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서해안 시대] 남도의 독립운동 발자취…정명여고 태극기 만세 운동

입력 2022.03.01 (11:54) 수정 2022.03.0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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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시사 지지고 볶고 : 전남의 독립운동]
- 1919년 3월 20일 목포에서 소규모 만세운동 이후 4월8일에 대규모 만세운동
- 일본의 수탈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대거 참여
- 완도 소안도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만 89명...섬 독립운동 이례적 평가
- 목포 근대거리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건물과 유물 등 보존....다크 투어리즘 통한 역사 교육
- 친일파 청산 등 과제 산적..."'역사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학교 역사 교육 늘려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서해안 시대]
■ 방송시간 : 3월 1일 (화) 08:30∼09:00 KBS목포 1R FM 105.9 MHz
■ 진행 : 정윤심 앵커
■ 출연 :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 연구위원, 전영자 목포문화관광해설사
■ 구성 : 신세미 작가
■ 기술 : 김유진 감독




▶다시 듣기 유튜브 바로 가기 주소https://youtu.be/nmsNmfQ1NEc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다시 듣기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정윤심 아나운서 (이하 앵커): [시사 지지고 볶고] 오늘 이 지역의 3·1운동사 들여다 본다 이렇게 말씀 드렸는데요.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외침도 생각이 납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배우며 수없이 들었던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얘기를 했는데, 수없는 외세의 탄압에도 결코 이 나라를 지켜냈던 분들 순국선열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되는 날 아닌가 싶습니다. 이 지역에 독립운동사 살펴주실 두 분 함께 했는데요. 서남권 균형발전 연구소 김학주 연구위원, 안녕하십니까?

◈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 연구소 연구위원 (이하 김학주): 네, 안녕하십니까.

■ 앵 커: 그리고 특별게스트 한 분을 모셨습니다.~ 직접 좀 소개를 해주시죠?

◉ 전영자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이하 전영자): 네, 목포를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자입니다.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 연구위원·전영자 목포문화관광해설사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 연구위원·전영자 목포문화관광해설사


■ 앵 커: 네,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자 선생님 오늘 이 지역에 문화관광 속에 들어있는 직접 적으로 외지 관광객들을 만나면서 이 지역의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소개해 주시는지 잠시 후에 들어보도록 하고요. 먼저 김학주 위원님 이 지역의 3·1운동사 간략히 정리해주시죠.

◈ 김학주: 잘 아시겠지만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범민족 항일운동입니다. 근데 이제 이날은 서울과 평양 등 6개 지역에서 일어나고요. 이후 3개월 가량 전국에서 계속 시위운동이 일어납니다. 근데 사실 3개월이라고 하기도 좀 어려운거는 그 다음해 또 그 다음해 계속 이를 기념하는 시위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속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고요. 목포에서는 1919년 3월 20일 소규모 만세운동이 전개가 되고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거는 4월 8일입니다. 그리고 특징중에 하나는 일본의 수탈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대거 참여 했다는 특징이 있고

■ 앵 커: 목포에서는 상인들이 참여를 했다.

◈ 김학주: 네, 그런 특징들도 하나가 있고, 이제 가장 주축이 됐던 세력들은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이런 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3·1 운동을 전개하는데 아무래도 기독교계 학교에 일제의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좀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지역의 항일운동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소안도에 토지소유권 반환 투쟁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 앵 커: 이 것도 유명하죠. 뉴스에 여러번 좀 소개되기도 했는데.

◈ 김학주: 그렇죠. 그래서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 토지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13년 동안 법정 싸움을 벌이는데 승소를 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 이례적인 승리라고 하는데 이 결과물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주민들은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못 배워서 나라를 잃은거 아닌가 그래서 돈을 모아가지고 사립 소안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아진 돈이 454원 비행기 한 대값이라고 해요.

■ 앵 커: 배우자 이렇게 해서 학교를 세우자 라고 모아진돈!

◈ 김학주: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가 항일운동의 구심이 되는데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만 89명,

■ 앵 커: 완도 소안도 유명하죠.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탑 (사진출처:연합뉴스)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탑 (사진출처:연합뉴스)


◈ 김학주: 그렇죠. 그리고 21명이 독립유공자 성혼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보면 학교가 참 중요한 역할들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참 배움이란게 중요하고 교육이란 것도 참 필요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고요. 그 밖에도 목포 같은 경우는 목포 부두노동 운동 그 다음 여기 인근 암태도 소작쟁이 운동, 광주 학생운동 이런 항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 앵 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보면 목포가 딱 3월 1일날 일어날 수 없는게 4·8 만세운동이라 그래서 이 지역에서 정명여고, 정명여중·고학생들이 거의 매년 이런 만세운동에 기념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는데 늦어진게 4월 8일날 목포에서는 거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거잖아요?

