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에 파종 나선 우크라 농민들 “세계 식량 지킨다”

입력 2022.04.01 (08:00) 수정 2022.04.0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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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봄 농사철이 돌아오자 농민들이 '파종 작전'에 나섰습니다. 폭격으로 일부 농경지가 훼손되고 농기계가 파손됐지만, 필사적으로 예년보다 더 많은 양의 곡물을 파종하겠다는 겁니다. 일부 지역 농민들은 파종 면적을 예년대로 유지하기로 결의했고, 다른 지역 농민들은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무장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파종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자국민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난해 옥수수가 풍년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올해 자국에 필요한 곡물량의 114%를 재고로 비축하고 있습니다. 항구 폐쇄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국내 재고는 더욱 늘 전망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수출한 곡물에 의존하던 수입국들의 식량난이 예상되자, 농민들이 공습 위험에도 파종을 위해 농경지로 나섰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한 창고에 밀이 쌓여 있는 모습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한 창고에 밀이 쌓여 있는 모습

■ 우크라이나 농민 "파종 작전은 제2의 전선"

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 주의 농민 페트코프 씨는 자신의 농경지에 밀과 해바라기를 파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포함해 이 마을 농민들은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페트코프 씨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마을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장한 인원 대여섯 명이 24시간 방어에 들어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마을엔 아직 러시아 군인들이 닥치지 않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농민은 주민들이 러시아군과 싸울 준비가 됐다면서 "필요한 경우에 이 무기를 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이 땅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 주의 농민들이 파종철을 맞아 무장한 모습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 주의 농민들이 파종철을 맞아 무장한 모습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리비우에서도 파종이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의 농협장인 이반 킬간 씨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전장 다음으로 최전선은 파종 작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파종이야말로 "식량 안보의 최전선"이라면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수급 불안정으로 연료와 비료 등 농사 비용이 올라갔지만, 이 지역 농민들은 모두 예년의 파종 면적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재배량을 늘리기로 결의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림부는 올해 옥수수와 콩, 해바라기, 수수, 메밀, 귀리 같은 봄 작물을 파종한 농경지를 15만 헥타르라고 집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농경지에서 파종에 앞서 땅을 고르는 모습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농경지에서 파종에 앞서 땅을 고르는 모습

곡창지대 피해 집중…생산 감소 불가피

이런 농민들의 결의에도, 올해 우크라이나 곡물 생산 감소는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수도 키이우 외곽의 키이우 주를 비롯해 도네츠크 주, 루한스크 주, 헤르손 주, 미콜라이우 주 등 러시아와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는 동부와 남부 지역은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입니다.

세계식량기구는 전쟁으로 인해 보리를 수확하지 못한 우크라이나 농경지가 20~30%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월에 파종해야 하는 해바라기 농사도 시기를 놓치면 올해 생산량이 감소할 전망입니다.

더욱이 농기계 가동에 필요한 연료 공급이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석유 수입의 70%를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의존해왔습니다. 침공 이후 연료 공급이 끊기면서 봄에 필요한 연료를 충분하게 비축한 곳은 우크라이나의 농업 회사 1300여 곳 중 1/5에 불과합니다.

세계식량기구는 우크라이나의 질소 비료와 살충제도 각각 40%, 28%만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작물 재배를 위한 시비와 살충 작업은 적기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로 2-3월에 필요한 양을 수입해서 유통해왔는데 올해는 전쟁으로 수입과 물류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작물의 생육이 부진하면 작황도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 세계식량기구 "농사 즉각 재개되어야"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 차질이 전세계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식용유로 쓰이는 해바라기 씨 생산량이 지난해 세계 1위입니다. 이와 함께 보리와 옥수수는 세계 3위, 밀은 세계 6위의 수출국이어서 '세계의 빵 바구니'라고 불립니다. 작황 부진에 물류 차질, 항구 폐쇄 등이 겹치면 올해 곡물 수출량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제재 조치를 받고 있는 러시아 역시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고
해바라기 씨, 보리의 주요 수출국입니다. 수출길이 막히고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농가는 경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장기적으로 내년도 작물 재배 면적이 감소할 거란 우려도 나옵니다.


두 나라로부터 작물 수입 의존도가 큰 나라들은 올해 식량 부족과 정치적 불안의 위험을 지게 됐습니다. 아프리카와 중동, 서아시아의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나라의 수출량이 전세계 공급의 과반을 차지하는 해바라기 씨의 경우, 전세계적인 영향이 불가피합니다.

