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환멸과 부정의 소설 - 장정일 ‘아담이 눈뜰 때’

입력 2022.02.20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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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0)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새로운 탄생의 의미가 부각되어 있다. 주인공의 방황과 변화를 통해 이전과 다른 주체의 의미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이른바 성장소설이란 장르적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이 소설은 세계와의 화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성장은 기존 세계에 대한 환멸과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인공 아담은 재수생으로 사회적 제도 안에 안전히 귀속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의 고통은 대학이란 제도로부터 배제된 데에서 비롯되기보다, 그 같은 기존의 제도가 신뢰할 수 있는 미래를 약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소설 안에서 후보 단일화를 거부한 두 야당 후보들을 짐승이라고 서술하듯, 그를 둘러싼 1988년 무렵 남한의 풍경은 진정성의 가치가 속물성으로 전복되어 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는 선언은 소설에서 네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이 진정성의 가치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음미해 볼 수 있게 된다. 우선 그 선언은 주인공이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만난 은선이와 함께 쓴 시(詩) 「12월」에 등장한다. 입시 교육의 억압에서 벗어난 그들은 시를 통하여 자신들을 옭아매는 제반 현상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처럼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선언은 부정하는 대상을 섬세하게 판단하지 못하며, 부정의 정신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간 은선은 재수생이 된 주인공과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며,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한다. 주인공은 제도권에 종속된 은선에 대한 배신감으로 다시 한번 위의 선언을 중얼거린다. 그러한 두 번째 선언은 시를 함께 썼던 동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을 대변하며, 시가 시를 쓴 주체를 정신적으로 강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주인공의 환멸감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부정의 정신을 드러내는 이 외침은 주인공이 속물로 생각하는 형이 보낸 편지와 형의 잠꼬대에서 다시 등장한다. 형은 민주화를 위해서 청춘을 바쳤지만 자신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퇴보했다는 것에 실망한다. 형은 실의를 떨치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다. 주인공에게 형의 이러한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합리화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이 나라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여기선 아무것도 더 기대할 게 없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도!”라는 형의 외침에는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 즉 은선과 형, 주인공 모두 부정의 선언은 같았지만 그 정신은 일치하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은선과 형의 외침은 문학과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증폭시킨다.

이처럼 부정의 형식은 일치하나 정신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주인공의 괴리감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에게 인간과 삶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또 다른 인물로 ‘화가’와 ‘오디오점 주인’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주인공에게 각각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선사한다. 하지만 뭉크화집 속에 주인공이 가장 사랑했던 그림이 누락되어 있듯, 이것들은 철저한 거래를 바탕으로 진행되며 주인공의 내면을 강화하기보다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주인공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던 부정의 정신을 좀 더 섬세하게 조율하게 된다. 소설의 모두(冒頭)에서 주인공은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방황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소유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것들 중 주인공이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소유하는 것은 타자기이며, 방황의 끝에서 그는 타자기를 사용해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담이 눈뜰 때」의 서사는 주인공이 타자기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며, 그것은 소설을 쓰기 위한 주인공의 진통이자 방황의 경로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타자기를 구입하기까지, 뭉크화집을 받고, 턴테이블을 얻으며, 또 형이 미국으로 유학가고, 현재가 죽고, 은선이 민중문학의 기수로 변하는 일련의 경로들은 주인공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다양한 세계관들을 회의하고 검증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세계관들은 소설에서 언급된 ‘스피드족’과 ‘오디오족’이라는 항목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스피드족은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변화하는 시대의 전위를 상징하다면, 오디오족은 반복해서 음악을 향유하듯 반추행위를 통해 전위를 반성하는 이른바 전위의 후위로 의미화된다.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고 선언하는 은선과 주인공의 형이 스피드족에 해당한다면, 이들의 선언과 자신의 선언마저도 끊임없이 회의하는 주인공은 오디오족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스피드족에게 환멸하고, 오디오족을 신뢰하면서 점점 변화해 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피드족에 대한 오디오족의 반추행위가 자신의 반추 자체를 다시 반추하는 끝없는 반성의 동력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주인공에게 그렇게 부단히 이루어지는 반성은 속물의 세계에서 진정성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 그는 대학에 등록하는 대신 타자기를 구입하여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설가가 되어 글을 쓰는 일은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자 “내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 되새”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오디오족의 끝없는 “반추행위”와 유사하며,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는 선언을 부단히 실천하는 행위이다.

