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으고 빌리고 집사고 기도하라…글로벌 유동성 시대유감

입력 2022.02.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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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게티이미지출처 : 게티이미지

■ 전 재산에 빚까지 더해서 고작 집을 사라 하다니...

펀, 당신은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이 시대와 불화했어요.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했죠.

"경기가 좋아! (부동산이) 대박났어! 2008년(금융위기)에 돈이 좀 있었으면 사놨다가 지금 팔아서 왕창 벌었을텐데. 부동산은 결국엔 오르게 돼 있거든. "

사실 그건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삶의 방식일텐데, 당신은 아니었어요. 이리 말했죠.

"참 이상해. 이해가 안돼. 왜 사람들에게 평생 번 돈을 다 투자하고, 빚까지 내서 고작 집을 사라고 권하지?"

<노매드랜드> 펀 역 (프랜시스 맥도먼드), 2021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노매드랜드> 펀 역 (프랜시스 맥도먼드), 2021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당신은 용감하고 정직하죠. 정부가 도움 주는 조기 퇴직 거부하고, 노동해서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 하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죠.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요.

그러니 '평생 일해라, 돈을 모으라, 빚을 내라, 집을 사라, 집값이 오르면 행복하라…'하는 세상엔 관심이 없고요.

하지만 사실 당신에겐 이해 불가인 그 세상, 우리 대부분은 그 세상을 살아요.

그 세상을 좀 설명해도 될까요, 펀? 당신은 물론 택하지 않을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 역시 세상의 한 풍경이긴 할 테니, 그 풍경 엿보는 게 헛된 일만은 아닐거에요.


집값은 실제로 장기적으로 올라요

펀, 우리 시대엔 오르는 게 있고 안 오르는 게 있어요.


집값, 주가, 이런 건 올라요. 하지만 다른 물건들의 전반적인 가격(물가라고 해요)은 크게 오르지 않아요. 노동자의 임금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전반적 저물가 속에 특정 자산 가격만 올라요. 이런 기사 봤죠?

"5년 전엔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11.8년이 걸렸다. 지금은 21년이 걸린다."
**한국경제연구원의 2월 발표. 2021년 서울 중위 아파트 가격(9억 1,911만 원, 한국부동산원)과 연소득(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 4천384만 원) 기준.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엔 아마도 더 악화돼 있겠죠. 한국만의 얘기도 아니에요.

-영국의 주택가격은 1979년에 이후 30년 간 평균은 10배가 상승했다. 소비자 물가는 그 절반만 상승했다. [금융도둑]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1996년 이후 10년,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가 50 포인트 오르는 동안 (150->200), 주택가격 지수는 180포인트 (190->370) 상승했다. [달러 없는 세계] 이하경

왜 이러냐구요?


■ ① 단순히, 돈을 많이 찍어냈어요


세상에 돈이 많아졌어요. 단순히, 많이 찍어냈어요. 그래서 주택 매매 시장에 돈이 넘쳐요. 수요가 계속 늘어나니 집값이 오르는거죠.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1. 세계화 알죠? 세계는 더 가까워졌죠. 무역은 더 많아지고 생산 자체도 급증해요. 그러니 거래에 필요한 돈, 달러를 세계가 다 가지고 있고 싶게 됐어요. 그러자 미국은 가치와 무관하게 돈을 더더더 찍어내요. 물건을 받고 달러 찍어주고, 우방에 지원하기도 하고. 경기와 무관하게 달러는 늘기만 했어요.

2. 경제 위기도 돈을 늘려요. 돈 찍어야 해결이 되거든요. 미 연준의 그린스펀이란 사람은 그 상징이에요. 1987년 미 증시가 녹아내리던 10월의 검은 월요일에도, 98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 사태 때도, 2000년 IT 버블 때도...무슨 일이 생기면 각국의 중앙은행은 결국 돈을 풀어요. 2008년 금융위기나 2020년 코로나 위기는 최신 버전의 이야기일 뿐이죠.

