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 출전 금지”…전쟁이 불러온 음악계 ‘국적 논쟁’

입력 2022.03.07 (17:01) 수정 2022.03.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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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참가자 배제하기로 한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러시아 참가자 배제하기로 한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러시아 연주자 참가 불가" 통보

러시아 피아니스트 로만 코지야코프는 올해 5월 17일부터 22일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리는 '제12회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콩쿠르를 위해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코지야코프는 콩쿠르 사무국 측으로부터 충격적인 이메일을 받습니다.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올해 러시아 참가자를 받을 수 없다"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사무국은 메일에서 "문화의 힘으로 전 세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참가비용은 전액 환불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코지야코프가 공개한 이메일코지야코프가 공개한 이메일

■러시아 참가자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의 정상급 음악가들이 잇따라 러시아를 규탄하는 입장을 밝혔지만, 10대에서 20대의 어린 음악가들이 참가하는 콩쿠르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입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한 끝에 출전권을 따낸 참가자들에게 단지 그들의 국적을 이유로 직접적인 불이익을 주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코지야코프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슬프다"면서 "이 같은 결정은 매우 불공평하며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WFIMC 의장 피터 폴 카인라스(Peter Paul Kainrath)WFIMC 의장 피터 폴 카인라스(Peter Paul Kainrath)

■WFIMC "국적만으로 자국 정부 대표한다고 볼 수 없어"

음악계는 술렁였습니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관리·감독하고 있는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 World Federation of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s)은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끔찍한 전쟁에 강력히 반대한다"면서도 "정부의 지원을 받고 활동하며 정부의 이념을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큰 부담을 감수하고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는 연주자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러시아와 벨라루스 음악가들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더블린 콩쿠르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콩쿠르의 그 어떤 참가자도 자신의 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단지 국적만으로 자신의 정부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간주되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더블린 콩쿠르 사례와 같이 러시아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린 겁니다.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자국 정부 대표하지 않아"

관심은 올해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리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쏠렸습니다. 올해 콩쿠르 가운데 규모와 화제성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뿐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가 결정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특히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한 '스크리닝 오디션'이 3월 6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고, 72명의 참가자 가운데 15명이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콩쿠르 사무국이 당장 입장을 밝혀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사무국은 입장문을 통해 "이번 콩쿠르에 참가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은 자국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정리했습니다. 사무국은 참가자들의 의견도 함께 공개했습니다. 입장문에 따르면 한 참가자는 "냉전 시기에 반 클라이번이 가져온 평화에 대한 희망이 모든 음악가에게 훌륭한 예시가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1958년, 소련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창설한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우승하며 파란을 일으키고, 음악을 통해 전 세계적인 정치적 긴장이 잠시나마 해소됐던 통쾌한 역사를 상기한 겁니다. 사무국은 "모든 참가자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고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올해 지역 예선 시작하는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올해 지역 예선 시작하는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부소니 콩쿠르 "국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을 것"

지난해 박재홍, 김도현이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올해 예정된 예심에서 국적을 기준으로 한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무국은 "70년이 넘은 부소니 콩쿠르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를 포함한 모든 국적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부소니 콩쿠르에 참여하기를 강력히 권유한다"고 밝혔습니다.

■꺼지지 않은 '러시아 배제' 논쟁...전쟁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

더블린 콩쿠르가 촉발한 '러시아 참가자 배제' 논란은 일단 다른 콩쿠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은 국적을 초월한 평화를 지향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을 규탄하는 목적이라도 특정 참가자를 배제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여전히 복수의 콩쿠르 측에서 러시아 출신 연주자의 참가를 막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전쟁에 대한 규탄 성명을 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다 직접적인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됩니다. 물론 그 메시지로 인한 피해는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애꿎은 어린 연주자들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됐습니다. 전쟁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엉뚱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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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인 출전 금지”…전쟁이 불러온 음악계 ‘국적 논쟁’
    • 입력 2022-03-07 17:01:20
    • 수정2022-03-07 17:01:55
    취재K
러시아 참가자 배제하기로 한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러시아 연주자 참가 불가" 통보