◈ 김학주: 전국적으로 3월 1일 날은 전국 6개 도시 정도에서만 하게 되고 그게 계속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 앵 커: 통신 확산이 늦으니까 아무래도 한 달 정도 더 늦은 4월 8일에 있었는데 그 당시 참여했던 나이 연령대를 보면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이렇게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내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서 뛰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정말 다시한번 가슴 뭉클해져요.

◈ 김학주: 그렇죠. 그리고 그 이후 근현대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했다는걸 보면 학생들이 이런 역학들을 상당히 많이 해 왔던게 사실이죠.

■ 앵 커: 거기에 이제 목포에는 정명 여학생들이 중심에서 많이 소개되는거죠?

◈ 김학주: 그렇습니다. 1919년 4월 8일 날 정명여학교를 비롯해서 영흥학교,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돼서 시가 행진을 시작하면서 4·8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요. 거기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학생들하고 졸업생들이 목포 형무소에 많이 수감 되고 그러다 보니까 학교가 임시 휴고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1920년~ 1922년까지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게 되고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21년에 11월 14일 날 학생들이 또 다시 학교 정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몰래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또 이때도 11명이 체포가 되고 최하 징역 6개월씩 수감을 하게 됩니다. 이후 목포에서는 항일독립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1924년에 시민들이 성금을 모으게 되는데요. 성금을 모아서 항일운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그게 남교동에 위치한 청년회관

◉ 전영자: 아~ 그렇게 만들어졌군요?

◈ 김학주: 예 그렇게 되고요. 이 곳이 나중에 여성운동, 청년운동, 신간회 운동 중심 역할을 하는겁니다.

■ 앵 커: 그렇게 역사가 이어지게 되네요.

◈ 김학주: 그리고 정명여중 사택이 있는데 지금은 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죠. 이 석조건물인데 1948년 2월에 이 곳을 보수하던 중 천장에서 자료들이 발견되죠. 그게 뭐냐면 학생들이 만세운동에서 사용했던 경문, 독립가 이런 것들이 발견되는데 그 당시 학생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중한 자료가

■ 앵 커: 엄혹한 시절이라 정말 어디에 숨겨야 일본 순사들이 이걸 찾지 못할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여러 곳에서 귀한 흔적들이 나오는거 잖아요. 안중근 의사 얘기 했지만 그렇게 저격하고 나서 가슴에서 태극기 꺼내거든요. 그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게 되는데 태극기가 참 중요해요. 보니까 목포에도 양동교회에서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었다. 그때 당시 이런 만드는 시설도 매우 열악했을텐데 그런 내용들이 기록이 있는거죠?

◈ 김학주: 정명여고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몰래 만들기도 했고요. 양동교회 교인들이 지역 청년들하고 함께 태극기를 몰래 만들었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에서 양동제일교회가 항일운동 사적지로 지적이 되고요. 아까 제가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 얘기를 했는데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해 드리면 정명여고 교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는 길이 하나 있어요. 포장돼 있는 길이 근데 그 길 지하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거기에 가서 봤는데 그 우물을 보려면 학교 급식실로 내려가서 지하에 출입문이 하나 있고 그 출입문을 열면 우물이 보존돼 있는데 이 우물이 뭐냐면 당시 거긴 조선인 마을이잖아요. 그래서 조선인 마을의 공동 우물인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시계가 없으니까 밥 짓는거를 어떻게 봤냐면 선교사 사택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면 아~ 밥지을 시간이 됐구나 해서 사람들이 거기서 물을 길러서 밥을 했던 이런 곳이예요. 근데 제가 참 놀랬던 거 중에 하나가 몇 년 전에 갔을 때 교장 선생님이 거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보통 공사 하면서 다 없앨거 아니에요. 근데 학교가 참 어떤 분의 생각인진 모르겠는데 길을 포장하면서도 그걸 그대로 보존하고

■ 앵 커: 우물을 남겨두고

◈ 김학주: 그 위로 길을 냈더라고요. 그래서 우물이 그대로 지금 남아있습니다.

◉ 전영자: 지금도 있어요?

◈ 김학주: 그래서 양동제일교회나 선교사 사택 이런걸 보면 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잘 지켜내야되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해보고 있습니다.

정명여고 만세운동 재현 (사진출처 : 목포시청)정명여고 만세운동 재현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앵 커: 오늘 전영자 해설사님 목포의 새로운 독립운동사의 흔적들을 배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목포 근대문화유산 관광하는 코스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근대문화유산이 대부분이겠죠?

◉ 전영자: 그렇죠. 목포 구도심쪽 보면 동쪽으로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그렇고, 남쪽 항구 쪽으로는 일본인 이라고 우리가 불리는데 개항장 쪽에는 아직도 많은 한 300여 채가 된다고 그래요. 당시 가옥들이 그 중에는 15개 정도가 문화재로 등재돼 있고요. 관광객들이 오셔서 많이 찾는 공간이 그 공간이잖아요.

