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1개 36개로 쪼개고 ‘유령 직원’까지…이유는?

입력 2022.03.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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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의 한 아웃렛에서 일하던 A씨는 어느 날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연말정산 서류에 서명을 하러 갔는데, 저희 부서 안에서 저랑 제 사수님이랑 사업자가 달랐고요. 제 옆에 있는 분이랑 달랐고 다 달랐어요. 어디 사업자의 누구 누구가 있고, 어디 사업자의 누구 누구가 있고… 이렇게 한두 페이지가 이렇게 꽉 차더라고요."

같은 공간,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각각 다른 사업장에 속해있었습니다. 한 사무실에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A씨의 사업장에 A씨 홀로 속해있었다는 겁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습니다.

"빨간 날은 무조건, 공휴일 같은 때는 무조건 다 나온다고 보면 되고요. 휴일이나 연장수당은 일절 없었습니다."

쉬는 날 할 것 없이 일했지만, 각종 수당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 사업장 쪼개고, ‘유령 직원’ 만들고…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직원 420여 명을 거느린 이 아웃렛이 사업장을 '5인 미만'으로 운영해온 사실이 적발됐습니다.


이 아웃렛은 하나의 회사를 36개로 쪼갰습니다. 실질적인 사업주는 회장 한 명이지만, 회장의 딸과 사위 등 친인척들을 사업주로 내세워 사업장을 수십 개로 나눈 겁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용부 조사 결과 이 아웃렛이 직원 420여 명 중 170여 명을 사업소득자, 그러니까 프리랜서로 계약해왔다는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170여 명의 직원이 '유령 직원'이 된 겁니다.

이 아웃렛의 한식 뷔페에서는 10여 명이 함께 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5인 미만'이었습니다. 한식 뷔페에서 일한 서 모 씨는 이 사실을 알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상주하는 인원이 8명은 됐죠. 여덟 명, 열 명. 저희들을 좀 바보같이 안다고 그래야 하나? 그러니까 뻔히 아는 사실이고 ,누구나가 다 인지할 수 있는 거예요. 말할 때는 '우리 직원들 삼백 명이다' 하는데…"

이렇게 사업장을 수십 개로 쪼개고, 직원들이 '유령 직원'이 되며 각각의 사업장은 '5인 미만'이 됐습니다.

비단 이 아웃렛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고용부가 총 72개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감독을 벌인 결과, 8곳에서 이 같은 '사업장 쪼개기'를 적발했습니다.

한 파티‧행사용품 판매점 역시 하나의 사업장을 두 개로 쪼갰습니다. 사업주는 사실상 대표 한 명인데, 남동생의 명의로 별도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겁니다.

이 업체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운영을 해왔을까요?

■ 근로기준법 피해 가는 ‘5인 미만 사업장’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

근로기준법 제11조는 위와 같이 적용 범위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대부분을 적용받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휴일수당, 야간수당을 포함한 각종 수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생리휴가와 연차휴가, 주52시간제 역시 적용받지 않습니다. 대체공휴일법, 중대재해처벌법, 직장내괴롭힘금지 조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다 보니 각종 수법으로 사업장을 ‘5인 미만’으로 만들어 규제를 피해 가려는 사 측의 꼼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상시 직원이 5명이 넘는 사업장임에도 서류상 '5인 미만'으로 만들어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하는 겁니다.

A씨와 서씨가 400여 명이 일하는 아웃렛에서 일하면서도 각종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각종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 아웃렛이 직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체불 금품은 5억 원에 달했습니다.

■ '사각지대'된 5인 미만 사업장...대책은?

5인 미만 사업장이 법의 사각지대가 되다 보니,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을 만들어 규제를 피하려는 업체들이 꾸준히 고발되고 있습니다. 한 시민단체가 2년 동안 고발한 업체만 110여 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꼼수를 막을 수 있을까요? 사업장의 규모를 기준으로 적용하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시민단체 권리찾기유니온의 하은성 노무사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규모와 관계없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종사자 수로 근로기준법을 차별 적용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업장을 쪼개거나 노동자를 사업자로 위장하는 등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고…"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이미 여야 의원들에 의해 발의돼 있습니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근로 조건 보호를 위해 근로기준법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영업에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영세사업자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논의에 진전이 있을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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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 1개 36개로 쪼개고 ‘유령 직원’까지…이유는?
    • 입력 2022-03-24 18:09:58
    취재K

경기도 평택의 한 아웃렛에서 일하던 A씨는 어느 날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연말정산 서류에 서명을 하러 갔는데, 저희 부서 안에서 저랑 제 사수님이랑 사업자가 달랐고요. 제 옆에 있는 분이랑 달랐고 다 달랐어요. 어디 사업자의 누구 누구가 있고, 어디 사업자의 누구 누구가 있고… 이렇게 한두 페이지가 이렇게 꽉 차더라고요."