3.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민간 금융 팽창이에요. 이걸 위해 규제 사각지대를 활용해 돈을 뻥튀기할 방법(칸막이 제거, 건전성 규제 회피, 증권화, 파생상품 개발, 그림자 금융 발달)을 수없이 개발했죠.

어렵고 복잡한 얘기지만 목적은 딱 하나, 한없이 단순해요. "일단 빌려줘라, 그리고 더 많이 빌려줘라"

증권화도, 파생상품도, 그림자금융도... 일단은 먼저 누군가 돈을 빌려 가야 성립하는 수익 창출법이에요. 처음엔 기업이, 기업 대출이 한계에 다다르자 개인이 대출 대상이 돼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이 돈에 혈안이 돼 개인 대출을 과도하게 내 준 결과에요.

실물을 도와야 할 금융이 실물 성장과 무관하게 자기 증식에 몰두해 실제 경제를 잠식하는 상황, 비판적인 사람들은 경제의 '금융화'라고 불러요. 이 금융화를 상징하는 블랙코미디 한 장면이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에 나와요.


직업이 클럽 스트리퍼인 대출자와의 대화는 이래요.

대출이 여러 개에요? [모두가 그래요, 현금은 5%만 있으면 돼요]
지금 집값 정체잖아요. 지금처럼 안 오르면 우대금리 끝나고 정해진 이자 다 내야 해요.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다고 했어요]
틀렸어요. [진짜요? 내 집 전부 다 그렇게 돼요?]
집이 여러 채예요? [집 다섯 채에 콘도가 있어요]
은행 대출담당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온갖 대출을 해줘요] 직업이 없으면요?
[그래도 대출을 해줘요] 자산이 없으면요?
[그래도 대출을 해줘요] 소득이 없어도요?
[간신히 연명 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대출을 해줘요]


■ ② 분배는 불평등해졌다

다른 이유는 불평등이에요.

기술이 하는 일, 아마존을 보면 돼요. 미국의 소매 판매 채널은 아마존이 거의 다 집어삼켰어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무기에요. 비효율적 인간 노동은 로봇으로 대체해요. 인간 몫은 영화 속 당신처럼 운전, 배달, 분류, 포장작업 뿐이에요. 저숙련 저임금 일자리죠.

그래서 이젠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줄어요. 첨단 기업일수록 일자리는 더 적죠. 예를 들어볼까요?


주방용품 파는 소매기업 유니레버는 54개 나라에서 14만 9천 명을 고용해요. 시가총액이 그 두 배인 인텔은 12만 명을 고용하는데, 시총이 여섯 배가 넘는 페이스북(메타)은 고작 7만 2천 명, 지구 최대의 기업 애플은 15만 4천 명이에요.

유니레버보다 가치는 28배 크고 지금도 이 차이는 계속 벌어지지만, 고용의 관점에선 똑같아요. 애플,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가 아무리 커져 봐야 일자리는 줄어들죠. (주식) 시장에서 돋보이기 위해, 기업은 점점 더 이윤에 치중합니다. 고용 비용은 줄이고, 사내에 돈을 쌓고, 자사주를 사야 좋은 기업인 시대니까요.

세계화는 그나마 남는 일자리도 해외로 돌리고, 노동자 교섭력은 더 약해집니다.

-1977년 미국의 소득 상위 1%는 전체 소득의 10% 남짓을 차지했는데 2014년에는 20%로 올랐다. 같은 기간 하위 50% 소득은 20%에서 12.5%로 내려갔다. (샤피로, 2017)

-영국 런던의 소득 상위 10%는 2020년 전체 소득의 31.7%를 가져갔고, 하위 10%는 1.8%를 가져갔다. 하위 50%도 23.9%밖에 가져가지 못했다.

이 현상을 딱 하나의 거시경제 지표로 보여드리면 미국 '노동소득 분배율'이에요. GDP에서 노동자에 분배된 비율인데, 아래 그래프가 닷컴 시대가 시작된 2000년 이후 급격히 꺾이는 게 보이죠?


