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권력의 상징 공간’ 청와대 영욕의 74년

입력 2022.03.27 (08:00) 수정 2022.03.27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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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이래 청와대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관저의 명칭을 넘어, 당대의 정치 권력과 역사의식, 시대정신이 공간에 구현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2022년 윤석열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적 장소로서 청와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입니다.

74년간 영욕의 정치사가 펼쳐진 청와대의 변화상은 KBS 아카이브에 영상으로 보관돼 왔습니다.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2022년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청와대의 변화에 담긴 시대상을 영상으로 정리했습니다.

■ '식민통치의 유산'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

최초의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8월 조선총독부가 총독 관저로 세웠습니다. 3명의 총독이 사용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 사령관 관사로 사용됐습니다. 경무대가 대통령 관저가 된 것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의 일입니다.

미 군정 하지 장관이 군정 이양 과정에서 이 대통령에게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넘기겠다고 제안하자, 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입주 시기도 늦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선출돼 24일에 취임했지만, 한달 뒤인 8월 22일에야 경무대로 입주했습니다.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부터 이 지역의 명칭이었습니다.

경복궁 뒤 소나무 숲이던 이 곳에서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이나 궁술대회가 열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소풍이나 각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조선 총독 관저가 세워진 이후에도 기존의 용산 관저와 구분해 경무대 관저로 불렸습니다.

조선 총독 관저를 경복궁 뒤편에 지은 것은 식민통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왕조의 왕도정치 이상에 따라 배치된 경복궁을 훼손해 조선총독부를 짓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을 훼손해 총독 관저를 지었습니다. 앞서 대한제국은 당시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중심으로 일반 국민의 생활공간과 좀더 가까운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을 계획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식민 통치의 공간 배치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된 경무대는 봄꽃철에 정원을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줄 지어선 시민과 학생들이 정원과 연못을 구경하고 이 대통령 부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1955년 시작된 개방 행사는 4, 5월에 사흘 가량 진행됐고,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 열렸습니다.


■ '독재 청산'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변경

경무대를 청와대로 명칭을 바꾼 건 2대 윤보선 대통령입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위대는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경무대 앞에서 투석전이 벌어졌고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습니다. 유혈 진압으로 경무대 앞을 포함해 전국에서 180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취임 후 넉달 만인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꾸겠다고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경무대라는 이름이 "1인 독재 시절 연상시킨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청와대(靑瓦臺)라는 이름은 건물의 푸른 기와에서 따온 것으로 "평범하고 평화적인 명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윤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습니다. 1962년 3월 22일 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하야를 발표하고, 즉각 청와대를 떠났습니다. 국가최고회의가 하야를 공식 의결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습니다.

■ 15년 11개월 거주한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서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 청와대 관저에 입주해 1979년 10.26으로 운구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15년 11개월간 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을 사용한 기간은 이보다 8개월 더 깁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 대행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외교사절을 접견한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재임 기간, 청와대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뒤편 북한산과 자하문을 통해 북한 무장공비가 습격했습니다. 생포된 간첩 김신조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을 암살할 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1.21 사태를 계기로 청와대 인근의 경호가 대폭 강화됐습니다. 청와대 앞길과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길의 일반인 출입이 반세기 가량 금지됐습니다.

청와대 안에서 두 번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살된 육영수 여사의 빈소가 청와대 안에 차려졌고, 박 대통령은 1979년 청와대 경내에 있는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됐습니다.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안전가옥으로, 권위주의 시대 밀실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시기 청와대 경내에 새로 지어진 건물도 있습니다. 1978년 12월 준공된 영빈관은 외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할 때 쓰는 건물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건축양식에 한식을 절충한 건물로, 화려한 샹들리에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꾸몄습니다. 영빈관에서 열린 첫 공식행사는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 경축연회였습니다.

뒤이은 최규하 10대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청와대에서 머문 시간이 가장 짧았습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인 1980년 8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최 대통령은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도 10개월 정도 청와대에 머물렀습니다. 최 대통령은 취임 초기 관저 개보수를 위해 기존 총리 관저에서 79일간 청와대 집무실로 출퇴근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는 청와대의 변화상이 별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경내 유일한 한옥인 상춘재는 1984년 세워졌는데, 공개된 준공 행사를 열지 않았습니다.

