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푸틴이 쏘아올린 물가폭탄은 변화구였다”

입력 2022.03.16 (10:30) 수정 2022.03.1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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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66년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곳간이 거덜난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며 '당백전'을 발행했다. 기존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가 있다고 해서 '호대당백(戶大當百)'이란 문자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실제 함유된 구리의 양은 상평통보의 10배도 되지 않았다.

(화폐유통속도가 일정한데) 화폐가 더 발행되면 화폐가치는 추락한다. 예외는 없다. 수천 년 동안 그래서 금이나 은으로 화폐를 만들었다. 물가가 치솟고 당백전을 쓸수록 손해를 본다. 시장 상인들은 금세 나쁜 화폐, 악화(惡貨)를 알아차린다. 좋은 화폐 양화(良貨)는 집에 잘 모셔두고, 시장에선 액면가 높은 당백전만 사용한다. 이렇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쫓아낸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의 문제'라고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선생이 말하지 않았던가. 고종이 화폐방정식을 알았더라면... 당백전은 2년 만에 폐기됐다. '땡전 한푼 없다'는 말도 이 당백전에서 유래했다

2. 1973년

닉슨이 금 태환을 중단했다. 이제 곳간에 금을 쌓아두지 않고도 얼마든지 달러를 찍어낼 수 있다. 마침 베트남전에는 구멍난 독처럼 재정이 들어갔다. 달러 인쇄기가 끝없이 돌아가고 기축통화 달러가 휘청한다.

그 무렵 중동전쟁이 터졌다. 미국이 주저없이 이스라엘 편에 서자, 중동국가들은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기름값이 치솟았다. '진주만이 이번에는 에너지로 공습당했다'.

주유소에는 차량들이 줄을 이었다. 기름값 폭등으로 쇼핑몰이 문을 닫고, 두꺼운 스웨터 판매가 급증했다. 정부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점등을 말리면서 컴컴한 성탄절이 찾아왔다. 당황한 연준(Fed)은 물가지수에서 기름값을 빼고 싶어했다.


경기가 계속 오그라드는데, 이상하게 물가는 계속 올랐다. 이듬해인 74년, 미국 등 주요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물가는 10% 이상 뛰어 올랐다. 경기침체 속 물가상승... 시장경제는 그렇게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만났다.

이제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수도 없고,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할 수도 없다. 스태그플레이션에 경제학적 처방전은 없다. 그렇게 미국 경제는 오랜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1973년 12월 뉴욕의 한 주유소, 차량들이 사방에서 줄지어 기름 공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AP1973년 12월 뉴욕의 한 주유소, 차량들이 사방에서 줄지어 기름 공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AP

3. 2022년


1)미국의 파워가 자꾸 쪼그라들고 2)그래서 서방국가들이 같은 편을 먹고 3) 거대 산유국의 원유 수출길이 막힌 것까지 똑같다. 그런데 4)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풀렸고 5)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지난 겨울 4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물가 폭등에 기름을 부었다. '화폐의 범람'과 '공급대란'에 '전쟁'까지, 이번엔 3종세트다. 글로벌 물가가 치솟는다. 알고보니 러시아는 세계 3위 산유국이다.

기름값이 오르면 차나 비행기, 배로 옮기는 모든 것의 가격이 오른다. 방울토마토나 붕어빵 가격까지 오른다(죄다 기름 때서 만든다). 그렇게 오른 물가가 전방위로 번진다. 2월 미국의 임대료는 한달새 또 0.6%나 올랐다. 1999년 이후 최대치다. 미국의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같은 달보다 7.9% 급등했다. 지난 1월 세운 40년 만의 최대폭 상승 기록을 한 달 만에 갈아치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곡물 수출도 많이 한다. 전세계 식료품 가격을 끌어올린다. 일본이나 호주는 물론이고 전쟁과 별 상관도 없는 저 멀리 이집트의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10%나 급등했다(이집트 국가통계청 CAPMAS). 방콕 식당가에선 자꾸 새우와 돼지고기가 줄어든다. 곡물가격이 치솟아 동물원 사료를 줄인다는 말이 나온다.

4. From Ruble To Rubble (돌무더기가 된 루블화)


러시아 정부는 침공 하루 전 루블화를 10억 달러나 사들였다(포브스). 필사적으로 루블화 가치를 사수했지만, 4시간도 안돼 루블화 가치는 30%나 폭락했다. 그럼 이제 러시아 사람들은 뭐든 그만큼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해야 한다.

물가폭탄은 러시아에서도 터졌다. 공격 개시 일주일 만에 신차 가격은 17%나 올랐다. TV세트는 15%나 급등했다(나라간 달러 결제도 막혔는데 이제 중국산 TV만 보란 말인가). 국산 브랜드 승용차 '라다'는 생산을 멈췄고, 시내 커피숍은 거의 매주 가격을 다시 써붙인다.