■ 앵 커: 어디어디 공간을 주요적으로 안내해 주시나요?

◉ 전영자: 보통 오시면 근대역사 1관이라 해서 구 일본영사관, 그리고 근대역사 2관 하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그 두 곳을 많이 찾아요. 요즘에는 코로나 기간이라 그런지 관광객 동선도 많이 넓어져 가지고 더 넓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구 일본영사관은 전라남북도에 사는 일본인들을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1900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 당시를 목포지역에 보자면 맨 처음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초가집하고 기와집 몇 채 있었겠죠?

■ 앵 커: 그때 당시에~

◉ 전영자: 근데 거기에 유리를 우리는 사용하지 않거든요. 우리 가옥에는 근데 유리가 있고 빨간 벽돌로 2층 건물이 세워졌다고 그러면 인근에 사는 섬에 사는 분들이 배 타고 구경도 왔을 법 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나서 그 앞으로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그러면서 석조건물 또 근대역사 2관 석조건물이거든요. 석조건물로 2층 건물이 생기고 그게 생기기까지는 국도 1호선이 완공되고 국도 2호선이 완공되고 그게 1907년까지

■ 앵 커: 국도 1, 2호선이 그때 당시에

◉ 전영자: 네네~ 그리고 나서 철도가 들어오거든요. 그 이후에 1920년대에 근대역사 2관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져요. 그게 원래는 영산포에 있던게 목포로 내려옵니다. 그걸 세운 목적은 ‘일흑삼백’이라고 우리가 그러는데 쌀, 면화, 소금, 그리고 하나는 김인데 그것들을 수탈해가는 창구 역할을 했던거죠.

■ 앵 커: 일흑삼백!

◉ 전영자: 네, 일흑삼백입니다.

■ 앵 커: 목포에서 수탈하기 위한 도로나 철도가 놓아졌던거고 항구에서 배로 실어가기도 하고

◉ 전영자: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건물 안에 목포 근대사를 담아놓고 있죠. 근데 관광객들이 오셔서 묻는 말이 하나 있어요. 근대사가 뭐예요? 근대역사관이라 하는데 근대사가 뭐예요?

■ 앵 커: 아~ 근대사가?

◉ 전영자: 근대가 뭐냐 근대가! 근데 근대라고 하는 것은 개항되면서부터 해방까지의 기간을 말해요. 보통 강화도 조약부터 시작 얘기를 하죠. 강화도 조약부터 45년 해방까지 기간을 얘기 합니다.

■ 앵 커: 역사 공부를 해야되는 시간, 그런데 목포에서 이런 근대문화 유산들이 지금 한때는 목포지역에서 수치스럽다. 이거 없애야겠다 해서 꽤 많이 일부 안타깝지만 사라진 것도 있잖아요. 일제흔적, 일제 강점기 흔적들이

◉ 전영자: 많이 사라졌죠. 많이!

■ 앵 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이게 우리의 또 다른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배워야되는 역사다 라고 말을 하고 있는건데 이렇게 쭉 관광객들 모시고 안내하실거 아니에요. 어느 곳에서 제일 관광객들이 아~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힘든 독립 투쟁을 했구나 그 들이 그렇게 수탈을 많이 해갔구나, 역사의식이 가장 드러나는 흔적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것들이!

◉ 전영자: 건물도 그렇지만, 국도 1, 2호선 도로 원표가 있는 공간 있잖습니까.

■ 앵 커: 원도심에?

◉ 전영자: 네, 원도심

■ 앵 커: 원도심 어디에가 있죠? 위치가?

◉ 전영자: 바로 영사관 앞에 있습니다. 근데 그곳이 왜 그렇게 저한테는 가슴이 와 닿았냐면 호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을 다 잡아다가 한 2000여 명 되는데 거기다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놓은게 근대역사 1관에 있어요.

■ 앵 커: 아~ 원표를 배경으로 해서!

목포 근대역사 거리 (사진출처 : 목포시청)목포 근대역사 거리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전영자: 아뇨 그때는 원표가 없었죠. 원표가 세워지는 그 도로에 있는 그쪽입니다. 그래서 일본 영사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놓은게 있어요. 근데 그 분들이 사실은 우리가 노비해방이라고 그러죠. 미국에서는 노예해방이라고 그러고, 노예해방은 링컨을 말하는데 노비해방 같은 경우에는 누가 했냐 그러면 잘 얼른 대답하기 어렵잖아요. 갑오개혁~

■ 앵 커: 너무 멀리가지 마시고 우리지역으로 연결을~

◉ 전영자: 그 분들이 한거죠. 그 분들이 의병을 하신분들이, 갑오개혁을 한 다음에 10년 후에 다시 의병활동을 한거예요. 왜 그이야기를 하냐면 그때 우리 노비나, 공노비나, 사노비의 인권을 해방시킨 분들이 그 분들이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서 또 거기서 의병으로 투쟁을 하다가 잡혀서 도로를 놓은거죠. 국도 2호선을, 국도 2호선을 놨던 분들이 그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그 도로가 서면은 가슴 쿵쾅거리는 그런 현장이더라고요.

