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엔화는 어쩌다 싸구려가 됐나

입력 2022.03.30 (15:57) 수정 2022.03.3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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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두번째 원폭을 맞은 이날도 일본 외환시장은 열려있었다. 항복선언 며칠뒤 미 군정은 1달러=360엔으로 엔화값을 콕 정해줬다.

그야말로 주먹구구였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엔화 절상이 강한 일본을 위해 좋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 환율은 변동환율제가 도입된 73년까지 거의 30년간 지속됐다.

1985년 9월 22일. 베트남전으로 재정이 무너지던 미국은 일본재무상을 뉴욕 플라자호텔로 불러 또다시 엔화 값을 콕 정해줬다. 엔화가치는 폭등했고, 3년뒤 도요타와 소니제품은 미국에서 2배나 비싼값으로 팔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크게 줄었고, 반면 그때부터 일본의 수출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일까. 40년 넘게 일본 경제는 '엔저'에 매달린다. 엔화값을 낮추려 발버둥쳤는데 진짜 엔화값이 무섭게 떨어진다. 이 엔저는 그런데 ZERO금리와 양적완화 때문일까. 혹시 세계경제가 일본 경제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아닐까.

1.엔화가치가 6년 만에 최저치로 밀렸다


10년전 1달러를 바꾸려면 80엔이 필요했다. 이제 1달러를 바꾸려면 122엔을 내야한다(30일 기준). 블룸버그에선 엔화가치가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 원화도 많이 떨어졌는데, 엔화는 더 밀리다보니 원화 대비 엔화 가치도 팍팍 떨어진다. 10년전 100엔을 바꾸려면 우리돈 1,400원 정도를 내야했는데 이제 980원만 내면 된다. 시부야에서 스벅 커피를 마셔보면 이 환율을 체감하게 된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번째 경제대국이다. 엔화는 안전자산이다. 세계경제가 출렁이면 지구인들은 금처럼 엔화를 샀다. 리먼사태 때도, 심지어 동일본지진때 엔화는 1달러에 75엔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지난해 달러화대비 가장 가치가 내린 주요국 통화는 엔화였다. -10.3%나 떨어졌다. 멕시코 페소화나 인도 루피화보다 더 떨어졌다.
그렇게 내리막을 걷던 엔화는 최근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자 더 가파르게 떨어진다.

10년 전 100엔을 사려면 한화 1,500원을 내야했다. 이제 980원만 내면 된다. 달러화 대비 원화의 가치는 떨어졌지만, 엔화의 가치가 훨씬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캡처10년 전 100엔을 사려면 한화 1,500원을 내야했다. 이제 980원만 내면 된다. 달러화 대비 원화의 가치는 떨어졌지만, 엔화의 가치가 훨씬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캡처

2.왜 이렇게 떨어지나

착각은 하지 말자. 엔저는 일본이 그토록 원하던 거다. 아베 정권은 더 노골적으로 엔화의 가치하락을 노렸다.돈도 많이 풀었다. 전세계가 인플레이션에 놀라 서둘러 금리인상을 준비하는 지금도 구로다 총재(일본중앙은행/JOB)께서는 중단없는 울트라 양적완화를 공언중이다 (세상에 이렇게 큰 비둘기는 본 적이 없다...).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수출도 견조하며, 순대외자산이 무려 4조 달러다(해외에 빌려준 돈이 외국인들에게 갚아야할 돈보다 훨씬 많다). 오직 경기만 살리면 된다. 그럴려면 수출이 살아야한다. 엔화값이 팍팍 떨어져야한다. 그러다 진짜 원하던대로 팍팍 떨어진다. "근데 이거 브레이크는 있겠지?'

지구인들은 자본시장에서 가격이 오를 만한 것을 사고, 떨어질 만한 것을 판다. 외환시장도 마찬가지다. A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질것 같으면 해당 화폐를 던진다. A나라의 채권이나 주식, 부동산을 팔아치우고 자국 화폐로 바꿔 집으로 돌아온다. A나라의 화폐가치는 그렇게 추락한다.

1)일단 지구인들이 일본 경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장 에너지값이 급등하면서 일본의 경상수지를 흔든다. 서둘러 엔화를 던진다. "일본 경제 진짜 괜찮은거야?"