'월급은 더 급격히 줄고, 기업 이윤은 더 늘어난다'고 보면 맞아요. 혁신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이걸 주도한 미국 경제 전체 파이는 커졌지만, 노동자는 그 혜택을 못 누렸다, 불평등했단 의미에요.


■ ①+② 돈은 많아지고, 불평등은 심해진다

통화량이 팽창하면 물가가 올라요. 그게 경제학이 말하는 돈과 물건 사이의 관계죠. 그런데 90년대 이후 이 관계가 깨져요.

혁신은 있는데, 노동의 몫은 줄어서죠. 경제 전반은 활력을 잃습니다. 결론은 불황. 인플레는 없고, 월급도 안 오르고, 저금리가 지속 됐죠.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에요.

금융은 진정한 성장에 보탬이 되기보다 금융의 수익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빚을 내줘 사람들이 집을 사게 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대출을 내줍니다. 이렇게 돈은 계속 새로 생겨납니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 덕에 주택 수요가 늘면 집값이 오릅니다. 집값 상승은 또 다른 대출 수요를 자극하죠. 금융은 번영하고 집값은 상승하는 순환입니다.

이게 당신이 이해 불가라고 말한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출처 : 게티이미지

그래서 사실 '자산을 사라', 또 빚은 최대한 내라, 는건 냉정한 의미에서 맞는 조언이에요. 넘치는 돈이 여튼 집과 주식을 계속 사서 더 오르고 있으니까요. 지금 안 사면 나중엔 더 비싸질테니까요.


'일만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펀, 당신은 이 결론이 끌리지 않죠? 어딘지 좀 도덕적이지 않죠. 저도 알아요. 전체 사회가 노동보다 일종의 투기, 도박을 권하고 있는 거라고 느껴져요.

많은 사람이 그걸 느껴요.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돼요. 특히 선진국에서 전통적 제조업 일자리를 가졌던 사람들의 불만이요.

하지만 아직 해법을 못 찾았어요. 만약 이게 경제 내재적 동학으로는 개선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는 아직 답을 못찾았아요.

답을 못 낸 댓가일까요? 정치는 오히려 이 자원 배분 상의 모순에 의해 침식당하고, 왜곡되고 있죠.


포퓰리즘이나 사회 분열적 정파주의, 타자 혐오, 불신이 범람합니다.

트럼프 시대의 탄생은 그 한 예일지도 몰라요. 메디케어 반대하고, 이민 반대하며 보수적 정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폭스뉴스가 '피케티'의 논문을 이용해 불평등을 '오바마의 잘못'으로 만드는 아래 같은 적반하장 공격은 상징적이죠.

"상위 1%의 수입은 2009년 이후 3년 동안 31% 증가했다, 나머지 99%는 0.4%가 늘었다. 늘어난 수입의 95%가 상위 1%에 집중됐다. 오바마가 말하는 불평등이란 문제는 오바마 자신의 문제다"

영국 브렉시트는 또 어떻고요? 영국 전역의 유권자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자신을 배제시키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죠. 그 결론이 자기 파괴적인 브렉시트란 건 비극적이지만요.

불신과 분열, 혐오가 민주주의를 침식한단 측면에선 유럽의 극우정당 역시 뿌리는 다르지 않아요. 대선을 앞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공정의 상실을 말하는 이유도, 사실은 같은 거에요.

돈이 넘쳐나지만, 그 분포는 불평등한 시대. 좋은 직장은 부족하고 경쟁은 극도로 치열한데, 설사 좋은 직장을 가져도 월급만으론 부족한 시대. 그 옆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자산 증식.

그러니 한국에서도 이런 불만을 숙주로 또 다른 포퓰리즘이 자라납니다.

© Harry Haysom© Harry Haysom

■ 포스트 코로나, 도박 같은 글로벌 유동성의 시대는 끝나는 걸까

1월 미국 물가는 7.5%나 올랐다죠. 일손이 부족해 노동자 임금이 계속 치솟고요. 이제 연준은 금리를 올린다죠. 저물가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그러면 도박 같은 글로벌 유동성의 시대는 끝나는 걸까요?

저는 회의적이에요.