■ 앵 커: 김학주 위원님 조금 보충설명 해주실까요?

◈ 김학주: 저도 방금 처음 들었는데 국도 1, 2호선이 의병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참 저는 가슴이 뭉클하고요. 저도 사실은 근대문화 유산중에 기억에 남는게 좀 있는데 대표적으로 ‘동번원사 목포별원’은 한동안 교회로 쓰였거든요. 절 위에 십자가가 놓였던 이런 것들도 참 재미난 사연들이 있는 것 같고 저는 한편으로는 근대문화 유산이라고 하긴 그렇겠지만 좀 재미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오늘 새로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일제강점기는 저희한테는 피해자의 역사잖아요. 근데 이 시기는 피해자의 역사기도 하면서 가해자의 역사기도 하죠. 왜냐하면 아직 친일파들이 아직 청산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 앵 커: 그렇습니다.

◈ 김학주: 그래서 그렇기도 하지만 또 일본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의 입장이면서 양심적 지식인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 한 명 혹은 그와 연계된 장소를 하나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바로 목포 시민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신분 제 1회 목포 시민의상 수상자 바로 윤학자 여사입니다. 근데 이 분은 바로 일본인입니다.

■ 앵 커: 공생원~

◈ 김학주: 공생원 이야기를 당연히 해야되는데 잘 아실거예요. 1928년에 전도사 윤치호가 부모 잃은 아이들과 생활하는 곳이 공생원의 시작이 되고 그리고 일본인 여성 윤학자씨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분은 정명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고 일본인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 오게 되는데 나중에 공생원에서 봉사를 하면서 윤치호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죠. 근데 윤치호씨는 1951년에 행방불명이 되는데 그 이후로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아이들을 보살펴서 그런 것들을 ~

◉ 전영자: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치호라는 이름의 문학을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 분하고 동명이인이세요. 문학을 하는 윤치호는 아니시고,

■ 앵 커: 뭐 거지 대장으로도 불렸더분, 이 지역에서 정말 힘들게 살았던 시절에 거뒀다는거 아닙니까. 이 지역에 어렵게 사는 분들을 공생원에서

◈ 김학주: 가장 좀 기억에 남는게 이 분이 마지막 돌아가면서 했던말이 인상적인데 특별한 말이 아니라 ‘우메보시(매실 장아찌)’가 먹고싶다 이 말을 하셨다고 해요.

■ 앵 커: 매실~

◈ 김학주: 매실 절임 일본음식인데

◉ 전영자: 매실장아찌!

◈ 김학주: 그래서 일본 전 총리가 매화나무 20그루를 공수해서 거기 심기도 했고,

■ 앵 커: 지금도 그 따님하고 하고 계시잖아요?

◉ 전영자: 손녀!

■ 앵 커: 아~ 손녀가 지금은 공생원, 여전히! 그렇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라가 치욕을 당해도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나쁘진 않죠.

◈ 김학주: 그런분들이 계시죠.

■ 앵 커: 자~ 이렇게 오늘 3·1운동사 간략하게 좀 얘기를 해봤습니다만 목포에 그런 근대문화유산 참 많이 남아있고 그래서 오신 분들이 아 이런 흔적들이 목포에 있었구나 이걸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될점 마지막으로 한마디씩만 하고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 김학주: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일제강점기는 저희에게 피해자의 역사이면서 가해자의 역사이기도 해요. 문제는 이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은게 불안한 정치구조,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이런 것 때문인거고요. 일본도 전범들이 다시 정시에 등장하는 계기들이 그런 불안한 정치부조 속에서 되는데 저는 친일청산 없이는 나라를 다시 세울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친일청산을 해야되는데 그렇기 위해서라도 저희 국민들이 꼭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으면 줬겠다.