1993년 청와대 구 본관(옛 경무대) 건물 철거 모습. 반세기에 걸쳐 조선 총독 3명, 주한 미군 사령관,  대통령 6명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1993년 청와대 구 본관(옛 경무대) 건물 철거 모습. 반세기에 걸쳐 조선 총독 3명, 주한 미군 사령관, 대통령 6명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 민선 대통령 시대, 비로소 청와대 신축

청와대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91년 즈음입니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세우며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청와대 관저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 1991년 본관을 새로 지었습니다. 1939년 일제 총독 관저로부터 시작해 경무대, 청와대로 52년간 사용했던 구 본관을 대신할 건물을 지은 겁니다. 이때부터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가 분리됐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신 본관 준공식에서 "역대 대통령이 52년 전 일제가 총독 관사로 지은 협소한 집을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해왔다."면서 "88올림픽 때 각국 원수와 스포츠 지도자들이 청와대가 어떤 건물양식이냐고 물을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신축 이유를 밝혔습니다.

준공식에는 훗날 15대 대통령인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도 초청됐습니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이 흔쾌히 예산을 배정해 줬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예산 승인을 기꺼이 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지, 낭비요인은 없는지 따지고 준 것"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준공식 다음날 열린 첫 공식행사에는 회사원, 택시기사, 주부 등 '보통 사람'이 초청됐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 관저 신축에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를 '장기 집권 음모'로 해석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개헌으로 민주화가 진전되고 88올림픽으로 국가 위상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청와대를 신축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신 본관은 청와대라는 이름을 살려 지붕에 15만 장의 푸른 기와를 덮은 한식 양식의 건물입니다. 건물 외벽은 포천산 화강석, 목재는 강원도 명주산 홍송을 썼습니다. 관저는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올린 한옥으로, 공사 과정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도중 땅 속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 표석1990년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도중 땅 속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 표석

■ '일제 잔재·권위주의 청산' 구 본관 철거

청와대 구 본관의 철거는 뒤이은 김영삼 대통령이 결정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의 자존심과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기로 한 데 이어, 그 부속건물인 총독 관저도 마땅히 헐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철거 결정에는 풍수지리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KBS뉴스는 구 본관에 대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지만 양택이 아닌 음택으로 알려져 왔으며, 일제는 북악으로부터 경복궁으로 흐르는 맥을 끊어 조선의 기를 차단하기 위해서 이 능선을 끊고 집터를 조성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기치로 내건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에 남아있는 군사독재의 잔재 청산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21 사태 이후 설치한 청와대 앞 바리케이드를 1993년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치웠습니다. 청와대 앞길이 전면개방됐고, 인왕산 등산로도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10.26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 터는 무궁화 동산으로 조성해 시민을 위한 시설로 바꿨습니다. 해외 국빈에게 받은 선물을 전시한 효자동 사랑방을 열었고, 노태우 대통령이 시작한 청와대 경내 관람 범위도 넓혔습니다.

이 같은 청와대 개방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청와대 경내 관람 대상을 개인과 외국인까지 허용했습니다. 청와대 서편 칠궁까지 관람을 허용하면서 첫 해에만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청와대를 관람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관람 범위를 본관을 경유해 녹지원까지 넓혔습니다. 2006년에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개방하고 북악산 숙정문도 열었습니다. 북악산 성곽로의 개방은 1.21 사건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지 38년만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마찬가지로 1.21 사건으로 출입이 통제됐던 북악산 북측 둘레길은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이 개방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전면 개방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같은 개방에는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자연환경을 복원하며 시민에게 도심 녹지 공간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 '구중궁궐' 이전 필요성 지속 제기