그러려면 지금 돈이 찾은 생존 방식 (금융화, 자산 인플레이션)이 바뀌어야죠. 정부도, 민간도 더는 생산적이지 않은 통화량을 늘리지 않고, 금융은 자체의 이윤보다 사회의 성장을 위해 임무를 조정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요?

또,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 혁신이 더 적은 사람에게 혜택이 되는 시대, 제조업 일자리는 사라지고, 저숙련 배달 운전 단순포장 일자리만 느는 이 역사적 변화를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러고도 우리 경제 체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연준이 어느 정도 금리를 올리고, 긴축 발작이 일어나 자산시장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연준은 멈칫하는 시나리오가 현실적이에요. 지난 수십 년간 그래왔듯이요.

그럼 돈은 풀어야 하죠. 금융도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건 돈의 유전자니까요.

CNN, 2011년 Occupy Wall St. 당시CNN, 2011년 Occupy Wall St. 당시

펀, 당신은 이 세계를 선택하지 않았죠. 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있네요. 어쩔 수가 없네요. 넘쳐나는 돈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세상, 뒤쳐지지 않으려면 집이라도 사야죠.

너무 높은 곳은 쳐다보지 않을래요. (Don't Look Up) 제게 주어진 이 유동성의 시대, 물결에 몸을 맡기고 불안과 우려 속에 예민하게 사는 수 밖에요.

(인포그래픽:김현수, 권세라)

p.s. 펀, 이 글은 이 책과 글들에 기대어 있답니다.

[붕괴] 애덤 투즈
[부의 흑역사] 니컬러스 색슨
[금융도둑]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달러 없는 세계] 이하경
[인플레이션] 하노 벡
[인플레이션 이야기] 신환종
[플랫폼 제국의 미래] 스콧 갤러웨이
[달러의 부활] 폴 볼커

The politics of widen income inequality (Shapiro 2017)
London's poverty profil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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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으고 빌리고 집사고 기도하라…글로벌 유동성 시대유감
    • 입력 2022-02-13 08:01:09
    취재K
출처 : 게티이미지
■ 전 재산에 빚까지 더해서 고작 집을 사라 하다니...

펀, 당신은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이 시대와 불화했어요.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했죠.

"경기가 좋아! (부동산이) 대박났어! 2008년(금융위기)에 돈이 좀 있었으면 사놨다가 지금 팔아서 왕창 벌었을텐데. 부동산은 결국엔 오르게 돼 있거든. "

사실 그건 이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동의하는 삶의 방식일텐데, 당신은 아니었어요. 이리 말했죠.

"참 이상해. 이해가 안돼. 왜 사람들에게 평생 번 돈을 다 투자하고, 빚까지 내서 고작 집을 사라고 권하지?"

<노매드랜드> 펀 역 (프랜시스 맥도먼드), 2021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당신은 용감하고 정직하죠. 정부가 도움 주는 조기 퇴직 거부하고, 노동해서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 하죠.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고 싶죠. 헛된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고요.

그러니 '평생 일해라, 돈을 모으라, 빚을 내라, 집을 사라, 집값이 오르면 행복하라…'하는 세상엔 관심이 없고요.

하지만 사실 당신에겐 이해 불가인 그 세상, 우리 대부분은 그 세상을 살아요.

그 세상을 좀 설명해도 될까요, 펀? 당신은 물론 택하지 않을 세상이지만, 그래도 그 역시 세상의 한 풍경이긴 할 테니, 그 풍경 엿보는 게 헛된 일만은 아닐거에요.


집값은 실제로 장기적으로 올라요

펀, 우리 시대엔 오르는 게 있고 안 오르는 게 있어요.


집값, 주가, 이런 건 올라요. 하지만 다른 물건들의 전반적인 가격(물가라고 해요)은 크게 오르지 않아요. 노동자의 임금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전반적 저물가 속에 특정 자산 가격만 올라요. 이런 기사 봤죠?