◉ 전영자: 말씀드린 것처럼 노비 해방은 인권을 되찾은 것이고 나라를 잃고 주인된 권리를 36년만에 되찾기 까지 저도,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받쳤다는거죠. 그래서 오늘 찬란한 오늘을 살아가는 그 분들의 목까지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가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나라를 생각하고 미래에 더 좋은 역사를 남겨주기 위해서 이번에 대선 선거때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목포 야행 축제 (사진출처 : 목포시청)목포 야행 축제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앵 커: 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에 김학주 연구위원이었고요. 특별게스트 전영자 문화관광해설사였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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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발 서해안 시대] 남도의 독립운동 발자취…정명여고 태극기 만세 운동
    • 입력 2022-03-01 11:54:33
    • 수정2022-03-01 11:58:06
    목포
[시사 지지고 볶고 : 전남의 독립운동]<br />- 1919년 3월 20일 목포에서 소규모 만세운동 이후 4월8일에 대규모 만세운동<br />- 일본의 수탈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대거 참여<br />- 완도 소안도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만 89명...섬 독립운동 이례적 평가<br />- 목포 근대거리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건물과 유물 등 보존....다크 투어리즘 통한 역사 교육<br />- 친일파 청산 등 과제 산적..."'역사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학교 역사 교육 늘려야"
■ 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프로그램명 : [출발! 서해안 시대]
■ 방송시간 : 3월 1일 (화) 08:30∼09:00 KBS목포 1R FM 105.9 MHz
■ 진행 : 정윤심 앵커
■ 출연 :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 연구위원, 전영자 목포문화관광해설사
■ 구성 : 신세미 작가
■ 기술 : 김유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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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다시 듣기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정윤심 아나운서 (이하 앵커): [시사 지지고 볶고] 오늘 이 지역의 3·1운동사 들여다 본다 이렇게 말씀 드렸는데요.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의 외침도 생각이 납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역사를 배우며 수없이 들었던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얘기를 했는데, 수없는 외세의 탄압에도 결코 이 나라를 지켜냈던 분들 순국선열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되는 날 아닌가 싶습니다. 이 지역에 독립운동사 살펴주실 두 분 함께 했는데요. 서남권 균형발전 연구소 김학주 연구위원, 안녕하십니까?

◈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 연구소 연구위원 (이하 김학주): 네, 안녕하십니까.

■ 앵 커: 그리고 특별게스트 한 분을 모셨습니다.~ 직접 좀 소개를 해주시죠?

◉ 전영자 목포시 문화관광해설사 (이하 전영자): 네, 목포를 맛깔나게 소개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자입니다.

김학주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 연구위원·전영자 목포문화관광해설사

■ 앵 커: 네, 문화관광해설사 전영자 선생님 오늘 이 지역에 문화관광 속에 들어있는 직접 적으로 외지 관광객들을 만나면서 이 지역의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소개해 주시는지 잠시 후에 들어보도록 하고요. 먼저 김학주 위원님 이 지역의 3·1운동사 간략히 정리해주시죠.

◈ 김학주: 잘 아시겠지만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 범민족 항일운동입니다. 근데 이제 이날은 서울과 평양 등 6개 지역에서 일어나고요. 이후 3개월 가량 전국에서 계속 시위운동이 일어납니다. 근데 사실 3개월이라고 하기도 좀 어려운거는 그 다음해 또 그 다음해 계속 이를 기념하는 시위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속 일어났다고 할 수도 있고요. 목포에서는 1919년 3월 20일 소규모 만세운동이 전개가 되고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거는 4월 8일입니다. 그리고 특징중에 하나는 일본의 수탈에 반대하는 상인들이 대거 참여 했다는 특징이 있고

■ 앵 커: 목포에서는 상인들이 참여를 했다.

◈ 김학주: 네, 그런 특징들도 하나가 있고, 이제 가장 주축이 됐던 세력들은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이런 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3·1 운동을 전개하는데 아무래도 기독교계 학교에 일제의 관심이 덜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좀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또 지역의 항일운동을 이야기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소안도에 토지소유권 반환 투쟁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 앵 커: 이 것도 유명하죠. 뉴스에 여러번 좀 소개되기도 했는데.

◈ 김학주: 그렇죠. 그래서 그 당시 상황으로 보면 이 토지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13년 동안 법정 싸움을 벌이는데 승소를 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 이례적인 승리라고 하는데 이 결과물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주민들은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못 배워서 나라를 잃은거 아닌가 그래서 돈을 모아가지고 사립 소안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모아진 돈이 454원 비행기 한 대값이라고 해요.

■ 앵 커: 배우자 이렇게 해서 학교를 세우자 라고 모아진돈!

◈ 김학주: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학교가 항일운동의 구심이 되는데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만 89명,

■ 앵 커: 완도 소안도 유명하죠.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탑 (사진출처:연합뉴스)

◈ 김학주: 그렇죠. 그리고 21명이 독립유공자 성혼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보면 학교가 참 중요한 역할들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참 배움이란게 중요하고 교육이란 것도 참 필요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고요. 그 밖에도 목포 같은 경우는 목포 부두노동 운동 그 다음 여기 인근 암태도 소작쟁이 운동, 광주 학생운동 이런 항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 앵 커: 그러니까 시기적으로 보면 목포가 딱 3월 1일날 일어날 수 없는게 4·8 만세운동이라 그래서 이 지역에서 정명여고, 정명여중·고학생들이 거의 매년 이런 만세운동에 기념을 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는데 늦어진게 4월 8일날 목포에서는 거국적으로 일어났다는 거잖아요?