엔화가치가 내리면 일본에서 만든 카메라나 자동차의 수출이 유리해진다. 그런데 일본 공장들이 부지런히 해외로 옮겨가면서 이제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20%밖에 안된다(한국이나 독일은 여전히 40%나 된다). 그러니 엔저로 이익을 보는 업종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2)지난 반세기동안 해외에 잔뜩 투자해놨다. 공장도 해외로 많이 옮겨갔다. 거기서 달러를 벌면 다시 일본으로 보내 엔화로 환전하면서 엔화가치를 올렸다. 그런데 엔화값이 자꾸 떨어진다. 그러니 기업들이 해외에서 번 달러를 엔화로 환전하지 않고 그냥 해외에 재투자한다.

3) 다들 금리를 올릴 궁리를 하는데 일본만 여전히 'ZERO' 금리다. 돈은 애시당초 이자 많이 주는 곳으로 향하게 돼 있다. 이쯤되면 일본 자산을 팔고 금리가 오르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다. 이렇게 도쿄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겠다는 지구인들이 자꾸 줄어든다.

4)게다가 미국부터 글로벌 돈풀기를 그만 하겠다는데 일본만 유독 양적완화를 계속한단다. 뭐든 많이 찍어내면 결국 가치는 떨어진다. 엔화는 계속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지구인들은 궁금하다. "진짜 양적완화 계속 할거야? 니네 이제 제대로 수출하는거 사실 도요타 말고 없잖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중앙은행 총재. 전 세계가 모두 금리인상과 양적 긴축을 준비할때 나홀로 양적완화의 기조를 분명히 했다. 엔화를 무한 공급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겠다는 그의 목표는 거의 이뤄졌다. 사진 연합뉴스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중앙은행 총재. 전 세계가 모두 금리인상과 양적 긴축을 준비할때 나홀로 양적완화의 기조를 분명히 했다. 엔화를 무한 공급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겠다는 그의 목표는 거의 이뤄졌다. 사진 연합뉴스

3.일본의 빅맥지수는 페루나 칠레 수준이다

화폐가치가 낮아지면 보통 물가가 오르고 그래서 그나라 국민의 구매력은 떨어진다. 이걸 수치로 나타낸 게 '실질실효 환율'이다. 2010년을 '100'으로 봤을때 지난해 12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68.07'이다(국제결제은행 BIS). 급전직하를 거듭하면서 1972년 수준까지 떨어졌다.

쉽게 말해 엔화는 힘을 잃고 있다.

하이테크산업의 주도권을 뺏긴 일본은 사실 99년부터 기준금리 0%의 시대를 시작했다. 정부와 기업은 사실상 공짜로 돈을 퍼다썼다. 그러고보니 '양적완화'를 처음 시작한 것도 일본이다. 일본중앙은행은 엔화 자산을 무제한 사들이며 시중 돈값을 양적으로 희석(quantitative easing)시켰다.

이렇게 엔화값이 떨어지면 수출은 유리해지지만, 결국 국민들은 앉아서 가난해진다. 국민들의 지갑은 쪼그라들고 그래서 수출만이 살길이다며 더 '엔저'에 매달렸다. 악순환이 계속된다(우리도 MB정부때부터 원화값을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미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째려봐서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이걸 이겨내고 수출을 늘려왔다).

2015년 일본인이 아이폰을 사려면 40시간을, 한국인은 57시간을 일해야 했다(IPHONE INDEX). 지난해에는 거의 비슷해졌다(일본 10.2일 /한국 10.6일). 90년 이후 영국 근로자의 실질임금이 40% 오를 동안 일본은 불과 4%밖에 오르지 않았다(OECD). 30년 동안 거의 임금이 오르지 않은 이 특이한 나라는 결국 한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나라가 됐다.

덕분에 일본의 올해 빅맥지수는 3.38달러다. 페루와 칠레 수준이다. 도쿄의 5성급 호텔은 이제 런던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거의 반값이다. 상업용 부동산부터 유니클로의 히트텍까지 일본은 자꾸 저렴해진다. 해외 언론은 요즘 '싸구려 일본(Cheap Japan)'이라는 용어를 부쩍 많이 쓴다. (실제 구글에서 Cheap japan을 검색해보시라).

4.엔화의 미래는?