청와대가 '구중궁궐'과 같이 권위주의적이고 고립됐다는 비판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청와대에 입주한 대통령들이 먼저 문제를 인식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청와대 비서진 내정자 첫 회의에서 "청와대 집무실 의자가 일하는 의자가 아니더라."라며 실용적인 것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에서 첫날 밤을 지낸 뒤 "청와대에 들어와 있으니 세상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선 때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이 나온 이유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집무실 이전을 추진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와 과천 정부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려고 검토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청와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방안을 포함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중단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서울청사 별관으로 집무실, 비서실, 경호실 이전을 검토했지만 비용과 국회 승인 문제 등으로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집무실 이전을 준비했지만 경호와 의전 등의 문제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청와대 경내 공간배치나 건물 개조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 때 신축한 본관이 비서동과 더 멀어진 게 문제를 심화시켰습니다. 약 300미터 거리의 오르막길에 중간 검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가는데 10분이 걸린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근무하도록 건물 개조를 검토했지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신 비서실장이 본관과 비서실 양쪽에 사무실을 두고 근무하도록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본관 개조를 검토했지만 역사적 가치와 비용 문제 등으로 중단했습니다. 대신 비서동인 여민관을 신축해 대통령의 제2집무실을 마련하고, 대통령이 본관 집무실과 번갈아 사용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일하는 여민관을 위민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곳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거나 금요일마다 조찬회의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비서동이 노후해 재난위험시설인 D등급을 받고 일부 천장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예산 절감을 내세운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청와대 공간 개편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내 행적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청와대의 비효율적인 구조 문제가 공론화됐습니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대통령에게 최초 보고가 서면으로 진행된 사실이 드러났는데,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평소에도 서면 보고를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간 경우도 있고 뛰어간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상 업무를 다시 여민관으로 명칭을 바꾼 비서동 집무실에서 근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본관 집무실은 외교사절 접견이나 초청 만찬 때 사용하고, 관저의 사무실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후 청와대를 집무실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밝힌 상태입니다.

'청와대 시대'를 뒤로 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담길 시대 정신은 무엇일지 지켜볼 일입니다.

영상 편집 : 송은혜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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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상] ‘권력의 상징 공간’ 청와대 영욕의 74년
    • 입력 2022-03-27 08:00:21
    • 수정2022-03-27 1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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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이래 청와대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관저의 명칭을 넘어, 당대의 정치 권력과 역사의식, 시대정신이 공간에 구현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2022년 윤석열 20대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겠다고 밝히면서, 정치적 장소로서 청와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입니다.

74년간 영욕의 정치사가 펼쳐진 청와대의 변화상은 KBS 아카이브에 영상으로 보관돼 왔습니다.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2022년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청와대의 변화에 담긴 시대상을 영상으로 정리했습니다.

■ '식민통치의 유산'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

최초의 대통령 집무실인 경무대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8월 조선총독부가 총독 관저로 세웠습니다. 3명의 총독이 사용했고, 해방 이후에는 주한 미군 사령관 관사로 사용됐습니다. 경무대가 대통령 관저가 된 것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의 일입니다.

미 군정 하지 장관이 군정 이양 과정에서 이 대통령에게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넘기겠다고 제안하자, 이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입주 시기도 늦었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선출돼 24일에 취임했지만, 한달 뒤인 8월 22일에야 경무대로 입주했습니다.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부터 이 지역의 명칭이었습니다.

경복궁 뒤 소나무 숲이던 이 곳에서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이나 궁술대회가 열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소풍이나 각종 행사가 열렸습니다. 조선 총독 관저가 세워진 이후에도 기존의 용산 관저와 구분해 경무대 관저로 불렸습니다.

조선 총독 관저를 경복궁 뒤편에 지은 것은 식민통치의 일환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왕조의 왕도정치 이상에 따라 배치된 경복궁을 훼손해 조선총독부를 짓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을 훼손해 총독 관저를 지었습니다. 앞서 대한제국은 당시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중심으로 일반 국민의 생활공간과 좀더 가까운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을 계획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식민 통치의 공간 배치를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된 경무대는 봄꽃철에 정원을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줄 지어선 시민과 학생들이 정원과 연못을 구경하고 이 대통령 부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1955년 시작된 개방 행사는 4, 5월에 사흘 가량 진행됐고,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 열렸습니다.


