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그녀들이 던진 물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입력 2022.02.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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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21세기 한국 현대문학사의 구조변동에 관해 말하게 된다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대목을 차지할 것이다. 2016년 10월 14일 초판을 찍은 이 소설은 나오자마자 입소문을 타면서 삽시간에 독서대중 사이로 파고들었고, 출간 2년여가 지날 무렵에는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문학시장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또한, 2019년에 영상화된 동명의 영화는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판매고를 더욱 올려놓았다. 하지만 단지 많이 팔렸다는 점 때문이라면 이 작품을 굳이 문학사적 구조변동에 있어 불가결한 요소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가장 큰 의미는 이 작품이 한국문학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안온하고 조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답하고 반응하도록 강제된 사회적 실존을 둘러싼 질문이다.

평소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최근 수년간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지상, 온라인 기사 속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언급을 들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 듯싶다. 그것은 작품의 감동이나 매력에 대한 찬사, 오랫동안 곱씹어볼 여운과 같은 것이라기보다, 가족이나 이웃, 직장동료나 친구, 혹은 어느 누군가와라도 당장 토론을 벌이고 논쟁이 붙을 만한 불온한 소문과 불편한 이야기에 가깝다. 어떤 이는 아낌없이 환호를 보내고 타인들에게 열정적으로 권유하지만, 다른 이들은 격렬하게 기피하고 거부하면서 개인적 금서목록에 올려두는 소설. 걔중에는 책의 첫 페이지도 열어보지 않았음에도 문학과 사회의 엄중한 판관이 되어 우리의 현실을 논하는 근거 자료로 이 작품과 작가를 거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 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를 진동시킨 문화계 성폭력 고발 및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82년생 김지영은 지금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지표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은 간단하다. 1982년에 태어나 2015년 서른네 살이 된 김지영은 어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여성 중 하나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무난히 대학을 졸업했고, 입사와 결혼을 거쳐 현재 딸 하나를 키우는 가정주부로 산다. 남편은 중견 기업에 다니며 별 탈 없이 가정과 회사에 충실하고, 경제사정은 서울 변두리의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거주할 만큼 무난하다. 밝고 웃음 많은 원만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딸아이와 남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정신적 퇴행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 살배기 딸처럼 어린 아이가 되었다가 사망한 대학선배의 분신이 되어 행동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자기 엄마가 되어 시부모에게 정색한 채 부당함을 항의한다. 이야기는 김지영의 발병, 아니‘변신’의 시점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명하면서 진행된다.

1982년부터 2015년에 이르는 김지영의 생애는 단지 특정 개인에게만 국한된 삶의 모습이 아니다.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결혼 등 그녀가 대변하는 한국인의 일상사는 기실 그녀의 어머니도 살아왔던 이전 세대의 삶의 반복임이 드러난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이전으로도 얼마든지 소급 가능한 한국인의 일상사적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 여기서 전제는 그것이 임의의 누구나가 아니라 바로 여성이라는 특정한 성별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다는 데 있다. 김지영이 놓인 자리는 한국인의 보편성과 여성의 개별성이 교차하는 대단히 특수한, 문제적인 위치라는 것이 핵심이다.

아들에 대한 선호와 딸에 대한 차별, 남성의 일에 대한 존중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성 가사에 대한 폄하... 놀이와 공부, 직업과 일상의 모든 분야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성별의 구분과 차별은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실감 속에 전시해 준다. 여자니까 참아야 하고, 여자이기에 견뎌야 하며, 여자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습과 전통, 생활의 규율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내밀한 분위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김지영은 성별을 두고 한편으로 기울어진 이 경사면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몸에 익혔고,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생리를 시작하는 여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몰래 감춰야 하며, 제때 결혼을 못한 채 나이를 먹으면 값어치가 깎여나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를 마치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통과하며 현대성을 구가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다름 아니다. 김지영의 발병은 이런 상황을 버텨내지 못한 여성 개인의 파탄이기보다, 이런 현실에 대해 항의하고 과감히 절연하고자 하는 여성 전체의 변신으로 불릴 만하다.