러시아 피아니스트 로만 코지야코프는 올해 5월 17일부터 22일까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리는 '제12회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할 예정이었습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콩쿠르를 위해 한창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코지야코프는 콩쿠르 사무국 측으로부터 충격적인 이메일을 받습니다.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올해 러시아 참가자를 받을 수 없다"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사무국은 메일에서 "문화의 힘으로 전 세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참가비용은 전액 환불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코지야코프가 공개한 이메일
■러시아 참가자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의 정상급 음악가들이 잇따라 러시아를 규탄하는 입장을 밝혔지만, 10대에서 20대의 어린 음악가들이 참가하는 콩쿠르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한 것은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입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한 끝에 출전권을 따낸 참가자들에게 단지 그들의 국적을 이유로 직접적인 불이익을 주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코지야코프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슬프다"면서 "이 같은 결정은 매우 불공평하며 이것이 차별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WFIMC 의장 피터 폴 카인라스(Peter Paul Kainrath)
■WFIMC "국적만으로 자국 정부 대표한다고 볼 수 없어"

음악계는 술렁였습니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를 관리·감독하고 있는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 World Federation of International Music Competitions)은 즉각 성명을 발표하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한 끔찍한 전쟁에 강력히 반대한다"면서도 "정부의 지원을 받고 활동하며 정부의 이념을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큰 부담을 감수하고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는 연주자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러시아와 벨라루스 음악가들을 고립시키고 있다"고 더블린 콩쿠르의 결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콩쿠르의 그 어떤 참가자도 자신의 정부를 대표하지 않으며 단지 국적만으로 자신의 정부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다고 간주되어서도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더블린 콩쿠르 사례와 같이 러시아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린 겁니다.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한 반 클라이번
■반 클라이번 콩쿠르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자국 정부 대표하지 않아"

관심은 올해 6월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열리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쏠렸습니다. 올해 콩쿠르 가운데 규모와 화제성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뿐 아니라 전 세계 음악계가 결정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특히 참가 자격을 얻기 위한 '스크리닝 오디션'이 3월 6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되고, 72명의 참가자 가운데 15명이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콩쿠르 사무국이 당장 입장을 밝혀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사무국은 입장문을 통해 "이번 콩쿠르에 참가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은 자국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정리했습니다. 사무국은 참가자들의 의견도 함께 공개했습니다. 입장문에 따르면 한 참가자는 "냉전 시기에 반 클라이번이 가져온 평화에 대한 희망이 모든 음악가에게 훌륭한 예시가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미소 냉전이 첨예했던 1958년, 소련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창설한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우승하며 파란을 일으키고, 음악을 통해 전 세계적인 정치적 긴장이 잠시나마 해소됐던 통쾌한 역사를 상기한 겁니다. 사무국은 "모든 참가자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고대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올해 지역 예선 시작하는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부소니 콩쿠르 "국적 기준으로 차별하지 않을 것"

지난해 박재홍, 김도현이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해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도 올해 예정된 예심에서 국적을 기준으로 한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무국은 "70년이 넘은 부소니 콩쿠르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를 포함한 모든 국적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부소니 콩쿠르에 참여하기를 강력히 권유한다"고 밝혔습니다.

■꺼지지 않은 '러시아 배제' 논쟁...전쟁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

더블린 콩쿠르가 촉발한 '러시아 참가자 배제' 논란은 일단 다른 콩쿠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음악은 국적을 초월한 평화를 지향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전쟁을 규탄하는 목적이라도 특정 참가자를 배제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여전히 복수의 콩쿠르 측에서 러시아 출신 연주자의 참가를 막는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전쟁에 대한 규탄 성명을 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다 직접적인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됩니다. 물론 그 메시지로 인한 피해는 러시아 정부가 아니라 애꿎은 어린 연주자들이 감당해야 할 짐이 됐습니다. 전쟁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엉뚱한 비극을 초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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