「아담이 눈뜰 때」는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이렇게 시작되는 내 열아홉 살의 초상을 그릴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반복된 이 문장은 이미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로 시작되었던 소설 자체를 부정하는 장치가 된다. 이처럼 자기반영적이고 수미상관적인 방식은 완성된 소설이 부정된 후 처음으로 되돌아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 타자기를 얻는 방황을 다시 겪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 소설은 오직 끝없는 반추행위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며, 완성된 결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이 소설은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장정일의 소설들과 함께 연속해서 읽어볼 때 매우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2년 후에 발표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김영사, 1992)의 작가 후기에서 보듯 장정일은 “저의 소설은 종합잡지와 같은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진정성의 가치를 찾아 환멸과 부정을 거듭한 후 결국 소설이라는 가치를 찾아냈던 「아담의 눈뜰 때」의 낭만적인 기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그 의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를 계속해서 반추하는 동력에서 비롯된다던 「아담의 눈뜰 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진정성은 고정된 의미의 영역이 아니라 부단한 실천의 영역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아담의 눈뜰 때」는 그 실천의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김남혁 문학평론가·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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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환멸과 부정의 소설 - 장정일 ‘아담이 눈뜰 때’
    • 입력 2022-02-20 21:30:59
    취재K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1990)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새로운 탄생의 의미가 부각되어 있다. 주인공의 방황과 변화를 통해 이전과 다른 주체의 의미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이른바 성장소설이란 장르적 규칙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이 소설은 세계와의 화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성장은 기존 세계에 대한 환멸과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인공 아담은 재수생으로 사회적 제도 안에 안전히 귀속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의 고통은 대학이란 제도로부터 배제된 데에서 비롯되기보다, 그 같은 기존의 제도가 신뢰할 수 있는 미래를 약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소설 안에서 후보 단일화를 거부한 두 야당 후보들을 짐승이라고 서술하듯, 그를 둘러싼 1988년 무렵 남한의 풍경은 진정성의 가치가 속물성으로 전복되어 가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심리를 대변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는 선언은 소설에서 네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주인공이 진정성의 가치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음미해 볼 수 있게 된다. 우선 그 선언은 주인공이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만난 은선이와 함께 쓴 시(詩) 「12월」에 등장한다. 입시 교육의 억압에서 벗어난 그들은 시를 통하여 자신들을 옭아매는 제반 현상을 부정한다. 하지만 이처럼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선언은 부정하는 대상을 섬세하게 판단하지 못하며, 부정의 정신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대학에 들어간 은선은 재수생이 된 주인공과는 다른 세계로 진입하며,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한다. 주인공은 제도권에 종속된 은선에 대한 배신감으로 다시 한번 위의 선언을 중얼거린다. 그러한 두 번째 선언은 시를 함께 썼던 동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을 대변하며, 시가 시를 쓴 주체를 정신적으로 강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주인공의 환멸감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부정의 정신을 드러내는 이 외침은 주인공이 속물로 생각하는 형이 보낸 편지와 형의 잠꼬대에서 다시 등장한다. 형은 민주화를 위해서 청춘을 바쳤지만 자신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퇴보했다는 것에 실망한다. 형은 실의를 떨치기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다. 주인공에게 형의 이러한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합리화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이 나라를 빠져나가려고 한다. 여기선 아무것도 더 기대할 게 없다.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도!”라는 형의 외침에는 진실이 담겨 있지 않다. 즉 은선과 형, 주인공 모두 부정의 선언은 같았지만 그 정신은 일치하지 않았다. 주인공에게 은선과 형의 외침은 문학과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증폭시킨다.

