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오미크론이 드러낸 미일지위협정 ‘불평등’ 논란

입력 2022.02.17 (11:1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본 오미크론 확산의 불길이 '미일 지위협정'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코로나 6차 유행을 초래한 주일미군기지에 대한 방역 체계는 무방비였고, 그 배경에는 주일미군의 권한과 기지 사용을 규정한 '미일지위협정'이 있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인의 신규 입국을 막는 강력한 '쇄국' 정책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일미군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일본을 드나들었고, 방역 비상조치가 시행 중인 기간에도 기지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오키나와현에서는 지난해 12월 미군기지 캠프 한센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데 이어 지역감염이 급속도로 확산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출국한 미군 부대는 가데나기지를 통해 오키나와로 들어왔습니다.

오미크론 집단감염이 발생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캠프 한센오미크론 집단감염이 발생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캠프 한센

미일 지위협정 제9조는 미군 관계자는 '외국인의 등록'과 '관리'에 대해서 일본의 법령 적용에서 제외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관리'에는 검역도 해당합니다. 즉, 주일미군은 일본 입관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일미 지위협정 제9조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은 여권 및 사증에 관한 일본국 법령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 및 군속과 그 가족은 외국인의 등록 및 관리에 관한 일본국 법령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미일 정부는 2020년 7월, 일본의 코로나 대책과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주일미군에 대해서도 '포괄적이고 엄격한 건강보호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측은 1년쯤 지난 뒤인 지난해 9월부터 이를 무시했습니다.

출입국 검사가 일본의 검역법에 의무화돼 있지만 미국 측은 자국 내 백신 접종률이 늘며 주일미군의 검사를 생략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석 달이 지난 12월이 돼서야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6차 감염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명도 엇갈렸습니다. NHK 보도에 따르면, 주일미군사령부는 일본 외무성의 발표와 달리 출국 전 검사를 면제하겠다고 일본 측에 9월에 통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이 출국하며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으면서도 묵인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입니다. 지위협정에 따라 설치된 미일합동위원회가 그 사이 네 차례나 열렸다는 사실까지도 최근 국회에서 확인됐습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도 주일미군이 내린 조치는 20여 일 간의 '외출 제한'이 전부였습니다. 일본정부와 미군을 향한 거센 비판이 이어졌지만 추후 조치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미군 기지 내 집단감염 발생으로 인해 미국 측과 ‘외출 제한’에 합의했다고 설명하는 기시다 총리미군 기지 내 집단감염 발생으로 인해 미국 측과 ‘외출 제한’에 합의했다고 설명하는 기시다 총리

더욱이 일본 측이 요구해 온 검사 방식인 '항원정량검사'를 하지 않았고, 정확도가 부족한 '항원정성검사'를 실시해왔다는 사실까지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방역체계의 '구멍'과 주일미군의 '특권' 사이에서 오키나와현은 손쓸 방법도 없이 지역의 코로나 확산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10곳의 확진자는 지난 2월 9일 기준 7,200여 명까지 늘었고, 기지 내 노동자도 백여 명이 확진됐습니다.

일본 정부에 미군 기지 내 철저한 방역대책을 촉구한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일본 정부에 미군 기지 내 철저한 방역대책을 촉구한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

급격한 확산에도 미군부대는 오키나와현에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는 "신속한 대응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지역의 행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며 탄식했고, "일반 국민처럼 일본의 법에 따르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며 미일지위협정 검토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아카미네 세이켄 일본공산당 의원도 지난 7일 중의원 예산심의위원회에서 미군기지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이 "인명을 위태롭게 하는 사태로 이어졌다"며 "같은 일이 반복될 위험이 있다"고 미일지위협정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주일미군기지의 70%가 존재하며, 미군 기지 이전을 둘러싼 문제가 끊이지 않는 오키나와에서 미군 부대의 제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면서 뿌리깊은 갈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미군기지가 있는 야마구치현과 가나가와현에서도 불만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온라인)의 ‘일미지위협정’ 특집마이니치신문(온라인)의 ‘일미지위협정’ 특집

일본 언론들도 미일지위협정 개정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온라인 특집 페이지를 열어 미일지위협정이 '주일미군에 대한 특별대우를 규정해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원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언론에서도 협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와 논평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과 상황이 다릅니다.

국내법을 원칙적으로 적용해 미군기지 출입과 기지 밖 미군 훈련을 승인하는 권한을 갖습니다.

일본의 미국 종속 체제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비판 받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일본의 미국 종속 체제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비판 받는 아베 신조 전 총리

냉전체제가 끝난 뒤 미국과 협정 내용을 재검토해 국내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한 결과입니다. 반면 일본의 미일지위협정은 1960년에 체결된 이후,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습니다.

