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순경 총기난사’ 아들 잃고 40년…“훨훨 날고 싶어”

입력 2022.05.01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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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82년 4월 경남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순경 우범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과 수류탄을 난사했다. 26일 밤 9시 40분 시작된 범행은 이튿날 새벽 5시 35분까지, 우범곤이 자폭할 때까지 8시간 동안 이어졌다. 주민 62명이 숨졌다.


■용의자 진압 포기하고, 현장에 숨어 있던 경찰들

사건 사흘 뒤 합동조사반은 최재윤 의령경찰서장 등 경찰관 3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경찰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경찰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당시 최 서장은 근무지를 이탈해 부산에 있었다. 최 서장은 우범곤의 첫 범행이 시작되고 3시간여가 지난 다음 날 새벽 1시 20분 의령군 궁류면에 도착했고, 곧바로 범행 현장으로 가 용의자를 진압하지 않았다. 범행이 끝날 때까지 약 4시간 동안 궁류지서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민들을 대피시킬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허창순 궁류지서장 등 2명도 근무지를 이탈했다. 한 건설업체가 제공한 부곡온천을 관광하다 당일 밤 10시쯤 현장에 도착했다. 조사반은 이들 역시 현장에서 용의자 우범곤의 추적을 포기하고, 달아난 사실을 확인했다.

■“총기 난사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죽음”

유가족들은 이 참사를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라고 주장해 왔다. 용의자 우범곤이 경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8시간의 참극이 벌어지는 동안 경찰들은 범행 현장에 은신했고, 위험에 빠진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하지 않았다.

허술한 국가 공권력은 자질 검증도 없이 경찰을 채용했고, 만취한 순경은 아무런 제지 없이 무기고를 드나들며 자신이 보호해야 할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눴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 마을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하루아침에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 마을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수만 번을 자책해도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죽음

87살 전병태 씨는 사건 당시 진주 경상대학교에 다니던 19살 아들 전달배 씨를 잃었다. 육촌 누나 결혼식이 있으니 심부름을 도우라며 아들을 타지에서 고향으로 불러 들였다. 그날 총소리에 놀란 아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살피러 공부방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1982년 의령군 궁류면 우범곤 총기난사 참사 당시 19살 아들을 잃은 87살 전병태 씨1982년 의령군 궁류면 우범곤 총기난사 참사 당시 19살 아들을 잃은 87살 전병태 씨

꽃다운 청춘, 황망한 아들의 죽음을 위로할 비석 하나 세우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공포 정치를 안했습니까. 전두환 때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느 누가 공권력에 의해서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위령비 소리를 끄집어 낼 겁니까. 쥐도새도 모르게 안기부에 끌려가고서 죽을랑가. 보안사, 안기부, 군청 내무과, 경찰서 정보과가 쫙 누비고 있는데 입 밖에 내지도 못했어요. ”

■가슴 떨리는 군수와의 만남은 허무하게 끝나고....

전병태 씨가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였다. ‘촛불 혁명’을 거쳐 새 정권이 탄생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구나 실감했다. 이듬해 전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해 7월에는 KBS <속보이는 TV 인사이드>에서 우범곤 총기 난사사건이 재조명되었다. 전 씨는 의령군청 부속실에 전화했다. “오늘 KBS에서 우범곤 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군수님과 사모님까지 꼭 시청하시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고대했던 2018년 당시 이선두 의령군수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군수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차 올라가면서 고마 가슴이 덜덜덜 떨려. 얼굴에 홍조가 생기고 이러는기라. 그런데 내가 말이지. 군수님. 그 방송을 봤습니까? 하니까 안 봤다 카는기라. 내 가슴이 어떻겠습니까? 툭 떨어지지. 군수님. 우리가 위령비를 (화려하게) 잘 세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2억이 뭐 크다 하면 크지만 그냥 양지 바른 곳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거니 여론을 들어보겠습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40주기가 다 되어가는데 “여건이 성숙되면”?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령군은 물론 경상남도에도 등기로 수차례 민원을 넣었다. 혹시나 몰라 3천여 명으로부터 동의서까지 받아 두었다. 하지만 번번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상남도 (2018. 10)
“위령비 건립이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고, 지역 내에서도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면 재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령군 (2018. 10)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여건이 성숙되면 적극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남도 (2019. 3)
“민감한 사항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의견 수렴, 갈등 요인 해결 등 여건이 성숙되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령군 (2019. 3)
“슬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성숙돼지 않은 채로 건립이 추진될 경우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편지를 쓰고 전화도 했다. ‘힘 있는’ 인사를 다 찾아다녔다. 모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나서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전화 한 통만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두가 안타깝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뜻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40년 만에 건립되는 위령비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보는 공간”