■ '독재 청산'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변경

경무대를 청와대로 명칭을 바꾼 건 2대 윤보선 대통령입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부정선거에 분노한 시위대는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경무대 앞에서 투석전이 벌어졌고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습니다. 유혈 진압으로 경무대 앞을 포함해 전국에서 180여 명이 희생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발표하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취임 후 넉달 만인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꾸겠다고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경무대라는 이름이 "1인 독재 시절 연상시킨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청와대(靑瓦臺)라는 이름은 건물의 푸른 기와에서 따온 것으로 "평범하고 평화적인 명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윤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습니다. 1962년 3월 22일 윤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하야를 발표하고, 즉각 청와대를 떠났습니다. 국가최고회의가 하야를 공식 의결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습니다.

■ 15년 11개월 거주한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에서 대통령으로서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 청와대 관저에 입주해 1979년 10.26으로 운구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15년 11개월간 살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을 사용한 기간은 이보다 8개월 더 깁니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이 대통령 권한 대행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외교사절을 접견한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재임 기간, 청와대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뒤편 북한산과 자하문을 통해 북한 무장공비가 습격했습니다. 생포된 간첩 김신조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을 암살할 목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1.21 사태를 계기로 청와대 인근의 경호가 대폭 강화됐습니다. 청와대 앞길과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길의 일반인 출입이 반세기 가량 금지됐습니다.

청와대 안에서 두 번의 장례가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살된 육영수 여사의 빈소가 청와대 안에 차려졌고, 박 대통령은 1979년 청와대 경내에 있는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됐습니다.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의 안전가옥으로, 권위주의 시대 밀실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이 시기 청와대 경내에 새로 지어진 건물도 있습니다. 1978년 12월 준공된 영빈관은 외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할 때 쓰는 건물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건축양식에 한식을 절충한 건물로, 화려한 샹들리에와 이탈리아산 대리석으로 꾸몄습니다. 영빈관에서 열린 첫 공식행사는 박 대통령의 9대 대통령 취임 경축연회였습니다.

뒤이은 최규하 10대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청와대에서 머문 시간이 가장 짧았습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인 1980년 8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최 대통령은 권한대행 기간을 포함해도 10개월 정도 청와대에 머물렀습니다. 최 대통령은 취임 초기 관저 개보수를 위해 기존 총리 관저에서 79일간 청와대 집무실로 출퇴근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는 청와대의 변화상이 별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 경내 유일한 한옥인 상춘재는 1984년 세워졌는데, 공개된 준공 행사를 열지 않았습니다.

1993년 청와대 구 본관(옛 경무대) 건물 철거 모습. 반세기에 걸쳐 조선 총독 3명, 주한 미군 사령관,  대통령 6명이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 민선 대통령 시대, 비로소 청와대 신축

청와대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91년 즈음입니다.

'보통 사람의 시대'를 내세우며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청와대 관저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 1991년 본관을 새로 지었습니다. 1939년 일제 총독 관저로부터 시작해 경무대, 청와대로 52년간 사용했던 구 본관을 대신할 건물을 지은 겁니다. 이때부터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가 분리됐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신 본관 준공식에서 "역대 대통령이 52년 전 일제가 총독 관사로 지은 협소한 집을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해왔다."면서 "88올림픽 때 각국 원수와 스포츠 지도자들이 청와대가 어떤 건물양식이냐고 물을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신축 이유를 밝혔습니다.

준공식에는 훗날 15대 대통령인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도 초청됐습니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당이 흔쾌히 예산을 배정해 줬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예산 승인을 기꺼이 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지, 낭비요인은 없는지 따지고 준 것"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준공식 다음날 열린 첫 공식행사에는 회사원, 택시기사, 주부 등 '보통 사람'이 초청됐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 관저 신축에 선뜻 나서지 못한 이유를 '장기 집권 음모'로 해석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개헌으로 민주화가 진전되고 88올림픽으로 국가 위상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청와대를 신축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신 본관은 청와대라는 이름을 살려 지붕에 15만 장의 푸른 기와를 덮은 한식 양식의 건물입니다. 건물 외벽은 포천산 화강석, 목재는 강원도 명주산 홍송을 썼습니다. 관저는 팔작지붕에 청기와를 올린 한옥으로, 공사 과정에서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는 표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도중 땅 속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 표석
■ '일제 잔재·권위주의 청산' 구 본관 철거

청와대 구 본관의 철거는 뒤이은 김영삼 대통령이 결정했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민족의 자존심과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기로 한 데 이어, 그 부속건물인 총독 관저도 마땅히 헐어야 한다고 지시했습니다.