협정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주권이 짓밟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비판에도 기시다 총리는 '현실적인 대책'을 찾겠다며 협정 개정 논의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 코로나 6차 유행이 전후 77년을 맞은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앞으로도 미일지위협정 개정 논의를 촉구하는 주요 재료로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오미크론이 드러낸 미일지위협정 ‘불평등’ 논란
    • 입력 2022-02-17 11:11:17
    특파원 리포트

일본 오미크론 확산의 불길이 '미일 지위협정'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코로나 6차 유행을 초래한 주일미군기지에 대한 방역 체계는 무방비였고, 그 배경에는 주일미군의 권한과 기지 사용을 규정한 '미일지위협정'이 있습니다.

일본은 그동안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외국인의 신규 입국을 막는 강력한 '쇄국' 정책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일미군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일본을 드나들었고, 방역 비상조치가 시행 중인 기간에도 기지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했습니다.

오키나와현에서는 지난해 12월 미군기지 캠프 한센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한 데 이어 지역감염이 급속도로 확산했습니다. 미국 본토에서 출국한 미군 부대는 가데나기지를 통해 오키나와로 들어왔습니다.

오미크론 집단감염이 발생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캠프 한센
미일 지위협정 제9조는 미군 관계자는 '외국인의 등록'과 '관리'에 대해서 일본의 법령 적용에서 제외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관리'에는 검역도 해당합니다. 즉, 주일미군은 일본 입관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일미 지위협정 제9조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은 여권 및 사증에 관한 일본국 법령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합중국 군대의 구성원 및 군속과 그 가족은 외국인의 등록 및 관리에 관한 일본국 법령의 적용에서 제외된다. '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닙니다. 미일 정부는 2020년 7월, 일본의 코로나 대책과 정합성을 높이기 위해 주일미군에 대해서도 '포괄적이고 엄격한 건강보호정책'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측은 1년쯤 지난 뒤인 지난해 9월부터 이를 무시했습니다.

출입국 검사가 일본의 검역법에 의무화돼 있지만 미국 측은 자국 내 백신 접종률이 늘며 주일미군의 검사를 생략했습니다. 일본 외무성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석 달이 지난 12월이 돼서야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6차 감염이 시작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명도 엇갈렸습니다. NHK 보도에 따르면, 주일미군사령부는 일본 외무성의 발표와 달리 출국 전 검사를 면제하겠다고 일본 측에 9월에 통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이 출국하며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으면서도 묵인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입니다. 지위협정에 따라 설치된 미일합동위원회가 그 사이 네 차례나 열렸다는 사실까지도 최근 국회에서 확인됐습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도 주일미군이 내린 조치는 20여 일 간의 '외출 제한'이 전부였습니다. 일본정부와 미군을 향한 거센 비판이 이어졌지만 추후 조치도 소극적이었습니다.

미군 기지 내 집단감염 발생으로 인해 미국 측과 ‘외출 제한’에 합의했다고 설명하는 기시다 총리
더욱이 일본 측이 요구해 온 검사 방식인 '항원정량검사'를 하지 않았고, 정확도가 부족한 '항원정성검사'를 실시해왔다는 사실까지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방역체계의 '구멍'과 주일미군의 '특권' 사이에서 오키나와현은 손쓸 방법도 없이 지역의 코로나 확산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10곳의 확진자는 지난 2월 9일 기준 7,200여 명까지 늘었고, 기지 내 노동자도 백여 명이 확진됐습니다.

일본 정부에 미군 기지 내 철저한 방역대책을 촉구한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
급격한 확산에도 미군부대는 오키나와현에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는 "신속한 대응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지역의 행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며 탄식했고, "일반 국민처럼 일본의 법에 따르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며 미일지위협정 검토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아카미네 세이켄 일본공산당 의원도 지난 7일 중의원 예산심의위원회에서 미군기지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이 "인명을 위태롭게 하는 사태로 이어졌다"며 "같은 일이 반복될 위험이 있다"고 미일지위협정의 폐해를 지적했습니다.

주일미군기지의 70%가 존재하며, 미군 기지 이전을 둘러싼 문제가 끊이지 않는 오키나와에서 미군 부대의 제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면서 뿌리깊은 갈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미군기지가 있는 야마구치현과 가나가와현에서도 불만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온라인)의 ‘일미지위협정’ 특집
일본 언론들도 미일지위협정 개정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온라인 특집 페이지를 열어 미일지위협정이 '주일미군에 대한 특별대우를 규정해 여러 문제를 야기하는 원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언론에서도 협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기사와 논평이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일본과 상황이 다릅니다.

국내법을 원칙적으로 적용해 미군기지 출입과 기지 밖 미군 훈련을 승인하는 권한을 갖습니다.

일본의 미국 종속 체제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비판 받는 아베 신조 전 총리
냉전체제가 끝난 뒤 미국과 협정 내용을 재검토해 국내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한 결과입니다. 반면 일본의 미일지위협정은 1960년에 체결된 이후,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습니다.

협정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주권이 짓밟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비판에도 기시다 총리는 '현실적인 대책'을 찾겠다며 협정 개정 논의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내 코로나 6차 유행이 전후 77년을 맞은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앞으로도 미일지위협정 개정 논의를 촉구하는 주요 재료로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