의약품과 채소가격도 치솟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러시아의 올해 인플레이션이 20%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가 돌고 돌아, 다시 서방세계 국민들을 때리고 있지만, 제일 힘든 건 역시 러시아 국민들이다. 이제 곧 디폴트가 현실이 되면 루블화 가치는 더 떨어지고, 물가는 더 치솟을 것이다(중국 상인이라고 제값에 팔겠는가?) 푸틴은 계속 안녕할 수 있을까.

루블화(ruble)에 'b'하나를 더하면 rubble(돌무더기, 폐허)이 된다. b는 흔히 폭탄(bomb)의 약자다.


현금 인출기 순서를 기다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 사진 로이터현금 인출기 순서를 기다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 사진 로이터

5. 푸틴과 바이든 누가 쓰러질 것인가

건강하기로 소문난 러시아의 독재자는 오늘도 민가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급한건 바이든이다. 11월에 중간선거가 다가온다. 인플레이션은 사실 세금이다. 국민의 지갑을 갉아 먹는다. 이제 미국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한 '지구 보안관의 기회 비용'과 '가벼워진 내 지갑'을 비교할 것이다.

며칠전 이코노미스트 조사에서 '미국인의 66%는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한 경제제재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당신 지갑이 그만큼 가벼워 지는데도요?" 라고 물으면 결과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일 "지금의 물가 상승이 러시아의 독재자 탓"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기름값은 여전히 치솟고 있다. 미국인들은 기름값이 푸틴 때문에 올랐다고 믿을까, 바이든 때문에 올랐다고 믿을까.


급등한 기름값이  표시된 한 주유소의 주유기 옆에 화가난 시민들이 붙인 스티커. 바이든이 “내가 해냈어! (I did that!)”라고 외친다. 사진 SNS급등한 기름값이 표시된 한 주유소의 주유기 옆에 화가난 시민들이 붙인 스티커. 바이든이 “내가 해냈어! (I did that!)”라고 외친다. 사진 SNS

(연준(Fed)은 3월 16일 FOMC를 열고 드디어(?) 기준 금리를 올린다. 연준은 1년에 FOMC(연방공개 시장위원회)를 8번 개최하는데, 이번 회의를 포함해 남은 7번 모두 기준 금리를 올릴 태세다. 불이 난지 1년이 넘었고 이제 활활 타들어가는데 이제야 소방차가 도착했다. 그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바이든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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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푸틴이 쏘아올린 물가폭탄은 변화구였다”
    • 입력 2022-03-16 10:30:04
    • 수정2022-03-16 11:08:22
    특파원 리포트

1. 1866년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곳간이 거덜난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겠다며 '당백전'을 발행했다. 기존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가 있다고 해서 '호대당백(戶大當百)'이란 문자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실제 함유된 구리의 양은 상평통보의 10배도 되지 않았다.

(화폐유통속도가 일정한데) 화폐가 더 발행되면 화폐가치는 추락한다. 예외는 없다. 수천 년 동안 그래서 금이나 은으로 화폐를 만들었다. 물가가 치솟고 당백전을 쓸수록 손해를 본다. 시장 상인들은 금세 나쁜 화폐, 악화(惡貨)를 알아차린다. 좋은 화폐 양화(良貨)는 집에 잘 모셔두고, 시장에선 액면가 높은 당백전만 사용한다. 이렇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쫓아낸다)'.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의 문제'라고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선생이 말하지 않았던가. 고종이 화폐방정식을 알았더라면... 당백전은 2년 만에 폐기됐다. '땡전 한푼 없다'는 말도 이 당백전에서 유래했다

2. 1973년

닉슨이 금 태환을 중단했다. 이제 곳간에 금을 쌓아두지 않고도 얼마든지 달러를 찍어낼 수 있다. 마침 베트남전에는 구멍난 독처럼 재정이 들어갔다. 달러 인쇄기가 끝없이 돌아가고 기축통화 달러가 휘청한다.

그 무렵 중동전쟁이 터졌다. 미국이 주저없이 이스라엘 편에 서자, 중동국가들은 원유 수출을 중단했다.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기름값이 치솟았다. '진주만이 이번에는 에너지로 공습당했다'.

주유소에는 차량들이 줄을 이었다. 기름값 폭등으로 쇼핑몰이 문을 닫고, 두꺼운 스웨터 판매가 급증했다. 정부가 크리스마스 트리의 점등을 말리면서 컴컴한 성탄절이 찾아왔다. 당황한 연준(Fed)은 물가지수에서 기름값을 빼고 싶어했다.


경기가 계속 오그라드는데, 이상하게 물가는 계속 올랐다. 이듬해인 74년, 미국 등 주요국가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물가는 10% 이상 뛰어 올랐다. 경기침체 속 물가상승... 시장경제는 그렇게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만났다.