서학개미의 원조격인 와타나베 부인은 거의 0% 금리로 엔화를 끌어다 글로벌 자산에 투자한다. 그러다 세계 경제가 불안해지면 일단 투자를 접고 돈을 귀가시킨다. 해외 자산을 팔고 안전한 엔화로 환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엔화 수요가 높아지면서 엔화는 안정을 찾는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믿을건 미국 뿐이라며 오히려 달러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엔화값이 맥을 못출 것이라 판단하면 테슬라 주식을 더 사거나, 호주은행에 예금하거나, 아니면 해운대 아파트를 구입할 것이다. 그럴수록 엔화가치는 더 떨어진다. 일본경제는 이 엔저를 기반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그토록 엔저의 비가 오도록 기우제를 지냈고 이제 진짜 폭우가 내린다. 이 비는 원하는 시간에 멈출수 있을까.기축통화를 유지하는데 군사력까지 필요하듯, 환율은 경제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섹터의 영향을 받는다. 엔화 가치가 다시 오르려면 결국 일본이 살아나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유래없는 코로나위기에 선진국들은 죄다 백신을 만들었다. 미국 영국 독일 심지어 중국이나 러시아도 만들었지만, 일본 백신은 없다. 구글도 테슬라도 화웨이도 만들지 못한 일본은, 모바일메신저도 한국에서 온 '라인'을 쓴다.

이제 일본 밴드의 음원을 구입하는 미국인도, SNS에 일본 전자제품을 샀다며 자랑하는 유럽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애써 지금의 엔저는 양적완화의 성공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일본 경제의 침체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이를 눈치챘고, 그래서 엔화 가치는 계속 추락중이다.

아베 정권이 그토록 바라던 엔저시대가 왔지만, 일본 국민 누구도 박수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화폐가치가 낮고, 그래서 물건값이 저렴하고, 임금이 낮다는 것은 곧 다같이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경제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서서히 늙어간다. 일본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지만.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일까.

"일본중앙은행의 양적완화에서 그들이 놓친 가장 큰 문제는 '엔화 약세 정책이 어떻게 일본 경제를 보다 경쟁력 있고 민첩하게 만들고 기업 경영자들이 혁신하고 구조조정하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약화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Fair enough. But missing from this BOJ autopsy is the bigger problem: how a weak yen deadened the urgency for Tokyo to make the economy more competitive and nimbler and for corporate chieftains to innovate, restructure and take risks. "
- 포브스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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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엔화는 어쩌다 싸구려가 됐나
    • 입력 2022-03-30 15:57:29
    • 수정2022-03-30 16:04:26
    특파원 리포트

1945년 8월 9일. 두번째 원폭을 맞은 이날도 일본 외환시장은 열려있었다. 항복선언 며칠뒤 미 군정은 1달러=360엔으로 엔화값을 콕 정해줬다.

그야말로 주먹구구였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엔화 절상이 강한 일본을 위해 좋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 환율은 변동환율제가 도입된 73년까지 거의 30년간 지속됐다.

1985년 9월 22일. 베트남전으로 재정이 무너지던 미국은 일본재무상을 뉴욕 플라자호텔로 불러 또다시 엔화 값을 콕 정해줬다. 엔화가치는 폭등했고, 3년뒤 도요타와 소니제품은 미국에서 2배나 비싼값으로 팔렸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크게 줄었고, 반면 그때부터 일본의 수출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일까. 40년 넘게 일본 경제는 '엔저'에 매달린다. 엔화값을 낮추려 발버둥쳤는데 진짜 엔화값이 무섭게 떨어진다. 이 엔저는 그런데 ZERO금리와 양적완화 때문일까. 혹시 세계경제가 일본 경제의 하락에 베팅하는 것은 아닐까.

1.엔화가치가 6년 만에 최저치로 밀렸다


10년전 1달러를 바꾸려면 80엔이 필요했다. 이제 1달러를 바꾸려면 122엔을 내야한다(30일 기준). 블룸버그에선 엔화가치가 달러당 15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 원화도 많이 떨어졌는데, 엔화는 더 밀리다보니 원화 대비 엔화 가치도 팍팍 떨어진다. 10년전 100엔을 바꾸려면 우리돈 1,400원 정도를 내야했는데 이제 980원만 내면 된다. 시부야에서 스벅 커피를 마셔보면 이 환율을 체감하게 된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번째 경제대국이다. 엔화는 안전자산이다. 세계경제가 출렁이면 지구인들은 금처럼 엔화를 샀다. 리먼사태 때도, 심지어 동일본지진때 엔화는 1달러에 75엔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지난해 달러화대비 가장 가치가 내린 주요국 통화는 엔화였다. -10.3%나 떨어졌다. 멕시코 페소화나 인도 루피화보다 더 떨어졌다.
그렇게 내리막을 걷던 엔화는 최근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자 더 가파르게 떨어진다.