◈ 김학주: 전국적으로 3월 1일 날은 전국 6개 도시 정도에서만 하게 되고 그게 계속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 앵 커: 통신 확산이 늦으니까 아무래도 한 달 정도 더 늦은 4월 8일에 있었는데 그 당시 참여했던 나이 연령대를 보면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이렇게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내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서 뛰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정말 다시한번 가슴 뭉클해져요.

◈ 김학주: 그렇죠. 그리고 그 이후 근현대사 속에서 민주화 운동도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했다는걸 보면 학생들이 이런 역학들을 상당히 많이 해 왔던게 사실이죠.

■ 앵 커: 거기에 이제 목포에는 정명 여학생들이 중심에서 많이 소개되는거죠?

◈ 김학주: 그렇습니다. 1919년 4월 8일 날 정명여학교를 비롯해서 영흥학교,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돼서 시가 행진을 시작하면서 4·8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요. 거기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학생들하고 졸업생들이 목포 형무소에 많이 수감 되고 그러다 보니까 학교가 임시 휴고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1920년~ 1922년까지는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게 되고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21년에 11월 14일 날 학생들이 또 다시 학교 정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몰래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는데 또 이때도 11명이 체포가 되고 최하 징역 6개월씩 수감을 하게 됩니다. 이후 목포에서는 항일독립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1924년에 시민들이 성금을 모으게 되는데요. 성금을 모아서 항일운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그게 남교동에 위치한 청년회관

◉ 전영자: 아~ 그렇게 만들어졌군요?

◈ 김학주: 예 그렇게 되고요. 이 곳이 나중에 여성운동, 청년운동, 신간회 운동 중심 역할을 하는겁니다.

■ 앵 커: 그렇게 역사가 이어지게 되네요.

◈ 김학주: 그리고 정명여중 사택이 있는데 지금은 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죠. 이 석조건물인데 1948년 2월에 이 곳을 보수하던 중 천장에서 자료들이 발견되죠. 그게 뭐냐면 학생들이 만세운동에서 사용했던 경문, 독립가 이런 것들이 발견되는데 그 당시 학생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소중한 자료가

■ 앵 커: 엄혹한 시절이라 정말 어디에 숨겨야 일본 순사들이 이걸 찾지 못할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여러 곳에서 귀한 흔적들이 나오는거 잖아요. 안중근 의사 얘기 했지만 그렇게 저격하고 나서 가슴에서 태극기 꺼내거든요. 그래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게 되는데 태극기가 참 중요해요. 보니까 목포에도 양동교회에서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었다. 그때 당시 이런 만드는 시설도 매우 열악했을텐데 그런 내용들이 기록이 있는거죠?

◈ 김학주: 정명여고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몰래 만들기도 했고요. 양동교회 교인들이 지역 청년들하고 함께 태극기를 몰래 만들었다.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에서 양동제일교회가 항일운동 사적지로 지적이 되고요. 아까 제가 정명여학교 선교사 사택 얘기를 했는데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를 말씀해 드리면 정명여고 교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는 길이 하나 있어요. 포장돼 있는 길이 근데 그 길 지하에 우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거기에 가서 봤는데 그 우물을 보려면 학교 급식실로 내려가서 지하에 출입문이 하나 있고 그 출입문을 열면 우물이 보존돼 있는데 이 우물이 뭐냐면 당시 거긴 조선인 마을이잖아요. 그래서 조선인 마을의 공동 우물인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시계가 없으니까 밥 짓는거를 어떻게 봤냐면 선교사 사택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면 아~ 밥지을 시간이 됐구나 해서 사람들이 거기서 물을 길러서 밥을 했던 이런 곳이예요. 근데 제가 참 놀랬던 거 중에 하나가 몇 년 전에 갔을 때 교장 선생님이 거기를 소개해 주셨는데 보통 공사 하면서 다 없앨거 아니에요. 근데 학교가 참 어떤 분의 생각인진 모르겠는데 길을 포장하면서도 그걸 그대로 보존하고

■ 앵 커: 우물을 남겨두고

◈ 김학주: 그 위로 길을 냈더라고요. 그래서 우물이 그대로 지금 남아있습니다.

◉ 전영자: 지금도 있어요?

◈ 김학주: 그래서 양동제일교회나 선교사 사택 이런걸 보면 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잘 지켜내야되지 않나 이런 생각들을 해보고 있습니다.

정명여고 만세운동 재현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앵 커: 오늘 전영자 해설사님 목포의 새로운 독립운동사의 흔적들을 배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목포 근대문화유산 관광하는 코스들이 있을거 아닙니까? 근대문화유산이 대부분이겠죠?

◉ 전영자: 그렇죠. 목포 구도심쪽 보면 동쪽으로는 조선인 마을이 있어서 그렇고, 남쪽 항구 쪽으로는 일본인 이라고 우리가 불리는데 개항장 쪽에는 아직도 많은 한 300여 채가 된다고 그래요. 당시 가옥들이 그 중에는 15개 정도가 문화재로 등재돼 있고요. 관광객들이 오셔서 많이 찾는 공간이 그 공간이잖아요.