82년생 김지영이 촉발시킨 가장 큰 논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겪는 삶이 과연 우리 시대의 여성 전체에 대한 일반성을 갖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바꿔 말해, 소위 ‘유리천장’이라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반박이 그렇다. 한국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 성별을 매개로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는 그만큼 성숙한 민주사회를 일구어 왔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개인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내면화하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 감수성은 무심코 차별을 감수하고, 또 불가피한 것으로 각인하고 있음을 이 작품은 폭로한다. 김지영이 느끼는 원인 모를 불안이나 두려움은 실상 우리 사회 전체가 이유를 모른 채 여전히 붙잡혀 있는 가부장적 질서와 폭력의 무의식적 반영인 셈이다. 비가시화되어 있는 성적 불평등, 혹은 성적 불평등의 비가시성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다.

사진 촬영: 최승도사진 촬영: 최승도

소설적 서사보다 신문기사나 통계자료, 학술논문 등을 바탕으로 집필된 82년생 김지영은 흡사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읽힌다. 혹자는 이런 특징을 이 작품이 지닌 비문학적인 결점이라 지적하고, 소설 본연의 창조적 상상력이나 핍진성의 결여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무엇이 문학성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논외로 치더라도, 문학 자체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이런 비판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구한 문학의 전통, 특히 소설의 역사는 항상 소설 바깥으로부터,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등의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가령 문학이 사회를 모방한다거나 반영한다는 오래된 이론은 삶 없는 문학의 독자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전망 역시 비문학적인 것, 즉 현실에 문학이 침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다시 현실이 문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전제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로부터 태어났다. 그것은 소설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실존을 직시함으로써 조형된 현실적 허구임을 반증한다. 엄존하는 여성의 실존이 있기에 그것의 문학도 가능했던 것이다.

문학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독자에게 동의나 공감을 요청하지만, 때로는 머릿속에서 떼어낼 수 없는 물음의 형식으로 잔존하여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게 만든다. 김지영이 던진 많은 의혹들, 그녀의 발병/변신이 불러낸 더 많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과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름 없는 그녀들, 그들 모두가 김지영이기 때문이다.

최진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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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그녀들이 던진 물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 입력 2022-02-20 21:30:52
    취재K
만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21세기 한국 현대문학사의 구조변동에 관해 말하게 된다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한 대목을 차지할 것이다. 2016년 10월 14일 초판을 찍은 이 소설은 나오자마자 입소문을 타면서 삽시간에 독서대중 사이로 파고들었고, 출간 2년여가 지날 무렵에는 판매부수 100만부를 돌파하면서 실로 오랜만에 문학시장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또한, 2019년에 영상화된 동명의 영화는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판매고를 더욱 올려놓았다. 하지만 단지 많이 팔렸다는 점 때문이라면 이 작품을 굳이 문학사적 구조변동에 있어 불가결한 요소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가장 큰 의미는 이 작품이 한국문학과 더불어 한국사회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안온하고 조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답하고 반응하도록 강제된 사회적 실존을 둘러싼 질문이다.

평소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최근 수년간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지상, 온라인 기사 속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언급을 들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 듯싶다. 그것은 작품의 감동이나 매력에 대한 찬사, 오랫동안 곱씹어볼 여운과 같은 것이라기보다, 가족이나 이웃, 직장동료나 친구, 혹은 어느 누군가와라도 당장 토론을 벌이고 논쟁이 붙을 만한 불온한 소문과 불편한 이야기에 가깝다. 어떤 이는 아낌없이 환호를 보내고 타인들에게 열정적으로 권유하지만, 다른 이들은 격렬하게 기피하고 거부하면서 개인적 금서목록에 올려두는 소설. 걔중에는 책의 첫 페이지도 열어보지 않았음에도 문학과 사회의 엄중한 판관이 되어 우리의 현실을 논하는 근거 자료로 이 작품과 작가를 거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 2015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를 진동시킨 문화계 성폭력 고발 및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82년생 김지영은 지금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지표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소설의 플롯은 간단하다. 1982년에 태어나 2015년 서른네 살이 된 김지영은 어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여성 중 하나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무난히 대학을 졸업했고, 입사와 결혼을 거쳐 현재 딸 하나를 키우는 가정주부로 산다. 남편은 중견 기업에 다니며 별 탈 없이 가정과 회사에 충실하고, 경제사정은 서울 변두리의 24평 아파트에 전세로 거주할 만큼 무난하다. 밝고 웃음 많은 원만한 성격을 가진 그녀는 딸아이와 남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정신적 퇴행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 살배기 딸처럼 어린 아이가 되었다가 사망한 대학선배의 분신이 되어 행동하기도 하고, 순식간에 자기 엄마가 되어 시부모에게 정색한 채 부당함을 항의한다. 이야기는 김지영의 발병, 아니‘변신’의 시점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명하면서 진행된다.