10년 전 100엔을 사려면 한화 1,500원을 내야했다. 이제 980원만 내면 된다. 달러화 대비 원화의 가치는 떨어졌지만, 엔화의 가치가 훨씬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 캡처
2.왜 이렇게 떨어지나

착각은 하지 말자. 엔저는 일본이 그토록 원하던 거다. 아베 정권은 더 노골적으로 엔화의 가치하락을 노렸다.돈도 많이 풀었다. 전세계가 인플레이션에 놀라 서둘러 금리인상을 준비하는 지금도 구로다 총재(일본중앙은행/JOB)께서는 중단없는 울트라 양적완화를 공언중이다 (세상에 이렇게 큰 비둘기는 본 적이 없다...).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고, 수출도 견조하며, 순대외자산이 무려 4조 달러다(해외에 빌려준 돈이 외국인들에게 갚아야할 돈보다 훨씬 많다). 오직 경기만 살리면 된다. 그럴려면 수출이 살아야한다. 엔화값이 팍팍 떨어져야한다. 그러다 진짜 원하던대로 팍팍 떨어진다. "근데 이거 브레이크는 있겠지?'

지구인들은 자본시장에서 가격이 오를 만한 것을 사고, 떨어질 만한 것을 판다. 외환시장도 마찬가지다. A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질것 같으면 해당 화폐를 던진다. A나라의 채권이나 주식, 부동산을 팔아치우고 자국 화폐로 바꿔 집으로 돌아온다. A나라의 화폐가치는 그렇게 추락한다.

1)일단 지구인들이 일본 경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장 에너지값이 급등하면서 일본의 경상수지를 흔든다. 서둘러 엔화를 던진다. "일본 경제 진짜 괜찮은거야?"

엔화가치가 내리면 일본에서 만든 카메라나 자동차의 수출이 유리해진다. 그런데 일본 공장들이 부지런히 해외로 옮겨가면서 이제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20%밖에 안된다(한국이나 독일은 여전히 40%나 된다). 그러니 엔저로 이익을 보는 업종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2)지난 반세기동안 해외에 잔뜩 투자해놨다. 공장도 해외로 많이 옮겨갔다. 거기서 달러를 벌면 다시 일본으로 보내 엔화로 환전하면서 엔화가치를 올렸다. 그런데 엔화값이 자꾸 떨어진다. 그러니 기업들이 해외에서 번 달러를 엔화로 환전하지 않고 그냥 해외에 재투자한다.

3) 다들 금리를 올릴 궁리를 하는데 일본만 여전히 'ZERO' 금리다. 돈은 애시당초 이자 많이 주는 곳으로 향하게 돼 있다. 이쯤되면 일본 자산을 팔고 금리가 오르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다. 이렇게 도쿄외환시장에서 엔화를 사겠다는 지구인들이 자꾸 줄어든다.

4)게다가 미국부터 글로벌 돈풀기를 그만 하겠다는데 일본만 유독 양적완화를 계속한단다. 뭐든 많이 찍어내면 결국 가치는 떨어진다. 엔화는 계속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지구인들은 궁금하다. "진짜 양적완화 계속 할거야? 니네 이제 제대로 수출하는거 사실 도요타 말고 없잖아??"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 중앙은행 총재. 전 세계가 모두 금리인상과 양적 긴축을 준비할때 나홀로 양적완화의 기조를 분명히 했다. 엔화를 무한 공급해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겠다는 그의 목표는 거의 이뤄졌다. 사진 연합뉴스
3.일본의 빅맥지수는 페루나 칠레 수준이다

화폐가치가 낮아지면 보통 물가가 오르고 그래서 그나라 국민의 구매력은 떨어진다. 이걸 수치로 나타낸 게 '실질실효 환율'이다. 2010년을 '100'으로 봤을때 지난해 12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68.07'이다(국제결제은행 BIS). 급전직하를 거듭하면서 1972년 수준까지 떨어졌다.

쉽게 말해 엔화는 힘을 잃고 있다.

