낌을 담는 데서 넘치지 않게 도착해 있는데, 특히 표현된 말들 이상으로 마음의 여백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는 두 젊은이의 가난한 사랑에 어떤 화려한 사랑의 수사학도 이르지 못한 진심과 진실의 아름다운 빛을 둘러준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두 연인은 각각 숲과 섬에서 길을 잃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종내 그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게 될 빛은 그이들의 내부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가히 『백의 그림자』의 언어들은 기적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읽는 이의 마음에 공명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그 아름답고 선한 마음과 언어들은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폭력, 비정함과 등을 맞대고 있으며 세상의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이들을 더 바깥으로 밀어내는 어둡고 잔인한 힘은 ‘일어나고 솟구치는 그림자’의 형상으로 인물들을 계속 덮쳐온다. 처음 숲에서 길을 잃을 때 은교가 무심코 따라간 것이 자신의 검은 그림자이며, 빚에 시달리던 무재의 아버지를 찾아온 것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남편이 죽은 뒤 유곤의 어머니에게 달라붙은 것도 그림자였다. 무재가 어린 시절 목격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죽음도 그림자의 습격이었다. 은교가 일하는 음향기기 수리점 주인인 여씨 아저씨도, 여씨 아저씨의 친구도 그림자의 일어섬에 시달린다.

소설의 제목 ‘백(百)의 그림자’는 그렇게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겪는 공포/분노를 가리키는데, 놀랍게도 소설 속에서 그림자가 솟구치거나 일어서는 장면의 이야기에는 환상이나 환영(幻影)의 느낌이 거의 없다. 기실 황정은 초기 작품에서 가령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고, 아내가 오뚝이로 변하는 상황에서도 그 환상들은 이상한 리얼리티에 감싸이곤 했는데, 그 작품들에서는 환상 혹은 우화적 맥락의 과장이 소설의 처음부터 일정하게 부여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백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현실로 좀 더 단단하고 직접적으로 소설의 서사에 결합되어 있다. 숫자 ‘백’은 그 그림자가 현실에 미만해 있다는 이야기이겠지만,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그림자의 사연 하나하나에 대체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목소리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조용하게 내뱉어지는 무재의 발언이 헤아리기 힘든 분노의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림자’는 그이들을 덮쳐오는 슬픔과 고통, 공포의 무게이기도 하지만, 그 솟구침이나 일어섬의 모습이 말해주는 것처럼 표출되지 못한 분노의 형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의 그림자』는 전체적으로 분노의 방향보다는 은교와 무재가 쌓아가는 낮고 조용하고 희미하지만 더없이 아름답고 선한 사랑의 대화가 시종 보여주는 것처럼 선의의 마음이 일으키는 기적의 빛으로 세상의 ‘그림자’와 맞서는 이야기다. 가령 전구점 ‘오무사’의 할아버지는 전구에 불량품이 있거나 들고 가다 전구가 깨질 경우를 생각해, 덤으로 전구 하나를 더 넣어준다. 전자상가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부근 상점들과 함께 ‘오무사’도 할아버지도 사라진다. 『백의 그림자』가 들려주는 선의의 목록들은 현실적 힘이라는 관점에서는 미약하고 종종 무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발터 벤야민)이 있다. 그 순수성과 아름다움으로, 『백의 그림자』의 선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멈추고 떠난 자리에서 계속 무언가를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잊을 수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여기는 살 만한가요, 하고. 『백의 그림자』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사랑의 진경을 보여주고, 정의라는 말 없이도 예리한 사회 비판에 이르고, 윤리라는 말을 앞세우지 않고도 함께 살아간다는 일의 깊은 차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작고 적게 말하는데도 이 소설은 어쩐지 다 말하고 있다는 느낌에 이른다.

정홍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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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처음의 언어, 선한 목소리의 공명 - 황정은 ‘백의 그림자’
    • 입력 2022-02-06 21:32:29
    취재K
처음의 언어, 선한 목소리의 공명
-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황정은의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는 2000년대 한국 소설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만하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정은은 2008년에 나온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문학동네)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환상적 서사에 세상의 비애를 무심하게 새겨 넣는 스타일로 이미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백의 그림자』는 이제는 하나의 고유명처럼 굳어진 ‘황정은 스타일’을 서사와 상상력, 소설 언어와 현실 이해의 깊이 등 모든 면에서 경이롭게 펼쳐 보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백의 그림자』는 소설의 일인칭 화자 은교를 비롯해서 철거를 앞둔 40년 역사의 전자상가에서 일하는 여러 인물들의 여리고 선한 마음을 옮겨 적는 언어의 발굴과 표현에서 유례없는 울림을 자아낸다. 황정은이 『백의 그림자』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그 언어들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지극히 ‘가난한’ 언어들이다. 그 ‘가난한 언어들’은 세상의 폭력과 불의, 탐욕의 시선이 눌어붙은 언어의 화려한 재화들을 거절한 자리에서 처음 이름을 부르고, 처음 사물과 세계를 명명하려는 마음에서 태어난다. 은교처럼 전자상가에서 보조 일을 하는 은교의 남자 친구 무재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긴 ‘가마들’을 ‘가마’로 통칭하는 것은 이상하다며 말한다.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 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 전자상가 일대를 슬럼이라고 부르며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무재의 마음은 일어난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많이 회자되는 이 예는 기실 『백의 그림자』의 맑고 선한 언어들이 태어나는 자리를 알려주는 소설의 자기 언급일 수도 있다.