■ 앵 커: 어디어디 공간을 주요적으로 안내해 주시나요?

◉ 전영자: 보통 오시면 근대역사 1관이라 해서 구 일본영사관, 그리고 근대역사 2관 하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그 두 곳을 많이 찾아요. 요즘에는 코로나 기간이라 그런지 관광객 동선도 많이 넓어져 가지고 더 넓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구 일본영사관은 전라남북도에 사는 일본인들을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1900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 당시를 목포지역에 보자면 맨 처음에 세워진 근대식 건물이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초가집하고 기와집 몇 채 있었겠죠?

■ 앵 커: 그때 당시에~

◉ 전영자: 근데 거기에 유리를 우리는 사용하지 않거든요. 우리 가옥에는 근데 유리가 있고 빨간 벽돌로 2층 건물이 세워졌다고 그러면 인근에 사는 섬에 사는 분들이 배 타고 구경도 왔을 법 한 그런 일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나서 그 앞으로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고 그러면서 석조건물 또 근대역사 2관 석조건물이거든요. 석조건물로 2층 건물이 생기고 그게 생기기까지는 국도 1호선이 완공되고 국도 2호선이 완공되고 그게 1907년까지

■ 앵 커: 국도 1, 2호선이 그때 당시에

◉ 전영자: 네네~ 그리고 나서 철도가 들어오거든요. 그 이후에 1920년대에 근대역사 2관인 구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져요. 그게 원래는 영산포에 있던게 목포로 내려옵니다. 그걸 세운 목적은 ‘일흑삼백’이라고 우리가 그러는데 쌀, 면화, 소금, 그리고 하나는 김인데 그것들을 수탈해가는 창구 역할을 했던거죠.

■ 앵 커: 일흑삼백!

◉ 전영자: 네, 일흑삼백입니다.

■ 앵 커: 목포에서 수탈하기 위한 도로나 철도가 놓아졌던거고 항구에서 배로 실어가기도 하고

◉ 전영자: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건물 안에 목포 근대사를 담아놓고 있죠. 근데 관광객들이 오셔서 묻는 말이 하나 있어요. 근대사가 뭐예요? 근대역사관이라 하는데 근대사가 뭐예요?

■ 앵 커: 아~ 근대사가?

◉ 전영자: 근대가 뭐냐 근대가! 근데 근대라고 하는 것은 개항되면서부터 해방까지의 기간을 말해요. 보통 강화도 조약부터 시작 얘기를 하죠. 강화도 조약부터 45년 해방까지 기간을 얘기 합니다.

■ 앵 커: 역사 공부를 해야되는 시간, 그런데 목포에서 이런 근대문화 유산들이 지금 한때는 목포지역에서 수치스럽다. 이거 없애야겠다 해서 꽤 많이 일부 안타깝지만 사라진 것도 있잖아요. 일제흔적, 일제 강점기 흔적들이

◉ 전영자: 많이 사라졌죠. 많이!

■ 앵 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이게 우리의 또 다른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배워야되는 역사다 라고 말을 하고 있는건데 이렇게 쭉 관광객들 모시고 안내하실거 아니에요. 어느 곳에서 제일 관광객들이 아~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힘든 독립 투쟁을 했구나 그 들이 그렇게 수탈을 많이 해갔구나, 역사의식이 가장 드러나는 흔적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것들이!

◉ 전영자: 건물도 그렇지만, 국도 1, 2호선 도로 원표가 있는 공간 있잖습니까.

■ 앵 커: 원도심에?

◉ 전영자: 네, 원도심

■ 앵 커: 원도심 어디에가 있죠? 위치가?

◉ 전영자: 바로 영사관 앞에 있습니다. 근데 그곳이 왜 그렇게 저한테는 가슴이 와 닿았냐면 호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을 다 잡아다가 한 2000여 명 되는데 거기다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놓은게 근대역사 1관에 있어요.

■ 앵 커: 아~ 원표를 배경으로 해서!

목포 근대역사 거리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전영자: 아뇨 그때는 원표가 없었죠. 원표가 세워지는 그 도로에 있는 그쪽입니다. 그래서 일본 영사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놓은게 있어요. 근데 그 분들이 사실은 우리가 노비해방이라고 그러죠. 미국에서는 노예해방이라고 그러고, 노예해방은 링컨을 말하는데 노비해방 같은 경우에는 누가 했냐 그러면 잘 얼른 대답하기 어렵잖아요. 갑오개혁~

■ 앵 커: 너무 멀리가지 마시고 우리지역으로 연결을~

◉ 전영자: 그 분들이 한거죠. 그 분들이 의병을 하신분들이, 갑오개혁을 한 다음에 10년 후에 다시 의병활동을 한거예요. 왜 그이야기를 하냐면 그때 우리 노비나, 공노비나, 사노비의 인권을 해방시킨 분들이 그 분들이 다시 나라를 찾기 위해서 또 거기서 의병으로 투쟁을 하다가 잡혀서 도로를 놓은거죠. 국도 2호선을, 국도 2호선을 놨던 분들이 그 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그 도로가 서면은 가슴 쿵쾅거리는 그런 현장이더라고요.

