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미사일’…김정은 열병식의 정치학

입력 2022.04.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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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조만간 대규모 열병식을 열 것으로 보인다. 최대 2만 명의 병력과 각종 군용 장비가 동원될 것 같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평가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등 다수의 전략무기와 신형 중·단거리 미사일 등을 선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궁핍한 상황에서도 대규모 열병식을 강행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짚어봤다.

종소리가 자정을 알린다. "만세~ 만세." 수만 명의 함성이 거대한 광장을 채우고 넘친다. 익숙한 듯 등장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이 예상치 않았던 엄청난 도전과 장애로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올해 들어와 얼마나 많은 분이 혹독한 환경을 인내하며 분투해왔습니까.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방역 전선과 자연재해 복구 전선에서 우리 인민군 장병이 발휘한 애국적 헌신은 감사의 눈물 없이 대할 수 없습니다."

말로만이 아니었다. 실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너무도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다 목소리가 떨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고 이내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쳤다. 공식 석상에서 공개된 김 위원장의 첫 눈물. 202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열병식에서였다.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공개된 신형 ICBM. 사진 출처 : 연합뉴스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공개된 신형 ICBM.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눈물이 끝이 아니다...신형 ICBM도 공개

한 국가가 최대치의 '힘자랑'을 하는 열병식에서 최고 지도자가 가장 감성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북한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김 위원장의 표현 따라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코로나19와 각종 자연 재해를 맞닥뜨렸다. 2016년 제시했던 경제개발계획도 달성하지 못했고, 김 위원장이 몇 차례 현지 지도하며 "10월 10일까지 무조건 완성하라"고 지시한 평양종합병원도 결국 완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 뒤 열병식은 축제였다. 경제 부문의 미진한 성과는 군사력 과시로 대체했다. 초대형 방사포와 신형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북극성-4형) 등을 내놓았고, 바퀴가 22개나 달린 차량 위에 올린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화성-17형)까지 공개했다. 처음으로 열병식을 심야에 열면서 각종 LED 조명을 활용해 극적인 효과를 높였고 하늘엔 드론을 띄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예의 화려한 불꽃놀이도 수도의 하늘을 장식했다. 국가의 각종 실패는 이렇게 극복됐다.


■첫 등장도, 첫 육성 연설도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열병식을 체제 결속 등에 적극 활용해 왔다. 김일성과 김정일 집권 당시 각각 13회뿐이었던 열병식은 김정은 집권 10년 사이 벌써 11번이나 개최됐다. 극적인 모습도 자주 연출했다.

김 위원장이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201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년 기념 열병식이었다. 앞선 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지명됐던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똑 닮은 모습으로 주석단에 앉았다. 권력 승계자로서 처음으로 군부대의 열병 신고받는 모습을 해외 취재진에게 공개하며 대내외에 후계자의 지위를 공식화했다. 북한은 이 열병식을 자체 행사로는 처음으로 북한 내에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해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전까지 생중계된 행사는 2008년 뉴욕 필하모니 평양공연, 2009년과 2010년 월드컵 축구 예선전뿐이었다.

2012년 4월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생일 10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위원장. 김 위원장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공개했다.2012년 4월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생일 10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위원장. 김 위원장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김 위원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공개된 것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이른바 태양절 100주년 열병식에서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성과를 강조한 뒤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고 맺은 첫번째 대중 연설은 약 20분 동안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약 6개월 전 김정일 사망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뒤 개최한 첫 대규모 열병식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공개하면서 '김정은 시대'가 시작됐음을 공식화했다. 공개한 무기와 장비는 ICBM급 미사일 (KN-08) 등 34종 880여 대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새로운 무기와 부대 줄줄이 공개

열병식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각종 신무기다. 지난해 1월 8차 노동당대회를 기념한 열병식에서는 신형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 5형이 등장했고,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이라는 KN-23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2018년 2월 북한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는 전년도 시험발사에 성공했던 ICBM 화성14형과 화성 15형을 자랑스레 내놓았고,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화성 12형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북한은 화성 12형을 석 달 뒤 시험 발사하면서 전력화가 실현됐다고 주장했고, 올해 1월 품질을 검사하기 위한 시험발사인 '검수 사격'을 한다며 발사하기도 했다.