이 때문에 세계식량기구는 우크라이나의 농업 활동이 즉각 재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안전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에도 식량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농경지와 관수 시설, 저장 시설 등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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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 통에 파종 나선 우크라 농민들 “세계 식량 지킨다”
    • 입력 2022-04-01 08:00:25
    • 수정2022-04-01 08:01:04
    세계는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봄 농사철이 돌아오자 농민들이 '파종 작전'에 나섰습니다. 폭격으로 일부 농경지가 훼손되고 농기계가 파손됐지만, 필사적으로 예년보다 더 많은 양의 곡물을 파종하겠다는 겁니다. 일부 지역 농민들은 파종 면적을 예년대로 유지하기로 결의했고, 다른 지역 농민들은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무장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하게 파종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자국민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난해 옥수수가 풍년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올해 자국에 필요한 곡물량의 114%를 재고로 비축하고 있습니다. 항구 폐쇄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국내 재고는 더욱 늘 전망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수출한 곡물에 의존하던 수입국들의 식량난이 예상되자, 농민들이 공습 위험에도 파종을 위해 농경지로 나섰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한 창고에 밀이 쌓여 있는 모습
■ 우크라이나 농민 "파종 작전은 제2의 전선"

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 주의 농민 페트코프 씨는 자신의 농경지에 밀과 해바라기를 파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포함해 이 마을 농민들은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페트코프 씨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마을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무장한 인원 대여섯 명이 24시간 방어에 들어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마을엔 아직 러시아 군인들이 닥치지 않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입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농민은 주민들이 러시아군과 싸울 준비가 됐다면서 "필요한 경우에 이 무기를 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이 땅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남서부 오데사 주의 농민들이 파종철을 맞아 무장한 모습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리비우에서도 파종이 시작됐습니다. 이 지역의 농협장인 이반 킬간 씨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전장 다음으로 최전선은 파종 작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파종이야말로 "식량 안보의 최전선"이라면서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수급 불안정으로 연료와 비료 등 농사 비용이 올라갔지만, 이 지역 농민들은 모두 예년의 파종 면적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재배량을 늘리기로 결의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농림부는 올해 옥수수와 콩, 해바라기, 수수, 메밀, 귀리 같은 봄 작물을 파종한 농경지를 15만 헥타르라고 집계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리비우 인근의 농경지에서 파종에 앞서 땅을 고르는 모습
곡창지대 피해 집중…생산 감소 불가피

이런 농민들의 결의에도, 올해 우크라이나 곡물 생산 감소는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수도 키이우 외곽의 키이우 주를 비롯해 도네츠크 주, 루한스크 주, 헤르손 주, 미콜라이우 주 등 러시아와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는 동부와 남부 지역은 공교롭게도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입니다.

세계식량기구는 전쟁으로 인해 보리를 수확하지 못한 우크라이나 농경지가 20~30%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월에 파종해야 하는 해바라기 농사도 시기를 놓치면 올해 생산량이 감소할 전망입니다.

더욱이 농기계 가동에 필요한 연료 공급이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석유 수입의 70%를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의존해왔습니다. 침공 이후 연료 공급이 끊기면서 봄에 필요한 연료를 충분하게 비축한 곳은 우크라이나의 농업 회사 1300여 곳 중 1/5에 불과합니다.

세계식량기구는 우크라이나의 질소 비료와 살충제도 각각 40%, 28%만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작물 재배를 위한 시비와 살충 작업은 적기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로 2-3월에 필요한 양을 수입해서 유통해왔는데 올해는 전쟁으로 수입과 물류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작물의 생육이 부진하면 작황도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 세계식량기구 "농사 즉각 재개되어야"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 차질이 전세계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다는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식용유로 쓰이는 해바라기 씨 생산량이 지난해 세계 1위입니다. 이와 함께 보리와 옥수수는 세계 3위, 밀은 세계 6위의 수출국이어서 '세계의 빵 바구니'라고 불립니다. 작황 부진에 물류 차질, 항구 폐쇄 등이 겹치면 올해 곡물 수출량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제재 조치를 받고 있는 러시아 역시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고
해바라기 씨, 보리의 주요 수출국입니다. 수출길이 막히고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러시아 농가는 경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장기적으로 내년도 작물 재배 면적이 감소할 거란 우려도 나옵니다.


두 나라로부터 작물 수입 의존도가 큰 나라들은 올해 식량 부족과 정치적 불안의 위험을 지게 됐습니다. 아프리카와 중동, 서아시아의 국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나라의 수출량이 전세계 공급의 과반을 차지하는 해바라기 씨의 경우, 전세계적인 영향이 불가피합니다.

이 때문에 세계식량기구는 우크라이나의 농업 활동이 즉각 재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안전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에도 식량 생산과 유통에 필요한 농경지와 관수 시설, 저장 시설 등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포그래픽 :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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