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군함도 실패의 데자뷔…외교부 ‘로우키’ 전략만 있나

입력 2022.02.24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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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현지 시각 2월 22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파리를 방문해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면담했다.

40분 정도의 만남 뒤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냈고, ‘정 장관은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데 대해 강한 우려를 전달했고, 아줄레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유네스코 면담 현장에 KBS를 포함해 한국 언론들이 있었지만, 정의용 장관은 공개적인 인터뷰는 사절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장관의 말 대신 보도자료를 통해 정 장관의 발언 내용을 언론에 알렸다. 국제기구인 유네스코 등의 입장을 반영해 ‘로우키(Low key 절제된 행동)’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20.2.22) 사도광산 관련 우려 전달정의용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20.2.22) 사도광산 관련 우려 전달

과거 언제가 본 듯한 기시감.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 떠오른다.


2015년 6월, 외교부는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다른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면담해 군함도(일본명: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우려를 표명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15.5.19)  군함도 관련 우려 전달윤병세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15.5.19) 군함도 관련 우려 전달

또 비슷한 시기 프랑스 파리의 OECD 회의에 참석하러 간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은 현지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 군함도 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 등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고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 관계자들을 만나(세계유산위원회 위원이 아니고 OECD 회의에 참석한 해당국 공무원들을 얘기한 것 같다) 설득하고 있다고 간담회 자리에서 설명했다.

일본이 10년 동안 치밀한 전략으로 군함도 등재를 추진해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랐을 때 등장한 외교부의 뒷북이었다.


국내 여론이 악화 되고 외교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면 정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언론을 통해 흘리는 것이다. ‘로우키’ 전략을 역설하며, '강한 우려'를 했다는 발언들은 보도자료로와 비공식 간담회를 통해 설파한다. 책임감을 가져야 할 당국자의 '직접적인 육성'은 잘 나오지 않는다.


결국 그해 7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한국의 우려를 반영해 강제노동의 역사를 포함 시키라고 했지만 이런 권고는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 세계유산위원회 군함도 왜곡  지적에 반박 기자회견(2021.7.13)도시미쓰 일본 외무상, 세계유산위원회 군함도 왜곡 지적에 반박 기자회견(2021.7.13)

일본이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시키려는 시도 역시 오래전부터 감지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말 KBS가 사도광산을 현장 취재하고,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사실 관계가 나와 있는 문서들이 있음을 알리고, 세계유산 등재 추진이 임박했음을 이슈화하자 뒤늦게 외교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도광산 등재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오랫동안 협력해 준비했지만, 한국은 당장 대응하기엔 기초적인 연구와 준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외교부가 민관합동 TF를 만들어 첫 회의를 한 것도 2월 초순이었다.

외교부 일본 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진 대응 첫 TF 회의 (2022.2.4)외교부 일본 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진 대응 첫 TF 회의 (2022.2.4)

외교가에서 특히 자주 거론되는 '로우키' 전략은 문화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들과 협력하기 위해서 상당히 필요한 측면이 있다. 다만 ‘로우키’ 전략이 성공하려면 치밀한 준비와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이미 때를 놓쳤거나 상황이 불리할 때 나오는 ‘로우키 전략’은 여론에 등 떠밀려 나온 공무원이 모든 책임을 떠안기 싫을 때 나온다는 점도 취재현장에서 자주 목격하곤 한다.

반대로 '하이키'가 필요할 때도 있다.


일본은 2015년 중국이 ‘난징 대학살 사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 유네스코 분담금을 수개월 체불하며 실력 행사를 했고, 2017년 유네스코가 위안부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할 때는 또다시 분담금 납부를 미루며 유네스코를 협박해 결국 관철시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인터뷰 요청을 사절하고 유네스코를 떠나는 정의용 장관(2022.2.22)공식적인 인터뷰 요청을 사절하고 유네스코를 떠나는 정의용 장관(2022.2.22)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에 대해 군함도의 역사적 사실 누락에 대한 공개 경고를 했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는 않은 채 또다시 사도광산 등재를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해 한국은 일본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측에도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다.


정의용 장관은 유네스코 방문 다음 날 특파원 간담회를 가졌고, 현장에서는 하지 못한 말들을 기자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임자가 직접적인 목소리를 국민에게 전한 것과 간접적으로 기자들에게 설명한 말의 무게가 얼마나 다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사도광산이 군함도의 전철을 밟게 되면 그때는 일본보다 적은 유네스코 ‘분담금’이 문제라고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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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2-24 08:47:11
    특파원 리포트

프랑스 현지 시각 2월 22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파리를 방문해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면담했다.