2021년 9월 북한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방역복을 쓴 부대가 등장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2021년 9월 북한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방역복을 쓴 부대가 등장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부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2013년 7월 열병식과 2015년 5월 열병식에서는 핵무기 마크가 그려진 배낭을 메고 있는 부대가 행진에 동참했다. 소형 전술핵을 휴대해 다니는 부대라거나 방사선 과다 피폭자 치료용품이 들어있다는 등의 추측이 나왔지만 실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9월에 있었던 열병식에서는 주황색 방역복에 방독면을 쓴 비상방역종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부대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소방차를 탄 사회안전군 소방대 종대가 참석하기도 했다.

■대화 국면에는 '저강도' 열병식

하지만 모든 열병식에서 신무기가 등장하거나 북한군을 '총동원'한 것은 아니다. 북미·남북 사이의 대화 국면에서는 규모를 조절하거나 아예 실시하지 않는 등 수위를 조절했다.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인 2018년 9월, 북한 정부 창립 70년 경축 열병식은 이례적으로 북한 내에 생중계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연설도, 신무기 공개도 없었다. 열병식에서의 선전구호와 간부들의 연설 모두 경제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2019년에는 아무런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2020년 10월까지 2년여 동안 열병식을 활용한 '정치'는 중단됐다.

북한이 다시 열병식을 개최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민간 위성 사진 등을 통해 군중 동원 등 준비 징후가 확인되고 있다. 오는 25일, 빨치산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이 열병식이 가능한 가장 근접한 시점으로 꼽힌다. 생중계를 하는지, 김정은 위원장이 육성 연설을 하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신무기를 공개하는지, 얼마나 많은 부대가 출현하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혹시 민방위에 해당하는 노농적위대만 동원되는지 등으로 열병식 뒤에 숨은 북한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오는 전환 기, 열병식을 통한 북한의, 김정은의 정치가 다시 시작됐다.

(그래픽 : 김현수 안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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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과 미사일’…김정은 열병식의 정치학
    • 입력 2022-04-21 06:00:16
    취재K

북한이 조만간 대규모 열병식을 열 것으로 보인다. 최대 2만 명의 병력과 각종 군용 장비가 동원될 것 같다는 게 우리 군 당국의 평가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등 다수의 전략무기와 신형 중·단거리 미사일 등을 선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궁핍한 상황에서도 대규모 열병식을 강행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짚어봤다.

종소리가 자정을 알린다. "만세~ 만세." 수만 명의 함성이 거대한 광장을 채우고 넘친다. 익숙한 듯 등장하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이 예상치 않았던 엄청난 도전과 장애로 참으로 힘겨웠습니다. 올해 들어와 얼마나 많은 분이 혹독한 환경을 인내하며 분투해왔습니까. 예상치 않게 맞닥뜨린 방역 전선과 자연재해 복구 전선에서 우리 인민군 장병이 발휘한 애국적 헌신은 감사의 눈물 없이 대할 수 없습니다."

말로만이 아니었다. 실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너무도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다 목소리가 떨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고 이내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쳤다. 공식 석상에서 공개된 김 위원장의 첫 눈물. 2020년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열병식에서였다.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에서 공개된 신형 ICBM.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눈물이 끝이 아니다...신형 ICBM도 공개

한 국가가 최대치의 '힘자랑'을 하는 열병식에서 최고 지도자가 가장 감성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만큼 북한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김 위원장의 표현 따라 '가혹하고 장기적인 제재 때문에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코로나19와 각종 자연 재해를 맞닥뜨렸다. 2016년 제시했던 경제개발계획도 달성하지 못했고, 김 위원장이 몇 차례 현지 지도하며 "10월 10일까지 무조건 완성하라"고 지시한 평양종합병원도 결국 완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 뒤 열병식은 축제였다. 경제 부문의 미진한 성과는 군사력 과시로 대체했다. 초대형 방사포와 신형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북극성-4형) 등을 내놓았고, 바퀴가 22개나 달린 차량 위에 올린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 ICBM(화성-17형)까지 공개했다. 처음으로 열병식을 심야에 열면서 각종 LED 조명을 활용해 극적인 효과를 높였고 하늘엔 드론을 띄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다. 예의 화려한 불꽃놀이도 수도의 하늘을 장식했다. 국가의 각종 실패는 이렇게 극복됐다.