같은 공간,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각각 다른 사업장에 속해있었습니다. 한 사무실에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A씨의 사업장에 A씨 홀로 속해있었다는 겁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습니다.

"빨간 날은 무조건, 공휴일 같은 때는 무조건 다 나온다고 보면 되고요. 휴일이나 연장수당은 일절 없었습니다."

쉬는 날 할 것 없이 일했지만, 각종 수당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요?

■ 사업장 쪼개고, ‘유령 직원’ 만들고…

고용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직원 420여 명을 거느린 이 아웃렛이 사업장을 '5인 미만'으로 운영해온 사실이 적발됐습니다.


이 아웃렛은 하나의 회사를 36개로 쪼갰습니다. 실질적인 사업주는 회장 한 명이지만, 회장의 딸과 사위 등 친인척들을 사업주로 내세워 사업장을 수십 개로 나눈 겁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고용부 조사 결과 이 아웃렛이 직원 420여 명 중 170여 명을 사업소득자, 그러니까 프리랜서로 계약해왔다는 사실이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170여 명의 직원이 '유령 직원'이 된 겁니다.

이 아웃렛의 한식 뷔페에서는 10여 명이 함께 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5인 미만'이었습니다. 한식 뷔페에서 일한 서 모 씨는 이 사실을 알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상주하는 인원이 8명은 됐죠. 여덟 명, 열 명. 저희들을 좀 바보같이 안다고 그래야 하나? 그러니까 뻔히 아는 사실이고 ,누구나가 다 인지할 수 있는 거예요. 말할 때는 '우리 직원들 삼백 명이다' 하는데…"

이렇게 사업장을 수십 개로 쪼개고, 직원들이 '유령 직원'이 되며 각각의 사업장은 '5인 미만'이 됐습니다.

비단 이 아웃렛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고용부가 총 72개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감독을 벌인 결과, 8곳에서 이 같은 '사업장 쪼개기'를 적발했습니다.

한 파티‧행사용품 판매점 역시 하나의 사업장을 두 개로 쪼갰습니다. 사업주는 사실상 대표 한 명인데, 남동생의 명의로 별도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겁니다.

이 업체들은 왜 이런 방식으로 운영을 해왔을까요?

■ 근로기준법 피해 가는 ‘5인 미만 사업장’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

근로기준법 제11조는 위와 같이 적용 범위를 정해두고 있습니다.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 대부분을 적용받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휴일수당, 야간수당을 포함한 각종 수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생리휴가와 연차휴가, 주52시간제 역시 적용받지 않습니다. 대체공휴일법, 중대재해처벌법, 직장내괴롭힘금지 조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다 보니 각종 수법으로 사업장을 ‘5인 미만’으로 만들어 규제를 피해 가려는 사 측의 꼼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상시 직원이 5명이 넘는 사업장임에도 서류상 '5인 미만'으로 만들어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하는 겁니다.

A씨와 서씨가 400여 명이 일하는 아웃렛에서 일하면서도 각종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각종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 아웃렛이 직원들에게 지급해야 할 체불 금품은 5억 원에 달했습니다.

■ '사각지대'된 5인 미만 사업장...대책은?

5인 미만 사업장이 법의 사각지대가 되다 보니,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을 만들어 규제를 피하려는 업체들이 꾸준히 고발되고 있습니다. 한 시민단체가 2년 동안 고발한 업체만 110여 개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꼼수를 막을 수 있을까요? 사업장의 규모를 기준으로 적용하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시민단체 권리찾기유니온의 하은성 노무사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규모와 관계없이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종사자 수로 근로기준법을 차별 적용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업장을 쪼개거나 노동자를 사업자로 위장하는 등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고…"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이미 여야 의원들에 의해 발의돼 있습니다.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의 근로 조건 보호를 위해 근로기준법 적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기본적으로 공감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코로나19로 영업에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와 영세사업자들의 반발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논의에 진전이 있을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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