황정은은 『백의 그림자』에서 언어를 더하기보다는 언어를 덜어내고 조금씩 비운다. 여기서 덜어내고 비우는 것은 언어에 스며 있는 상투성이나 이데올로기, 상징적 폭력 등이다. 작가의 손길에는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언어의 화용론을 억눌리고 배제된 자, 밀려나는 자들의 현실과 관점에서 새로이 작성해보려는 의지가 있다. 상황의 묘사나 서술에 쓰이는 소설의 언어들도 인물의 생각과 느낌을 담는 데서 넘치지 않게 도착해 있는데, 특히 표현된 말들 이상으로 마음의 여백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는 두 젊은이의 가난한 사랑에 어떤 화려한 사랑의 수사학도 이르지 못한 진심과 진실의 아름다운 빛을 둘러준다.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두 연인은 각각 숲과 섬에서 길을 잃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종내 그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게 될 빛은 그이들의 내부에서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가히 『백의 그림자』의 언어들은 기적처럼 아름답고 선하고, 읽는 이의 마음에 공명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그 아름답고 선한 마음과 언어들은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폭력, 비정함과 등을 맞대고 있으며 세상의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이들을 더 바깥으로 밀어내는 어둡고 잔인한 힘은 ‘일어나고 솟구치는 그림자’의 형상으로 인물들을 계속 덮쳐온다. 처음 숲에서 길을 잃을 때 은교가 무심코 따라간 것이 자신의 검은 그림자이며, 빚에 시달리던 무재의 아버지를 찾아온 것도,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사고로 남편이 죽은 뒤 유곤의 어머니에게 달라붙은 것도 그림자였다. 무재가 어린 시절 목격한 폐지 줍는 할머니의 죽음도 그림자의 습격이었다. 은교가 일하는 음향기기 수리점 주인인 여씨 아저씨도, 여씨 아저씨의 친구도 그림자의 일어섬에 시달린다.

소설의 제목 ‘백(百)의 그림자’는 그렇게 세상의 모든 약자들이 겪는 공포/분노를 가리키는데, 놀랍게도 소설 속에서 그림자가 솟구치거나 일어서는 장면의 이야기에는 환상이나 환영(幻影)의 느낌이 거의 없다. 기실 황정은 초기 작품에서 가령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고, 아내가 오뚝이로 변하는 상황에서도 그 환상들은 이상한 리얼리티에 감싸이곤 했는데, 그 작품들에서는 환상 혹은 우화적 맥락의 과장이 소설의 처음부터 일정하게 부여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백의 그림자』에서 ‘그림자’는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현실로 좀 더 단단하고 직접적으로 소설의 서사에 결합되어 있다. 숫자 ‘백’은 그 그림자가 현실에 미만해 있다는 이야기이겠지만, 작가는 소설에 등장하는 그림자의 사연 하나하나에 대체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목소리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조용하게 내뱉어지는 무재의 발언이 헤아리기 힘든 분노의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림자’는 그이들을 덮쳐오는 슬픔과 고통, 공포의 무게이기도 하지만, 그 솟구침이나 일어섬의 모습이 말해주는 것처럼 표출되지 못한 분노의 형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백의 그림자』는 전체적으로 분노의 방향보다는 은교와 무재가 쌓아가는 낮고 조용하고 희미하지만 더없이 아름답고 선한 사랑의 대화가 시종 보여주는 것처럼 선의의 마음이 일으키는 기적의 빛으로 세상의 ‘그림자’와 맞서는 이야기다. 가령 전구점 ‘오무사’의 할아버지는 전구에 불량품이 있거나 들고 가다 전구가 깨질 경우를 생각해, 덤으로 전구 하나를 더 넣어준다. 전자상가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부근 상점들과 함께 ‘오무사’도 할아버지도 사라진다. 『백의 그림자』가 들려주는 선의의 목록들은 현실적 힘이라는 관점에서는 미약하고 종종 무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좌절한 자의 순수성과 아름다움’(발터 벤야민)이 있다. 그 순수성과 아름다움으로, 『백의 그림자』의 선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멈추고 떠난 자리에서 계속 무언가를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잊을 수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여기는 살 만한가요, 하고. 『백의 그림자』는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사랑의 진경을 보여주고, 정의라는 말 없이도 예리한 사회 비판에 이르고, 윤리라는 말을 앞세우지 않고도 함께 살아간다는 일의 깊은 차원을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작고 적게 말하는데도 이 소설은 어쩐지 다 말하고 있다는 느낌에 이른다.

정홍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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