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 영국은 뭐가 다른가요? ① 큰 기업? 큰 처벌

입력 2022.02.0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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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습니다. 법이 만들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터에서의 사망 사고를 줄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법 제도 하나만으로 모든 게 바뀌긴 어렵겠죠.

KBS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원조', 산업재해 사망 감축의 선진 사례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상황을 취재했습니다. 뭐가 우리나라 상황과 다를까요? 또 참고할 점은 없을까요? 연속 기사로 소개해드립니다.


■ "회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했다"

2015년 5월 27일, 트레이시 씨는 남편인 마크와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몇 시간 뒤 퇴근하면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마크 씨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작업장에서 유압 펌프 테스트를 하다가, 실린더가 터지면서 파편이 튀었습니다. 마크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벌어진 사고였습니다.

마크 씨가 생전에 딸 데이지와 찍은 사진. 마크 씨가 숨진 해에 데이지 갓 두 살이 됐습니다.마크 씨가 생전에 딸 데이지와 찍은 사진. 마크 씨가 숨진 해에 데이지 갓 두 살이 됐습니다.

남편이 숨진 지 7년, 트레이시 씨는 종종 산업재해 피해자 유가족 단체의 집회에 나가, 마크의 사례를 들려줍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게 이유입니다.

"누군가는 마크가 하던 게 작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업은 마크를 죽였습니다. 누군가는 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매일 하는 작업이지만 확실히 안전한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확인할 수 있겠죠."

회사 측은 심문에서 마크 씨가 하던 일이 '작고', '쉬운' 작업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기름이 새는지 확인하는 테스트였을 뿐"이라고요.


마크 씨가 작업하던 실린더가 터진 이유는 실린더 펌프의 압력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압력을 가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겠지만, 마크는 이 펌프를 이전에 사용해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었고,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고 트레이시 씨는 말했습니다.

실제로 조사 결과, 검찰은 마크 씨가 펌프를 사용하기 전에 적절한 안내를 받지 못했고, 펌프에 대한 매뉴얼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펌프를 사용하는 게 위험한지에 대한 위험성 평가도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업이 이뤄졌던 현장은 접근이 차단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안전 조치 미비로 작업물 파편에 맞은 노동자…"13억 원" vs "2천만 원"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마크가 일했던 회사에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으로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80만 파운드, 한화 13억 원가량입니다.

13억 원이라면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의 벌금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 비교해 봤습니다.

2019년 6월, 제주도의 한 파력발전소에서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케이블 절단 시험을 하다가 그라인드 파편이 노동자의 얼굴에 튀었습니다.

사진 제공 : 제주해양경찰서사진 제공 : 제주해양경찰서

법원은 역시 회사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라인더에 설치해야 할 안전 덮개 같은 방호 장치를 설치하지 않는 등 사고를 예방하려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과는 역시 벌금형. 그런데 액수는 회사와 안전보건총괄 책임자에게 각각 천만 원, 모두 2천만 원이었습니다.

회사의 안전 조치가 부족해서, 노동자 1명이, 작업물의 파편에 맞아 숨졌다는 기초 사실은 같은데 영국과 우리나라의 처벌은 차이가 컸습니다.


■ 큰 기업일수록 벌금도 크다…왜? "윗선의 관심을 끌어야 하니까"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요? 마크 씨 사고의 판결문 일부를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벌금을 결정하는 부분의 아래 대목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업체에 대한 영국 양형 기준을 보면, 책임과 위험(피해) 정도에 더해 해당 업체의 매출, 다시 말해 기업 규모를 살핍니다.

기업 규모는 모두 4개로 나뉩니다. 가령 매출액이 2백만 파운드 미만인 업체는 '초소규모' 업체로 벌금이 최소 50파운드, 최대 45만 파운드입니다. 한화로 하면 8만 원에서 7억 원입니다.