이처럼 부정의 형식은 일치하나 정신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는 주인공의 괴리감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에게 인간과 삶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또 다른 인물로 ‘화가’와 ‘오디오점 주인’을 들 수 있다. 이 둘은 주인공에게 각각 뭉크화집과 턴테이블을 선사한다. 하지만 뭉크화집 속에 주인공이 가장 사랑했던 그림이 누락되어 있듯, 이것들은 철저한 거래를 바탕으로 진행되며 주인공의 내면을 강화하기보다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주인공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던 부정의 정신을 좀 더 섬세하게 조율하게 된다. 소설의 모두(冒頭)에서 주인공은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고 말하는데, 그의 방황은 결국 이 세 가지를 소유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것들 중 주인공이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서 소유하는 것은 타자기이며, 방황의 끝에서 그는 타자기를 사용해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간단히 말해서 「아담이 눈뜰 때」의 서사는 주인공이 타자기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며, 그것은 소설을 쓰기 위한 주인공의 진통이자 방황의 경로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타자기를 구입하기까지, 뭉크화집을 받고, 턴테이블을 얻으며, 또 형이 미국으로 유학가고, 현재가 죽고, 은선이 민중문학의 기수로 변하는 일련의 경로들은 주인공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다양한 세계관들을 회의하고 검증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세계관들은 소설에서 언급된 ‘스피드족’과 ‘오디오족’이라는 항목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스피드족은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변화하는 시대의 전위를 상징하다면, 오디오족은 반복해서 음악을 향유하듯 반추행위를 통해 전위를 반성하는 이른바 전위의 후위로 의미화된다.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고 선언하는 은선과 주인공의 형이 스피드족에 해당한다면, 이들의 선언과 자신의 선언마저도 끊임없이 회의하는 주인공은 오디오족에 해당한다. 주인공은 스피드족에게 환멸하고, 오디오족을 신뢰하면서 점점 변화해 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피드족에 대한 오디오족의 반추행위가 자신의 반추 자체를 다시 반추하는 끝없는 반성의 동력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주인공에게 그렇게 부단히 이루어지는 반성은 속물의 세계에서 진정성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 그는 대학에 등록하는 대신 타자기를 구입하여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소설가가 되어 글을 쓰는 일은 세계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자 “내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 되새”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쓰고자 하는 소설은 오디오족의 끝없는 “반추행위”와 유사하며,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라는 선언을 부단히 실천하는 행위이다.

「아담이 눈뜰 때」는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만약,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이렇게 시작되는 내 열아홉 살의 초상을 그릴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소설의 마지막에 반복된 이 문장은 이미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로 시작되었던 소설 자체를 부정하는 장치가 된다. 이처럼 자기반영적이고 수미상관적인 방식은 완성된 소설이 부정된 후 처음으로 되돌아가 뭉크화집과 턴테이블, 타자기를 얻는 방황을 다시 겪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때 소설은 오직 끝없는 반추행위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며, 완성된 결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이 소설은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장정일의 소설들과 함께 연속해서 읽어볼 때 매우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2년 후에 발표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김영사, 1992)의 작가 후기에서 보듯 장정일은 “저의 소설은 종합잡지와 같은 ‘읽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진정성의 가치를 찾아 환멸과 부정을 거듭한 후 결국 소설이라는 가치를 찾아냈던 「아담의 눈뜰 때」의 낭만적인 기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그 의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를 계속해서 반추하는 동력에서 비롯된다던 「아담의 눈뜰 때」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진정성은 고정된 의미의 영역이 아니라 부단한 실천의 영역에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아담의 눈뜰 때」는 그 실천의 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김남혁 문학평론가·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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