"5년 전엔 서울 아파트를 사려면 11.8년이 걸렸다. 지금은 21년이 걸린다."
**한국경제연구원의 2월 발표. 2021년 서울 중위 아파트 가격(9억 1,911만 원, 한국부동산원)과 연소득(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 4천384만 원) 기준.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엔 아마도 더 악화돼 있겠죠. 한국만의 얘기도 아니에요.

-영국의 주택가격은 1979년에 이후 30년 간 평균은 10배가 상승했다. 소비자 물가는 그 절반만 상승했다. [금융도둑]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1996년 이후 10년,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가 50 포인트 오르는 동안 (150->200), 주택가격 지수는 180포인트 (190->370) 상승했다. [달러 없는 세계] 이하경

왜 이러냐구요?


■ ① 단순히, 돈을 많이 찍어냈어요


세상에 돈이 많아졌어요. 단순히, 많이 찍어냈어요. 그래서 주택 매매 시장에 돈이 넘쳐요. 수요가 계속 늘어나니 집값이 오르는거죠.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1. 세계화 알죠? 세계는 더 가까워졌죠. 무역은 더 많아지고 생산 자체도 급증해요. 그러니 거래에 필요한 돈, 달러를 세계가 다 가지고 있고 싶게 됐어요. 그러자 미국은 가치와 무관하게 돈을 더더더 찍어내요. 물건을 받고 달러 찍어주고, 우방에 지원하기도 하고. 경기와 무관하게 달러는 늘기만 했어요.

2. 경제 위기도 돈을 늘려요. 돈 찍어야 해결이 되거든요. 미 연준의 그린스펀이란 사람은 그 상징이에요. 1987년 미 증시가 녹아내리던 10월의 검은 월요일에도, 98년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 사태 때도, 2000년 IT 버블 때도...무슨 일이 생기면 각국의 중앙은행은 결국 돈을 풀어요. 2008년 금융위기나 2020년 코로나 위기는 최신 버전의 이야기일 뿐이죠.

3.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민간 금융 팽창이에요. 이걸 위해 규제 사각지대를 활용해 돈을 뻥튀기할 방법(칸막이 제거, 건전성 규제 회피, 증권화, 파생상품 개발, 그림자 금융 발달)을 수없이 개발했죠.

어렵고 복잡한 얘기지만 목적은 딱 하나, 한없이 단순해요. "일단 빌려줘라, 그리고 더 많이 빌려줘라"

증권화도, 파생상품도, 그림자금융도... 일단은 먼저 누군가 돈을 빌려 가야 성립하는 수익 창출법이에요. 처음엔 기업이, 기업 대출이 한계에 다다르자 개인이 대출 대상이 돼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이 돈에 혈안이 돼 개인 대출을 과도하게 내 준 결과에요.

실물을 도와야 할 금융이 실물 성장과 무관하게 자기 증식에 몰두해 실제 경제를 잠식하는 상황, 비판적인 사람들은 경제의 '금융화'라고 불러요. 이 금융화를 상징하는 블랙코미디 한 장면이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 <빅쇼트>에 나와요.


직업이 클럽 스트리퍼인 대출자와의 대화는 이래요.

대출이 여러 개에요? [모두가 그래요, 현금은 5%만 있으면 돼요]
지금 집값 정체잖아요. 지금처럼 안 오르면 우대금리 끝나고 정해진 이자 다 내야 해요.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다고 했어요]
틀렸어요. [진짜요? 내 집 전부 다 그렇게 돼요?]
집이 여러 채예요? [집 다섯 채에 콘도가 있어요]
은행 대출담당은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온갖 대출을 해줘요] 직업이 없으면요?
[그래도 대출을 해줘요] 자산이 없으면요?
[그래도 대출을 해줘요] 소득이 없어도요?
[간신히 연명 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대출을 해줘요]


■ ② 분배는 불평등해졌다

다른 이유는 불평등이에요.

기술이 하는 일, 아마존을 보면 돼요. 미국의 소매 판매 채널은 아마존이 거의 다 집어삼켰어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무기에요. 비효율적 인간 노동은 로봇으로 대체해요. 인간 몫은 영화 속 당신처럼 운전, 배달, 분류, 포장작업 뿐이에요. 저숙련 저임금 일자리죠.