■첫 등장도, 첫 육성 연설도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열병식을 체제 결속 등에 적극 활용해 왔다. 김일성과 김정일 집권 당시 각각 13회뿐이었던 열병식은 김정은 집권 10년 사이 벌써 11번이나 개최됐다. 극적인 모습도 자주 연출했다.

김 위원장이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201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년 기념 열병식이었다. 앞선 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지명됐던 김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과 똑 닮은 모습으로 주석단에 앉았다. 권력 승계자로서 처음으로 군부대의 열병 신고받는 모습을 해외 취재진에게 공개하며 대내외에 후계자의 지위를 공식화했다. 북한은 이 열병식을 자체 행사로는 처음으로 북한 내에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해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전까지 생중계된 행사는 2008년 뉴욕 필하모니 평양공연, 2009년과 2010년 월드컵 축구 예선전뿐이었다.

2012년 4월 15일 북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생일 100주년 열병식에 참석한 김정은 위원장. 김 위원장은 이날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공개했다.
김 위원장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공개된 것은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생일, 이른바 태양절 100주년 열병식에서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성과를 강조한 뒤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고 맺은 첫번째 대중 연설은 약 20분 동안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약 6개월 전 김정일 사망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뒤 개최한 첫 대규모 열병식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공개하면서 '김정은 시대'가 시작됐음을 공식화했다. 공개한 무기와 장비는 ICBM급 미사일 (KN-08) 등 34종 880여 대로 역대 최대 규모였다.

■새로운 무기와 부대 줄줄이 공개

열병식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각종 신무기다. 지난해 1월 8차 노동당대회를 기념한 열병식에서는 신형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인 북극성 5형이 등장했고,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이라는 KN-23이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2018년 2월 북한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는 전년도 시험발사에 성공했던 ICBM 화성14형과 화성 15형을 자랑스레 내놓았고,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화성 12형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북한은 화성 12형을 석 달 뒤 시험 발사하면서 전력화가 실현됐다고 주장했고, 올해 1월 품질을 검사하기 위한 시험발사인 '검수 사격'을 한다며 발사하기도 했다.

2021년 9월 북한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방역복을 쓴 부대가 등장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부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2013년 7월 열병식과 2015년 5월 열병식에서는 핵무기 마크가 그려진 배낭을 메고 있는 부대가 행진에 동참했다. 소형 전술핵을 휴대해 다니는 부대라거나 방사선 과다 피폭자 치료용품이 들어있다는 등의 추측이 나왔지만 실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9월에 있었던 열병식에서는 주황색 방역복에 방독면을 쓴 비상방역종대가 등장하기도 했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부대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해에는 소방차를 탄 사회안전군 소방대 종대가 참석하기도 했다.

■대화 국면에는 '저강도' 열병식

하지만 모든 열병식에서 신무기가 등장하거나 북한군을 '총동원'한 것은 아니다. 북미·남북 사이의 대화 국면에서는 규모를 조절하거나 아예 실시하지 않는 등 수위를 조절했다.

역사적인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인 2018년 9월, 북한 정부 창립 70년 경축 열병식은 이례적으로 북한 내에 생중계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연설도, 신무기 공개도 없었다. 열병식에서의 선전구호와 간부들의 연설 모두 경제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 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2019년에는 아무런 열병식이 열리지 않았다. 2020년 10월까지 2년여 동안 열병식을 활용한 '정치'는 중단됐다.

북한이 다시 열병식을 개최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민간 위성 사진 등을 통해 군중 동원 등 준비 징후가 확인되고 있다. 오는 25일, 빨치산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이 열병식이 가능한 가장 근접한 시점으로 꼽힌다. 생중계를 하는지, 김정은 위원장이 육성 연설을 하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 신무기를 공개하는지, 얼마나 많은 부대가 출현하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혹시 민방위에 해당하는 노농적위대만 동원되는지 등으로 열병식 뒤에 숨은 북한의 의도를 가늠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물러나고 윤석열 정부가 들어오는 전환 기, 열병식을 통한 북한의, 김정은의 정치가 다시 시작됐다.

(그래픽 : 김현수 안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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