1982년부터 2015년에 이르는 김지영의 생애는 단지 특정 개인에게만 국한된 삶의 모습이 아니다.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쳐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결혼 등 그녀가 대변하는 한국인의 일상사는 기실 그녀의 어머니도 살아왔던 이전 세대의 삶의 반복임이 드러난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이전으로도 얼마든지 소급 가능한 한국인의 일상사적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 여기서 전제는 그것이 임의의 누구나가 아니라 바로 여성이라는 특정한 성별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다는 데 있다. 김지영이 놓인 자리는 한국인의 보편성과 여성의 개별성이 교차하는 대단히 특수한, 문제적인 위치라는 것이 핵심이다.

아들에 대한 선호와 딸에 대한 차별, 남성의 일에 대한 존중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성 가사에 대한 폄하... 놀이와 공부, 직업과 일상의 모든 분야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성별의 구분과 차별은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지를 실감 속에 전시해 준다. 여자니까 참아야 하고, 여자이기에 견뎌야 하며, 여자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습과 전통, 생활의 규율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내밀한 분위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김지영은 성별을 두고 한편으로 기울어진 이 경사면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몸에 익혔고,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았다. 생리를 시작하는 여자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몰래 감춰야 하며, 제때 결혼을 못한 채 나이를 먹으면 값어치가 깎여나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를 마치 자연의 순리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통과하며 현대성을 구가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다름 아니다. 김지영의 발병은 이런 상황을 버텨내지 못한 여성 개인의 파탄이기보다, 이런 현실에 대해 항의하고 과감히 절연하고자 하는 여성 전체의 변신으로 불릴 만하다.

82년생 김지영이 촉발시킨 가장 큰 논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겪는 삶이 과연 우리 시대의 여성 전체에 대한 일반성을 갖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바꿔 말해, 소위 ‘유리천장’이라는 것,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반박이 그렇다. 한국사회의 어느 분야에서든 성별을 매개로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는 그만큼 성숙한 민주사회를 일구어 왔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 개인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내면화하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 감수성은 무심코 차별을 감수하고, 또 불가피한 것으로 각인하고 있음을 이 작품은 폭로한다. 김지영이 느끼는 원인 모를 불안이나 두려움은 실상 우리 사회 전체가 이유를 모른 채 여전히 붙잡혀 있는 가부장적 질서와 폭력의 무의식적 반영인 셈이다. 비가시화되어 있는 성적 불평등, 혹은 성적 불평등의 비가시성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다.

사진 촬영: 최승도
소설적 서사보다 신문기사나 통계자료, 학술논문 등을 바탕으로 집필된 82년생 김지영은 흡사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읽힌다. 혹자는 이런 특징을 이 작품이 지닌 비문학적인 결점이라 지적하고, 소설 본연의 창조적 상상력이나 핍진성의 결여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무엇이 문학성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논외로 치더라도, 문학 자체의 역사를 놓고 보더라도 이런 비판은 다소 설득력이 부족하다. 유구한 문학의 전통, 특히 소설의 역사는 항상 소설 바깥으로부터,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등의 외부적 요인들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가령 문학이 사회를 모방한다거나 반영한다는 오래된 이론은 삶 없는 문학의 독자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문학이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는 전망 역시 비문학적인 것, 즉 현실에 문학이 침투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다시 현실이 문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전제한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로부터 태어났다. 그것은 소설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실존을 직시함으로써 조형된 현실적 허구임을 반증한다. 엄존하는 여성의 실존이 있기에 그것의 문학도 가능했던 것이다.

문학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독자에게 동의나 공감을 요청하지만, 때로는 머릿속에서 떼어낼 수 없는 물음의 형식으로 잔존하여 개인과 사회를 움직이게 만든다. 김지영이 던진 많은 의혹들, 그녀의 발병/변신이 불러낸 더 많은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의 고민과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름 없는 그녀들, 그들 모두가 김지영이기 때문이다.

최진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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