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C, 우크라 현장조사 착수…‘푸틴 전범 기소’ 가능?

입력 2022.04.15 (06:00) 수정 2022.04.1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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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집단학살 의혹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현장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현지시간 13일 우크라이나 부차를 방문한 카림 칸 ICC 검사장은 "우크라이나는 범죄 현장"이라면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부차는 러시아 군대가 퇴각한 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400여 구가 발견된 도시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ICC의 범죄과학수사 전문가들이 이 곳에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ICC의 이번 조사는 지난달 2일 41개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 조사를 요청한 데 따른 것입니다. ICC 역사상 가장 많은 회원국이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ICC의 신속한 조사 착수에도 러시아를 전쟁범죄로 단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지시간 13일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은 모습현지시간 13일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은 모습

■ 전쟁범죄 기소가 어려운 이유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러시아를 전쟁범죄로 기소하는 것이 왜 복잡한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쟁범죄는 혐의를 입증하고 기소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전했습니다.

먼저, 전쟁 도중에 잔학행위가 발생해도 이를 전쟁범죄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범죄는 제네바협약의 중대한 위반 행위를 말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제네바협약은 전쟁 중에 붙잡힌 민간인과 전투 행위를 중단한 전투원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고의로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부상을 입히거나 고문하는 행위, 포로에게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 인구가 많은 도심을 과도하게 파괴하거나 인질로 삼아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하는 일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언뜻 전쟁범죄의 정의가 명료해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입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전쟁범죄의 판단에 비례의 원칙(proportionality, 과잉처벌 금지의 원칙)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전투원들은 충돌 과정에서 예상되는 군사적 이득과 관련해 민간인 희생자가 과도하게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이 의무를 위반했느냐가 쟁점이 됩니다.

이오아니스 칼푸조스 미 하버드 법대 교수는, 군대 측에서 "'주로 군사적 목표를 겨냥했는데, 부수적인 민간인 희생이 그렇게 높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 전투원이 있다는 정보처럼 정보의 오류나 기술적 실수가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서, 이런 사건들을 법정으로 가져가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현지시간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에서 경찰이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소로 이송하기 전 신원 확인 작업을 하는 모습.현지시간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에서 경찰이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소로 이송하기 전 신원 확인 작업을 하는 모습.

러시아, ICC 사법권 적용 안돼

기소를 위한 국제인도법이 모든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현실도 한계로 꼽힙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국제인도법인 제네바협약을 비준해도, 국제형사재판소를 위한 로마규정은 비준하지 않은 국가가 적지 않습니다. 제네바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모든 UN회원국을 포함해 196개 국에 이릅니다. 하지만 로마규정에 서명한 국가는 139개국이고, 비준한 나라는 123개국에 그칩니다.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모두 로마규정에 서명했지만 비준하지 않은 국가입니다.

로마규정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해당국이 동의하거나, UN안전보장이사회가 요청하면 ICC는 사법관할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러시아는 안보리에 비토권을 가진 나라여서, UN안보리가 ICC에 러시아의 전쟁범죄 조사를 요청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이 때문에 ICC의 직접 조사는 우크라이나에 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 '다르푸르 학살' 첫 재판에 19년…판결까지 장시간 필요

현지시간 5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서 수단 다르푸르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압둘 라흐만이 첫 재판에 출석해 자신의 혐의에 대해 듣는 모습.  라흐만은 31개 혐의로 기소됐고, 검사가 혐의를 열거하는데만 6시간이 걸렸다.현지시간 5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서 수단 다르푸르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압둘 라흐만이 첫 재판에 출석해 자신의 혐의에 대해 듣는 모습. 라흐만은 31개 혐의로 기소됐고, 검사가 혐의를 열거하는데만 6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국제법 전문가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가 ICC뿐만 아니라 특별조사위원회, 우크라이나와 미국 등 다른 나라 법원, 국제기구 등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ICC가 있는 헤이그 법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중 가장 심각한 사건들을 다루겠지만,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ICC의 재판은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해야 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ICC가 기소하더라도 러시아가 자국민을 전범 피고인으로 인도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실제로 수단 다르푸르 학살 사건의 경우,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19년이 걸렸습니다.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압둘 라흐만은 2003년과 2004년 사이 30만 명이 희생된 인종학살의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ICC는 2007년에야 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해외로 도피를 하던 라흐만이 2020년 자수하면서 첫 재판은 지난주에야 비로소 열렸습니다.