참사 40주기를 맞는 올해 4월, 경남 의령군은 위령비와 추모공원을 건립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4년 만이다. 2021년 11월 국민청원이 잇따르면서 그 해 연말 정부가 국비 지원을 약속했다. 전체 사업비 15억 원 규모 추모공원은 내년 완공 예정이다.

의령군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죽어간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아픈 역사를 모두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건립이 확정된 날) 그 날짜도 기억합니다. 그날 점심을 먹고 휴대폰을 방에 놔두고 갔는데 보니까 군청에서 두 번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 내가 깜짝 놀라서 다시 전화를 했지. 소식을 듣는데 오죽 내가 기쁘면 훨훨 날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했어요.”

생때같은 아들을 앞세우고 인생의 절반 가까이 살아온 87살 전병태 씨. 소원대로 아들 전달배 씨의 비석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비극을 공유한 유족들이 한 데 모여 그날을 기억하며, 눈물이 나면 함께 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기쁘다고 말했다.

이 당연한 추모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연관 기사] ‘총기 난사’ 40주기…뒤늦은 위령비, 한 달래줄까?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49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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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순경 총기난사’ 아들 잃고 40년…“훨훨 날고 싶어”
    • 입력 2022-05-01 08:02:56
    취재K
1982년 4월 경남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순경 우범곤이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총과 수류탄을 난사했다. 26일 밤 9시 40분 시작된 범행은 이튿날 새벽 5시 35분까지, 우범곤이 자폭할 때까지 8시간 동안 이어졌다. 주민 62명이 숨졌다.

■용의자 진압 포기하고, 현장에 숨어 있던 경찰들

사건 사흘 뒤 합동조사반은 최재윤 의령경찰서장 등 경찰관 3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는 경찰서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4급지’에 속했다.
당시 최 서장은 근무지를 이탈해 부산에 있었다. 최 서장은 우범곤의 첫 범행이 시작되고 3시간여가 지난 다음 날 새벽 1시 20분 의령군 궁류면에 도착했고, 곧바로 범행 현장으로 가 용의자를 진압하지 않았다. 범행이 끝날 때까지 약 4시간 동안 궁류지서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주민들을 대피시킬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다.

허창순 궁류지서장 등 2명도 근무지를 이탈했다. 한 건설업체가 제공한 부곡온천을 관광하다 당일 밤 10시쯤 현장에 도착했다. 조사반은 이들 역시 현장에서 용의자 우범곤의 추적을 포기하고, 달아난 사실을 확인했다.

■“총기 난사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죽음”

유가족들은 이 참사를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라고 주장해 왔다. 용의자 우범곤이 경찰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8시간의 참극이 벌어지는 동안 경찰들은 범행 현장에 은신했고, 위험에 빠진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구호하지 않았다.

허술한 국가 공권력은 자질 검증도 없이 경찰을 채용했고, 만취한 순경은 아무런 제지 없이 무기고를 드나들며 자신이 보호해야 할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눴다.