40분 정도의 만남 뒤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냈고, ‘정 장관은 일본이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데 대해 강한 우려를 전달했고, 아줄레 사무총장은 한국 정부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유네스코 면담 현장에 KBS를 포함해 한국 언론들이 있었지만, 정의용 장관은 공개적인 인터뷰는 사절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장관의 말 대신 보도자료를 통해 정 장관의 발언 내용을 언론에 알렸다. 국제기구인 유네스코 등의 입장을 반영해 ‘로우키(Low key 절제된 행동)’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20.2.22) 사도광산 관련 우려 전달
과거 언제가 본 듯한 기시감. 일본이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 떠오른다.


2015년 6월, 외교부는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다른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을 면담해 군함도(일본명: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에 우려를 표명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2015.5.19)  군함도 관련 우려 전달
또 비슷한 시기 프랑스 파리의 OECD 회의에 참석하러 간 조태열 당시 외교부 2차관은 현지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을 만나 군함도 유산에 조선인 강제노동 등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고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 관계자들을 만나(세계유산위원회 위원이 아니고 OECD 회의에 참석한 해당국 공무원들을 얘기한 것 같다) 설득하고 있다고 간담회 자리에서 설명했다.

일본이 10년 동안 치밀한 전략으로 군함도 등재를 추진해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랐을 때 등장한 외교부의 뒷북이었다.


국내 여론이 악화 되고 외교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면 정부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언론을 통해 흘리는 것이다. ‘로우키’ 전략을 역설하며, '강한 우려'를 했다는 발언들은 보도자료로와 비공식 간담회를 통해 설파한다. 책임감을 가져야 할 당국자의 '직접적인 육성'은 잘 나오지 않는다.


결국 그해 7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한국의 우려를 반영해 강제노동의 역사를 포함 시키라고 했지만 이런 권고는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 세계유산위원회 군함도 왜곡  지적에 반박 기자회견(2021.7.13)
일본이 군함도에 이어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시키려는 시도 역시 오래전부터 감지됐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말 KBS가 사도광산을 현장 취재하고,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사실 관계가 나와 있는 문서들이 있음을 알리고, 세계유산 등재 추진이 임박했음을 이슈화하자 뒤늦게 외교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도광산 등재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오랫동안 협력해 준비했지만, 한국은 당장 대응하기엔 기초적인 연구와 준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외교부가 민관합동 TF를 만들어 첫 회의를 한 것도 2월 초순이었다.

외교부 일본 사도광산 세계유산 추진 대응 첫 TF 회의 (2022.2.4)
외교가에서 특히 자주 거론되는 '로우키' 전략은 문화와 정서가 다른 외국인들과 협력하기 위해서 상당히 필요한 측면이 있다. 다만 ‘로우키’ 전략이 성공하려면 치밀한 준비와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이미 때를 놓쳤거나 상황이 불리할 때 나오는 ‘로우키 전략’은 여론에 등 떠밀려 나온 공무원이 모든 책임을 떠안기 싫을 때 나온다는 점도 취재현장에서 자주 목격하곤 한다.

반대로 '하이키'가 필요할 때도 있다.


일본은 2015년 중국이 ‘난징 대학살 사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자 유네스코 분담금을 수개월 체불하며 실력 행사를 했고, 2017년 유네스코가 위안부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할 때는 또다시 분담금 납부를 미루며 유네스코를 협박해 결국 관철시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식적인 인터뷰 요청을 사절하고 유네스코를 떠나는 정의용 장관(2022.2.22)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 정부에 대해 군함도의 역사적 사실 누락에 대한 공개 경고를 했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는 않은 채 또다시 사도광산 등재를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해 한국은 일본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측에도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다.


정의용 장관은 유네스코 방문 다음 날 특파원 간담회를 가졌고, 현장에서는 하지 못한 말들을 기자들에게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임자가 직접적인 목소리를 국민에게 전한 것과 간접적으로 기자들에게 설명한 말의 무게가 얼마나 다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사도광산이 군함도의 전철을 밟게 되면 그때는 일본보다 적은 유네스코 ‘분담금’이 문제라고 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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