전범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단죄도 어렵습니다. 19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서 최소한 13만 명을 학살한 책임자로 ICC에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5년에 걸친 재판 도중 숨졌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재판이 중단되면서, 사법적 단죄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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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CC, 우크라 현장조사 착수…‘푸틴 전범 기소’ 가능?
    • 입력 2022-04-15 06:00:52
    • 수정2022-04-15 07:49:40
    취재K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집단학살 의혹에 대해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현장조사에 착수했습니다. 현지시간 13일 우크라이나 부차를 방문한 카림 칸 ICC 검사장은 "우크라이나는 범죄 현장"이라면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말했습니다.

부차는 러시아 군대가 퇴각한 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400여 구가 발견된 도시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ICC의 범죄과학수사 전문가들이 이 곳에서 조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ICC의 이번 조사는 지난달 2일 41개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 조사를 요청한 데 따른 것입니다. ICC 역사상 가장 많은 회원국이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ICC의 신속한 조사 착수에도 러시아를 전쟁범죄로 단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지시간 13일 카림 칸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이 우크라이나 부차에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은 모습
■ 전쟁범죄 기소가 어려운 이유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러시아를 전쟁범죄로 기소하는 것이 왜 복잡한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전쟁범죄는 혐의를 입증하고 기소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고 전했습니다.

먼저, 전쟁 도중에 잔학행위가 발생해도 이를 전쟁범죄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쟁범죄는 제네바협약의 중대한 위반 행위를 말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제네바협약은 전쟁 중에 붙잡힌 민간인과 전투 행위를 중단한 전투원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고의로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부상을 입히거나 고문하는 행위, 포로에게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 인구가 많은 도심을 과도하게 파괴하거나 인질로 삼아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하는 일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언뜻 전쟁범죄의 정의가 명료해보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입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전쟁범죄의 판단에 비례의 원칙(proportionality, 과잉처벌 금지의 원칙)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전투원들은 충돌 과정에서 예상되는 군사적 이득과 관련해 민간인 희생자가 과도하게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이 의무를 위반했느냐가 쟁점이 됩니다.

이오아니스 칼푸조스 미 하버드 법대 교수는, 군대 측에서 "'주로 군사적 목표를 겨냥했는데, 부수적인 민간인 희생이 그렇게 높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 전투원이 있다는 정보처럼 정보의 오류나 기술적 실수가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서, 이런 사건들을 법정으로 가져가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현지시간 6일 우크라이나 키이우 외곽에서 경찰이 부차에서 살해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소로 이송하기 전 신원 확인 작업을 하는 모습.
러시아, ICC 사법권 적용 안돼

기소를 위한 국제인도법이 모든 국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현실도 한계로 꼽힙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국제인도법인 제네바협약을 비준해도, 국제형사재판소를 위한 로마규정은 비준하지 않은 국가가 적지 않습니다. 제네바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모든 UN회원국을 포함해 196개 국에 이릅니다. 하지만 로마규정에 서명한 국가는 139개국이고, 비준한 나라는 123개국에 그칩니다.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모두 로마규정에 서명했지만 비준하지 않은 국가입니다.

로마규정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해당국이 동의하거나, UN안전보장이사회가 요청하면 ICC는 사법관할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러시아는 안보리에 비토권을 가진 나라여서, UN안보리가 ICC에 러시아의 전쟁범죄 조사를 요청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이 때문에 ICC의 직접 조사는 우크라이나에 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 '다르푸르 학살' 첫 재판에 19년…판결까지 장시간 필요

현지시간 5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법정에서 수단 다르푸르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압둘 라흐만이 첫 재판에 출석해 자신의 혐의에 대해 듣는 모습.  라흐만은 31개 혐의로 기소됐고, 검사가 혐의를 열거하는데만 6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국제법 전문가들은 전쟁범죄에 대한 단죄가 ICC뿐만 아니라 특별조사위원회, 우크라이나와 미국 등 다른 나라 법원, 국제기구 등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ICC가 있는 헤이그 법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중 가장 심각한 사건들을 다루겠지만, 그러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ICC의 재판은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해야 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ICC가 기소하더라도 러시아가 자국민을 전범 피고인으로 인도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실제로 수단 다르푸르 학살 사건의 경우,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19년이 걸렸습니다. 알리 무하마드 알리 압둘 라흐만은 2003년과 2004년 사이 30만 명이 희생된 인종학살의 책임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ICC는 2007년에야 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해외로 도피를 하던 라흐만이 2020년 자수하면서 첫 재판은 지난주에야 비로소 열렸습니다.

전범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단죄도 어렵습니다. 1990년대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서 최소한 13만 명을 학살한 책임자로 ICC에 기소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은 5년에 걸친 재판 도중 숨졌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재판이 중단되면서, 사법적 단죄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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