이제 금리를 내려 경기를 부양할 수도 없고,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할 수도 없다. 스태그플레이션에 경제학적 처방전은 없다. 그렇게 미국 경제는 오랜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1973년 12월 뉴욕의 한 주유소, 차량들이 사방에서 줄지어 기름 공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AP
3. 2022년


1)미국의 파워가 자꾸 쪼그라들고 2)그래서 서방국가들이 같은 편을 먹고 3) 거대 산유국의 원유 수출길이 막힌 것까지 똑같다. 그런데 4)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풀렸고 5)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이미 지난 겨울 40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물가 폭등에 기름을 부었다. '화폐의 범람'과 '공급대란'에 '전쟁'까지, 이번엔 3종세트다. 글로벌 물가가 치솟는다. 알고보니 러시아는 세계 3위 산유국이다.

기름값이 오르면 차나 비행기, 배로 옮기는 모든 것의 가격이 오른다. 방울토마토나 붕어빵 가격까지 오른다(죄다 기름 때서 만든다). 그렇게 오른 물가가 전방위로 번진다. 2월 미국의 임대료는 한달새 또 0.6%나 올랐다. 1999년 이후 최대치다. 미국의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같은 달보다 7.9% 급등했다. 지난 1월 세운 40년 만의 최대폭 상승 기록을 한 달 만에 갈아치웠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곡물 수출도 많이 한다. 전세계 식료품 가격을 끌어올린다. 일본이나 호주는 물론이고 전쟁과 별 상관도 없는 저 멀리 이집트의 소비자물가가 전년 대비 10%나 급등했다(이집트 국가통계청 CAPMAS). 방콕 식당가에선 자꾸 새우와 돼지고기가 줄어든다. 곡물가격이 치솟아 동물원 사료를 줄인다는 말이 나온다.

4. From Ruble To Rubble (돌무더기가 된 루블화)


러시아 정부는 침공 하루 전 루블화를 10억 달러나 사들였다(포브스). 필사적으로 루블화 가치를 사수했지만, 4시간도 안돼 루블화 가치는 30%나 폭락했다. 그럼 이제 러시아 사람들은 뭐든 그만큼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해야 한다.

물가폭탄은 러시아에서도 터졌다. 공격 개시 일주일 만에 신차 가격은 17%나 올랐다. TV세트는 15%나 급등했다(나라간 달러 결제도 막혔는데 이제 중국산 TV만 보란 말인가). 국산 브랜드 승용차 '라다'는 생산을 멈췄고, 시내 커피숍은 거의 매주 가격을 다시 써붙인다.

의약품과 채소가격도 치솟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러시아의 올해 인플레이션이 20%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가 돌고 돌아, 다시 서방세계 국민들을 때리고 있지만, 제일 힘든 건 역시 러시아 국민들이다. 이제 곧 디폴트가 현실이 되면 루블화 가치는 더 떨어지고, 물가는 더 치솟을 것이다(중국 상인이라고 제값에 팔겠는가?) 푸틴은 계속 안녕할 수 있을까.

루블화(ruble)에 'b'하나를 더하면 rubble(돌무더기, 폐허)이 된다. b는 흔히 폭탄(bomb)의 약자다.


현금 인출기 순서를 기다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 사진 로이터
5. 푸틴과 바이든 누가 쓰러질 것인가

건강하기로 소문난 러시아의 독재자는 오늘도 민가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급한건 바이든이다. 11월에 중간선거가 다가온다. 인플레이션은 사실 세금이다. 국민의 지갑을 갉아 먹는다. 이제 미국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한 '지구 보안관의 기회 비용'과 '가벼워진 내 지갑'을 비교할 것이다.

며칠전 이코노미스트 조사에서 '미국인의 66%는 러시아를 응징하기 위한 경제제재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당신 지갑이 그만큼 가벼워 지는데도요?" 라고 물으면 결과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일 "지금의 물가 상승이 러시아의 독재자 탓"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기름값은 여전히 치솟고 있다. 미국인들은 기름값이 푸틴 때문에 올랐다고 믿을까, 바이든 때문에 올랐다고 믿을까.


급등한 기름값이  표시된 한 주유소의 주유기 옆에 화가난 시민들이 붙인 스티커. 바이든이 “내가 해냈어! (I did that!)”라고 외친다. 사진 SNS
(연준(Fed)은 3월 16일 FOMC를 열고 드디어(?) 기준 금리를 올린다. 연준은 1년에 FOMC(연방공개 시장위원회)를 8번 개최하는데, 이번 회의를 포함해 남은 7번 모두 기준 금리를 올릴 태세다. 불이 난지 1년이 넘었고 이제 활활 타들어가는데 이제야 소방차가 도착했다. 그들은 11월 중간선거에서 바이든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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