하이테크산업의 주도권을 뺏긴 일본은 사실 99년부터 기준금리 0%의 시대를 시작했다. 정부와 기업은 사실상 공짜로 돈을 퍼다썼다. 그러고보니 '양적완화'를 처음 시작한 것도 일본이다. 일본중앙은행은 엔화 자산을 무제한 사들이며 시중 돈값을 양적으로 희석(quantitative easing)시켰다.

이렇게 엔화값이 떨어지면 수출은 유리해지지만, 결국 국민들은 앉아서 가난해진다. 국민들의 지갑은 쪼그라들고 그래서 수출만이 살길이다며 더 '엔저'에 매달렸다. 악순환이 계속된다(우리도 MB정부때부터 원화값을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미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다고 째려봐서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이걸 이겨내고 수출을 늘려왔다).

2015년 일본인이 아이폰을 사려면 40시간을, 한국인은 57시간을 일해야 했다(IPHONE INDEX). 지난해에는 거의 비슷해졌다(일본 10.2일 /한국 10.6일). 90년 이후 영국 근로자의 실질임금이 40% 오를 동안 일본은 불과 4%밖에 오르지 않았다(OECD). 30년 동안 거의 임금이 오르지 않은 이 특이한 나라는 결국 한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나라가 됐다.

덕분에 일본의 올해 빅맥지수는 3.38달러다. 페루와 칠레 수준이다. 도쿄의 5성급 호텔은 이제 런던이나 샌프란시스코의 거의 반값이다. 상업용 부동산부터 유니클로의 히트텍까지 일본은 자꾸 저렴해진다. 해외 언론은 요즘 '싸구려 일본(Cheap Japan)'이라는 용어를 부쩍 많이 쓴다. (실제 구글에서 Cheap japan을 검색해보시라).

4.엔화의 미래는?

서학개미의 원조격인 와타나베 부인은 거의 0% 금리로 엔화를 끌어다 글로벌 자산에 투자한다. 그러다 세계 경제가 불안해지면 일단 투자를 접고 돈을 귀가시킨다. 해외 자산을 팔고 안전한 엔화로 환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엔화 수요가 높아지면서 엔화는 안정을 찾는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믿을건 미국 뿐이라며 오히려 달러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엔화값이 맥을 못출 것이라 판단하면 테슬라 주식을 더 사거나, 호주은행에 예금하거나, 아니면 해운대 아파트를 구입할 것이다. 그럴수록 엔화가치는 더 떨어진다. 일본경제는 이 엔저를 기반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그토록 엔저의 비가 오도록 기우제를 지냈고 이제 진짜 폭우가 내린다. 이 비는 원하는 시간에 멈출수 있을까.기축통화를 유지하는데 군사력까지 필요하듯, 환율은 경제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모든 섹터의 영향을 받는다. 엔화 가치가 다시 오르려면 결국 일본이 살아나야 한다. 그럴 수 있을까.

유래없는 코로나위기에 선진국들은 죄다 백신을 만들었다. 미국 영국 독일 심지어 중국이나 러시아도 만들었지만, 일본 백신은 없다. 구글도 테슬라도 화웨이도 만들지 못한 일본은, 모바일메신저도 한국에서 온 '라인'을 쓴다.

이제 일본 밴드의 음원을 구입하는 미국인도, SNS에 일본 전자제품을 샀다며 자랑하는 유럽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애써 지금의 엔저는 양적완화의 성공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일본 경제의 침체 때문이다. 세계 경제는 이를 눈치챘고, 그래서 엔화 가치는 계속 추락중이다.

아베 정권이 그토록 바라던 엔저시대가 왔지만, 일본 국민 누구도 박수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화폐가치가 낮고, 그래서 물건값이 저렴하고, 임금이 낮다는 것은 곧 다같이 가난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 경제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하고 서서히 늙어간다. 일본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까.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지만. 그리고 그것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일까.

"일본중앙은행의 양적완화에서 그들이 놓친 가장 큰 문제는 '엔화 약세 정책이 어떻게 일본 경제를 보다 경쟁력 있고 민첩하게 만들고 기업 경영자들이 혁신하고 구조조정하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약화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Fair enough. But missing from this BOJ autopsy is the bigger problem: how a weak yen deadened the urgency for Tokyo to make the economy more competitive and nimbler and for corporate chieftains to innovate, restructure and take risks. "
- 포브스 3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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