하지만 5천만 파운드가 넘는 큰 업체는 최대 천만 파운드, 162억 원까지 벌금으로 낼 수 있습니다. 마크 씨가 다녔던 회사는 중간 규모 업체였기 때문에 80만 파운드, 13억 원이라는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지난달 11일, KBS는 영국 보건안전청(HSE) 닉 릭비 감독관과 화상 인터뷰로 영국의 규제 방식에 대해 들었습니다.지난달 11일, KBS는 영국 보건안전청(HSE) 닉 릭비 감독관과 화상 인터뷰로 영국의 규제 방식에 대해 들었습니다.

"영국 형사법원에선 한 업체나 개인(사업주)에게 내릴 수 있는 벌금의 상한선은 없습니다. 하지만 양형 기준을 고려합니다."

KBS와 화상으로 만난 영국 보건안전청(HSE)의 닉 릭비 수석감독관이 말했습니다. 이 같은 금액들도 참고 사항일 뿐, 정도에 따라 큰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HSE는 영국 전역의 산업안전, 보건 감독과 예방에 관여하는 권위 있는 규제 기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용노동부나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본부와 비슷합니다.)

실제로 지난해 영국의 대규모 가스 공급망 회사인 '내셔널 그리드'는 4백만 파운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일부 건물들에 대한 자료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는데, 특이하게도 그 누구도 다치거나 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가스 폭발 등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이 업체는 영국 전역에 가스를 공급하는 큰 회사였던만큼, 벌금도 컸습니다.

닉 릭비 감독관은 큰 기업일수록 큰 처벌을 내리는 이유에 대해서 "기업을 이끄는 고위 책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큰 기업이 아주 적은 벌금을 낸다면, 그들은 벌금을 무시하게 될 거란 게 현실입니다. 또는 인지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서 노동자가 숨졌을 때 사업주는 벌금을 최대 1억 원, 법인은 10억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사례처럼 일부 현장 관리자에게 적은 벌금형만 내려진다는 비판에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 측 책임과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개인은 최대 10억 원, 법인은 50억 원까지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매출 등 기업의 규모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상시 근로자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은 2024년부터 법이 적용됩니다.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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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대재해, 영국은 뭐가 다른가요? ① 큰 기업? 큰 처벌
    • 입력 2022-02-08 09:15:21
    취재K

지난달 27일,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습니다. 법이 만들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일터에서의 사망 사고를 줄이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법 제도 하나만으로 모든 게 바뀌긴 어렵겠죠.

KBS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원조', 산업재해 사망 감축의 선진 사례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상황을 취재했습니다. 뭐가 우리나라 상황과 다를까요? 또 참고할 점은 없을까요? 연속 기사로 소개해드립니다.


■ "회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라고 했다"

2015년 5월 27일, 트레이시 씨는 남편인 마크와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몇 시간 뒤 퇴근하면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요.

하지만 마크 씨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작업장에서 유압 펌프 테스트를 하다가, 실린더가 터지면서 파편이 튀었습니다. 마크 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벌어진 사고였습니다.

마크 씨가 생전에 딸 데이지와 찍은 사진. 마크 씨가 숨진 해에 데이지 갓 두 살이 됐습니다.
남편이 숨진 지 7년, 트레이시 씨는 종종 산업재해 피해자 유가족 단체의 집회에 나가, 마크의 사례를 들려줍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게 이유입니다.

"누군가는 마크가 하던 게 작고 쉬운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업은 마크를 죽였습니다. 누군가는 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매일 하는 작업이지만 확실히 안전한 상태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확인할 수 있겠죠."

회사 측은 심문에서 마크 씨가 하던 일이 '작고', '쉬운' 작업이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기름이 새는지 확인하는 테스트였을 뿐"이라고요.


마크 씨가 작업하던 실린더가 터진 이유는 실린더 펌프의 압력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압력을 가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겠지만, 마크는 이 펌프를 이전에 사용해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었고,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고 트레이시 씨는 말했습니다.