철거 결정에는 풍수지리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KBS뉴스는 구 본관에 대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지만 양택이 아닌 음택으로 알려져 왔으며, 일제는 북악으로부터 경복궁으로 흐르는 맥을 끊어 조선의 기를 차단하기 위해서 이 능선을 끊고 집터를 조성한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기치로 내건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에 남아있는 군사독재의 잔재 청산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21 사태 이후 설치한 청와대 앞 바리케이드를 1993년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치웠습니다. 청와대 앞길이 전면개방됐고, 인왕산 등산로도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습니다.

10.26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 터는 무궁화 동산으로 조성해 시민을 위한 시설로 바꿨습니다. 해외 국빈에게 받은 선물을 전시한 효자동 사랑방을 열었고, 노태우 대통령이 시작한 청와대 경내 관람 범위도 넓혔습니다.

이 같은 청와대 개방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청와대 경내 관람 대상을 개인과 외국인까지 허용했습니다. 청와대 서편 칠궁까지 관람을 허용하면서 첫 해에만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청와대를 관람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관람 범위를 본관을 경유해 녹지원까지 넓혔습니다. 2006년에는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개방하고 북악산 숙정문도 열었습니다. 북악산 성곽로의 개방은 1.21 사건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지 38년만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혼자 보기가 좀 미안한 것 같더라."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마찬가지로 1.21 사건으로 출입이 통제됐던 북악산 북측 둘레길은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이 개방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전면 개방으로 확대했습니다.

이 같은 개방에는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고 자연환경을 복원하며 시민에게 도심 녹지 공간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 '구중궁궐' 이전 필요성 지속 제기

청와대가 '구중궁궐'과 같이 권위주의적이고 고립됐다는 비판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청와대에 입주한 대통령들이 먼저 문제를 인식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청와대 비서진 내정자 첫 회의에서 "청와대 집무실 의자가 일하는 의자가 아니더라."라며 실용적인 것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청와대에서 첫날 밤을 지낸 뒤 "청와대에 들어와 있으니 세상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대선 때마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이 나온 이유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집무실 이전을 추진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와 과천 정부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려고 검토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 계획에 청와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방안을 포함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중단됐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부서울청사 별관으로 집무실, 비서실, 경호실 이전을 검토했지만 비용과 국회 승인 문제 등으로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광화문 집무실 이전을 준비했지만 경호와 의전 등의 문제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청와대 경내 공간배치나 건물 개조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 노태우 대통령 때 신축한 본관이 비서동과 더 멀어진 게 문제를 심화시켰습니다. 약 300미터 거리의 오르막길에 중간 검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가는데 10분이 걸린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근무하도록 건물 개조를 검토했지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신 비서실장이 본관과 비서실 양쪽에 사무실을 두고 근무하도록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역시 본관 개조를 검토했지만 역사적 가치와 비용 문제 등으로 중단했습니다. 대신 비서동인 여민관을 신축해 대통령의 제2집무실을 마련하고, 대통령이 본관 집무실과 번갈아 사용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일하는 여민관을 위민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이곳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거나 금요일마다 조찬회의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비서동이 노후해 재난위험시설인 D등급을 받고 일부 천장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예산 절감을 내세운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청와대 공간 개편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내 행적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청와대의 비효율적인 구조 문제가 공론화됐습니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대통령에게 최초 보고가 서면으로 진행된 사실이 드러났는데,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평소에도 서면 보고를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간 경우도 있고 뛰어간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일상 업무를 다시 여민관으로 명칭을 바꾼 비서동 집무실에서 근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본관 집무실은 외교사절 접견이나 초청 만찬 때 사용하고, 관저의 사무실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취임 후 청와대를 집무실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밝힌 상태입니다.

'청와대 시대'를 뒤로 하고,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담길 시대 정신은 무엇일지 지켜볼 일입니다.

영상 편집 : 송은혜
인포그래픽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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