그래서 이젠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줄어요. 첨단 기업일수록 일자리는 더 적죠. 예를 들어볼까요?


주방용품 파는 소매기업 유니레버는 54개 나라에서 14만 9천 명을 고용해요. 시가총액이 그 두 배인 인텔은 12만 명을 고용하는데, 시총이 여섯 배가 넘는 페이스북(메타)은 고작 7만 2천 명, 지구 최대의 기업 애플은 15만 4천 명이에요.

유니레버보다 가치는 28배 크고 지금도 이 차이는 계속 벌어지지만, 고용의 관점에선 똑같아요. 애플, 페이스북 같은 빅테크가 아무리 커져 봐야 일자리는 줄어들죠. (주식) 시장에서 돋보이기 위해, 기업은 점점 더 이윤에 치중합니다. 고용 비용은 줄이고, 사내에 돈을 쌓고, 자사주를 사야 좋은 기업인 시대니까요.

세계화는 그나마 남는 일자리도 해외로 돌리고, 노동자 교섭력은 더 약해집니다.

-1977년 미국의 소득 상위 1%는 전체 소득의 10% 남짓을 차지했는데 2014년에는 20%로 올랐다. 같은 기간 하위 50% 소득은 20%에서 12.5%로 내려갔다. (샤피로, 2017)

-영국 런던의 소득 상위 10%는 2020년 전체 소득의 31.7%를 가져갔고, 하위 10%는 1.8%를 가져갔다. 하위 50%도 23.9%밖에 가져가지 못했다.

이 현상을 딱 하나의 거시경제 지표로 보여드리면 미국 '노동소득 분배율'이에요. GDP에서 노동자에 분배된 비율인데, 아래 그래프가 닷컴 시대가 시작된 2000년 이후 급격히 꺾이는 게 보이죠?


'월급은 더 급격히 줄고, 기업 이윤은 더 늘어난다'고 보면 맞아요. 혁신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이걸 주도한 미국 경제 전체 파이는 커졌지만, 노동자는 그 혜택을 못 누렸다, 불평등했단 의미에요.


■ ①+② 돈은 많아지고, 불평등은 심해진다

통화량이 팽창하면 물가가 올라요. 그게 경제학이 말하는 돈과 물건 사이의 관계죠. 그런데 90년대 이후 이 관계가 깨져요.

혁신은 있는데, 노동의 몫은 줄어서죠. 경제 전반은 활력을 잃습니다. 결론은 불황. 인플레는 없고, 월급도 안 오르고, 저금리가 지속 됐죠.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에요.

금융은 진정한 성장에 보탬이 되기보다 금융의 수익 그 자체에 몰두합니다.

빚을 내줘 사람들이 집을 사게 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대출을 내줍니다. 이렇게 돈은 계속 새로 생겨납니다. 대출을 받는 사람들 덕에 주택 수요가 늘면 집값이 오릅니다. 집값 상승은 또 다른 대출 수요를 자극하죠. 금융은 번영하고 집값은 상승하는 순환입니다.

이게 당신이 이해 불가라고 말한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출처 : 게티이미지
그래서 사실 '자산을 사라', 또 빚은 최대한 내라, 는건 냉정한 의미에서 맞는 조언이에요. 넘치는 돈이 여튼 집과 주식을 계속 사서 더 오르고 있으니까요. 지금 안 사면 나중엔 더 비싸질테니까요.


'일만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펀, 당신은 이 결론이 끌리지 않죠? 어딘지 좀 도덕적이지 않죠. 저도 알아요. 전체 사회가 노동보다 일종의 투기, 도박을 권하고 있는 거라고 느껴져요.

많은 사람이 그걸 느껴요. 일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돼요. 특히 선진국에서 전통적 제조업 일자리를 가졌던 사람들의 불만이요.

하지만 아직 해법을 못 찾았어요. 만약 이게 경제 내재적 동학으로는 개선할 수 없는 문제라면, 정치의 역할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치는 아직 답을 못찾았아요.