하루아침에 부모와 형제, 자식을 잃은 사람들. 마을은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수만 번을 자책해도 돌이킬 수 없는 아들의 죽음

87살 전병태 씨는 사건 당시 진주 경상대학교에 다니던 19살 아들 전달배 씨를 잃었다. 육촌 누나 결혼식이 있으니 심부름을 도우라며 아들을 타지에서 고향으로 불러 들였다. 그날 총소리에 놀란 아들은 가족들의 안위를 살피러 공부방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1982년 의령군 궁류면 우범곤 총기난사 참사 당시 19살 아들을 잃은 87살 전병태 씨
꽃다운 청춘, 황망한 아들의 죽음을 위로할 비석 하나 세우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공포 정치를 안했습니까. 전두환 때 사건이 일어났는데. 어느 누가 공권력에 의해서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위령비 소리를 끄집어 낼 겁니까. 쥐도새도 모르게 안기부에 끌려가고서 죽을랑가. 보안사, 안기부, 군청 내무과, 경찰서 정보과가 쫙 누비고 있는데 입 밖에 내지도 못했어요. ”

■가슴 떨리는 군수와의 만남은 허무하게 끝나고....

전병태 씨가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였다. ‘촛불 혁명’을 거쳐 새 정권이 탄생하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었구나 실감했다. 이듬해 전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해 7월에는 KBS <속보이는 TV 인사이드>에서 우범곤 총기 난사사건이 재조명되었다. 전 씨는 의령군청 부속실에 전화했다. “오늘 KBS에서 우범곤 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군수님과 사모님까지 꼭 시청하시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고대했던 2018년 당시 이선두 의령군수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군수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계단을 차 올라가면서 고마 가슴이 덜덜덜 떨려. 얼굴에 홍조가 생기고 이러는기라. 그런데 내가 말이지. 군수님. 그 방송을 봤습니까? 하니까 안 봤다 카는기라. 내 가슴이 어떻겠습니까? 툭 떨어지지. 군수님. 우리가 위령비를 (화려하게) 잘 세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2억이 뭐 크다 하면 크지만 그냥 양지 바른 곳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거니 여론을 들어보겠습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40주기가 다 되어가는데 “여건이 성숙되면”?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령군은 물론 경상남도에도 등기로 수차례 민원을 넣었다. 혹시나 몰라 3천여 명으로부터 동의서까지 받아 두었다. 하지만 번번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경상남도 (2018. 10)
“위령비 건립이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고, 지역 내에서도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면 재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령군 (2018. 10)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여건이 성숙되면 적극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상남도 (2019. 3)
“민감한 사항으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의견 수렴, 갈등 요인 해결 등 여건이 성숙되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령군 (2019. 3)
“슬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정서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건이 성숙돼지 않은 채로 건립이 추진될 경우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지런히 편지를 쓰고 전화도 했다. ‘힘 있는’ 인사를 다 찾아다녔다. 모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나서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전화 한 통만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모두가 안타깝고 공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뜻 힘을 보태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40년 만에 건립되는 위령비 “아픈 역사를 되돌아 보는 공간”

참사 40주기를 맞는 올해 4월, 경남 의령군은 위령비와 추모공원을 건립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위령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4년 만이다. 2021년 11월 국민청원이 잇따르면서 그 해 연말 정부가 국비 지원을 약속했다. 전체 사업비 15억 원 규모 추모공원은 내년 완공 예정이다.

의령군은 국가 공권력에 의해 죽어간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아픈 역사를 모두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건립이 확정된 날) 그 날짜도 기억합니다. 그날 점심을 먹고 휴대폰을 방에 놔두고 갔는데 보니까 군청에서 두 번이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어. 내가 깜짝 놀라서 다시 전화를 했지. 소식을 듣는데 오죽 내가 기쁘면 훨훨 날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다고 했어요.”

생때같은 아들을 앞세우고 인생의 절반 가까이 살아온 87살 전병태 씨. 소원대로 아들 전달배 씨의 비석에 국화꽃 한 송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비극을 공유한 유족들이 한 데 모여 그날을 기억하며, 눈물이 나면 함께 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겨 기쁘다고 말했다.

이 당연한 추모의 권리를 확보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연관 기사] ‘총기 난사’ 40주기…뒤늦은 위령비, 한 달래줄까?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49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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