실제로 조사 결과, 검찰은 마크 씨가 펌프를 사용하기 전에 적절한 안내를 받지 못했고, 펌프에 대한 매뉴얼도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펌프를 사용하는 게 위험한지에 대한 위험성 평가도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작업이 이뤄졌던 현장은 접근이 차단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안전 조치 미비로 작업물 파편에 맞은 노동자…"13억 원" vs "2천만 원"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마크가 일했던 회사에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등으로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80만 파운드, 한화 13억 원가량입니다.

13억 원이라면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의 벌금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의 비슷한 사례를 찾아 비교해 봤습니다.

2019년 6월, 제주도의 한 파력발전소에서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케이블 절단 시험을 하다가 그라인드 파편이 노동자의 얼굴에 튀었습니다.

사진 제공 : 제주해양경찰서
법원은 역시 회사의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라인더에 설치해야 할 안전 덮개 같은 방호 장치를 설치하지 않는 등 사고를 예방하려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과는 역시 벌금형. 그런데 액수는 회사와 안전보건총괄 책임자에게 각각 천만 원, 모두 2천만 원이었습니다.

회사의 안전 조치가 부족해서, 노동자 1명이, 작업물의 파편에 맞아 숨졌다는 기초 사실은 같은데 영국과 우리나라의 처벌은 차이가 컸습니다.


■ 큰 기업일수록 벌금도 크다…왜? "윗선의 관심을 끌어야 하니까"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걸까요? 마크 씨 사고의 판결문 일부를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벌금을 결정하는 부분의 아래 대목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업체에 대한 영국 양형 기준을 보면, 책임과 위험(피해) 정도에 더해 해당 업체의 매출, 다시 말해 기업 규모를 살핍니다.

기업 규모는 모두 4개로 나뉩니다. 가령 매출액이 2백만 파운드 미만인 업체는 '초소규모' 업체로 벌금이 최소 50파운드, 최대 45만 파운드입니다. 한화로 하면 8만 원에서 7억 원입니다.

하지만 5천만 파운드가 넘는 큰 업체는 최대 천만 파운드, 162억 원까지 벌금으로 낼 수 있습니다. 마크 씨가 다녔던 회사는 중간 규모 업체였기 때문에 80만 파운드, 13억 원이라는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지난달 11일, KBS는 영국 보건안전청(HSE) 닉 릭비 감독관과 화상 인터뷰로 영국의 규제 방식에 대해 들었습니다.
"영국 형사법원에선 한 업체나 개인(사업주)에게 내릴 수 있는 벌금의 상한선은 없습니다. 하지만 양형 기준을 고려합니다."

KBS와 화상으로 만난 영국 보건안전청(HSE)의 닉 릭비 수석감독관이 말했습니다. 이 같은 금액들도 참고 사항일 뿐, 정도에 따라 큰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HSE는 영국 전역의 산업안전, 보건 감독과 예방에 관여하는 권위 있는 규제 기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용노동부나 고용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본부와 비슷합니다.)

실제로 지난해 영국의 대규모 가스 공급망 회사인 '내셔널 그리드'는 4백만 파운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일부 건물들에 대한 자료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는데, 특이하게도 그 누구도 다치거나 숨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가스 폭발 등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이 업체는 영국 전역에 가스를 공급하는 큰 회사였던만큼, 벌금도 컸습니다.

닉 릭비 감독관은 큰 기업일수록 큰 처벌을 내리는 이유에 대해서 "기업을 이끄는 고위 책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큰 기업이 아주 적은 벌금을 낸다면, 그들은 벌금을 무시하게 될 거란 게 현실입니다. 또는 인지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서 노동자가 숨졌을 때 사업주는 벌금을 최대 1억 원, 법인은 10억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 사례처럼 일부 현장 관리자에게 적은 벌금형만 내려진다는 비판에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 측 책임과 처벌을 강화했습니다. 개인은 최대 10억 원, 법인은 50억 원까지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매출 등 기업의 규모는 고려 대상이 아니고, 상시 근로자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은 2024년부터 법이 적용됩니다.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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