답을 못 낸 댓가일까요? 정치는 오히려 이 자원 배분 상의 모순에 의해 침식당하고, 왜곡되고 있죠.


포퓰리즘이나 사회 분열적 정파주의, 타자 혐오, 불신이 범람합니다.

트럼프 시대의 탄생은 그 한 예일지도 몰라요. 메디케어 반대하고, 이민 반대하며 보수적 정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폭스뉴스가 '피케티'의 논문을 이용해 불평등을 '오바마의 잘못'으로 만드는 아래 같은 적반하장 공격은 상징적이죠.

"상위 1%의 수입은 2009년 이후 3년 동안 31% 증가했다, 나머지 99%는 0.4%가 늘었다. 늘어난 수입의 95%가 상위 1%에 집중됐다. 오바마가 말하는 불평등이란 문제는 오바마 자신의 문제다"

영국 브렉시트는 또 어떻고요? 영국 전역의 유권자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자신을 배제시키는 상황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죠. 그 결론이 자기 파괴적인 브렉시트란 건 비극적이지만요.

불신과 분열, 혐오가 민주주의를 침식한단 측면에선 유럽의 극우정당 역시 뿌리는 다르지 않아요. 대선을 앞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공정의 상실을 말하는 이유도, 사실은 같은 거에요.

돈이 넘쳐나지만, 그 분포는 불평등한 시대. 좋은 직장은 부족하고 경쟁은 극도로 치열한데, 설사 좋은 직장을 가져도 월급만으론 부족한 시대. 그 옆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자산 증식.

그러니 한국에서도 이런 불만을 숙주로 또 다른 포퓰리즘이 자라납니다.

© Harry Haysom
■ 포스트 코로나, 도박 같은 글로벌 유동성의 시대는 끝나는 걸까

1월 미국 물가는 7.5%나 올랐다죠. 일손이 부족해 노동자 임금이 계속 치솟고요. 이제 연준은 금리를 올린다죠. 저물가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그러면 도박 같은 글로벌 유동성의 시대는 끝나는 걸까요?

저는 회의적이에요.

그러려면 지금 돈이 찾은 생존 방식 (금융화, 자산 인플레이션)이 바뀌어야죠. 정부도, 민간도 더는 생산적이지 않은 통화량을 늘리지 않고, 금융은 자체의 이윤보다 사회의 성장을 위해 임무를 조정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요?

또, 불평등이 해소될 수 있을까요? 혁신이 더 적은 사람에게 혜택이 되는 시대, 제조업 일자리는 사라지고, 저숙련 배달 운전 단순포장 일자리만 느는 이 역사적 변화를 되돌릴 수 있을까요?

그러고도 우리 경제 체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연준이 어느 정도 금리를 올리고, 긴축 발작이 일어나 자산시장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연준은 멈칫하는 시나리오가 현실적이에요. 지난 수십 년간 그래왔듯이요.

그럼 돈은 풀어야 하죠. 금융도 탐욕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건 돈의 유전자니까요.

CNN, 2011년 Occupy Wall St. 당시
펀, 당신은 이 세계를 선택하지 않았죠. 하지만 평범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있네요. 어쩔 수가 없네요. 넘쳐나는 돈이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세상, 뒤쳐지지 않으려면 집이라도 사야죠.

너무 높은 곳은 쳐다보지 않을래요. (Don't Look Up) 제게 주어진 이 유동성의 시대, 물결에 몸을 맡기고 불안과 우려 속에 예민하게 사는 수 밖에요.

(인포그래픽:김현수, 권세라)

p.s. 펀, 이 글은 이 책과 글들에 기대어 있답니다.

[붕괴] 애덤 투즈
[부의 흑역사] 니컬러스 색슨
[금융도둑]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달러 없는 세계] 이하경
[인플레이션] 하노 벡
[인플레이션 이야기] 신환종
[플랫폼 제국의 미래] 스콧 갤러웨이
[달러의 부활] 폴 볼커

The politics of widen income inequality (Shapiro 2017)
London's poverty profil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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