■ 앵 커: 김학주 위원님 조금 보충설명 해주실까요?

◈ 김학주: 저도 방금 처음 들었는데 국도 1, 2호선이 의병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참 저는 가슴이 뭉클하고요. 저도 사실은 근대문화 유산중에 기억에 남는게 좀 있는데 대표적으로 ‘동번원사 목포별원’은 한동안 교회로 쓰였거든요. 절 위에 십자가가 놓였던 이런 것들도 참 재미난 사연들이 있는 것 같고 저는 한편으로는 근대문화 유산이라고 하긴 그렇겠지만 좀 재미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오늘 새로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일제강점기는 저희한테는 피해자의 역사잖아요. 근데 이 시기는 피해자의 역사기도 하면서 가해자의 역사기도 하죠. 왜냐하면 아직 친일파들이 아직 청산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 앵 커: 그렇습니다.

◈ 김학주: 그래서 그렇기도 하지만 또 일본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의 입장이면서 양심적 지식인도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 한 명 혹은 그와 연계된 장소를 하나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바로 목포 시민의상을 처음으로 수상하신분 제 1회 목포 시민의상 수상자 바로 윤학자 여사입니다. 근데 이 분은 바로 일본인입니다.

■ 앵 커: 공생원~

◈ 김학주: 공생원 이야기를 당연히 해야되는데 잘 아실거예요. 1928년에 전도사 윤치호가 부모 잃은 아이들과 생활하는 곳이 공생원의 시작이 되고 그리고 일본인 여성 윤학자씨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분은 정명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을 했고 일본인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 오게 되는데 나중에 공생원에서 봉사를 하면서 윤치호에게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죠. 근데 윤치호씨는 1951년에 행방불명이 되는데 그 이후로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아이들을 보살펴서 그런 것들을 ~

◉ 전영자: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치호라는 이름의 문학을 하시는 분이 있어요. 그 분하고 동명이인이세요. 문학을 하는 윤치호는 아니시고,

■ 앵 커: 뭐 거지 대장으로도 불렸더분, 이 지역에서 정말 힘들게 살았던 시절에 거뒀다는거 아닙니까. 이 지역에 어렵게 사는 분들을 공생원에서

◈ 김학주: 가장 좀 기억에 남는게 이 분이 마지막 돌아가면서 했던말이 인상적인데 특별한 말이 아니라 ‘우메보시(매실 장아찌)’가 먹고싶다 이 말을 하셨다고 해요.

■ 앵 커: 매실~

◈ 김학주: 매실 절임 일본음식인데

◉ 전영자: 매실장아찌!

◈ 김학주: 그래서 일본 전 총리가 매화나무 20그루를 공수해서 거기 심기도 했고,

■ 앵 커: 지금도 그 따님하고 하고 계시잖아요?

◉ 전영자: 손녀!

■ 앵 커: 아~ 손녀가 지금은 공생원, 여전히! 그렇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나라가 치욕을 당해도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나쁘진 않죠.

◈ 김학주: 그런분들이 계시죠.

■ 앵 커: 자~ 이렇게 오늘 3·1운동사 간략하게 좀 얘기를 해봤습니다만 목포에 그런 근대문화유산 참 많이 남아있고 그래서 오신 분들이 아 이런 흔적들이 목포에 있었구나 이걸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될점 마지막으로 한마디씩만 하고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 김학주: 제가 아까 말씀드렸는데 일제강점기는 저희에게 피해자의 역사이면서 가해자의 역사이기도 해요. 문제는 이 친일파들이 청산되지 않은게 불안한 정치구조, 성숙하지 못한 민주주의 이런 것 때문인거고요. 일본도 전범들이 다시 정시에 등장하는 계기들이 그런 불안한 정치부조 속에서 되는데 저는 친일청산 없이는 나라를 다시 세울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친일청산을 해야되는데 그렇기 위해서라도 저희 국민들이 꼭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했으면 줬겠다.

◉ 전영자: 말씀드린 것처럼 노비 해방은 인권을 되찾은 것이고 나라를 잃고 주인된 권리를 36년만에 되찾기 까지 저도,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받쳤다는거죠. 그래서 오늘 찬란한 오늘을 살아가는 그 분들의 목까지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가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나라를 생각하고 미래에 더 좋은 역사를 남겨주기 위해서 이번에 대선 선거때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몫인 것 같습니다.

목포 야행 축제 (사진출처 : 목포시청)

■ 앵 커: 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서남권 균형발전연구소에 김학주 연구위원이었고요. 특별게스트 전영자 문화관광해설사였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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