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자이니치 문제는 없다” 우토로 지켜낸 일본인의 말

입력 2022.05.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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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 문제'란 건 없다

일본에 자이니치 문제라는 건 없습니다. 자이니치 니혼진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일본 내 조선인 차별의 상징적인 공간인 '우토로(ウトロ)마을'의 문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문제라는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 씨. 40년 가까이 일본 내 조선인 마을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헌신해 온 우토로 평화기념관 다가와 관장을 만났습니다.

2022년 4월 30일,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이 열렸습니다. 이름에는 일반적으로 쓰는 '기념(記念)'이 아니라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기념(祈念)'이라고 썼습니다.


일본 교토부 우지(宇治)시 이세다초 51번지 우토로지구.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토비행장을 짓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던 숙소 '함바(飯場)'가 우토로 마을의 시작입니다.

2차대전 때 유대인들이 격리 구역인 '게토'에 갇혔던 것처럼 우토로는 '고립의 땅'이었습니다. 일본의 패전 후에도 조선인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로 방치됐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80년대까지 수도시설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일본 정부와 자치단체는 조선인 마을을 방치했습니다.

마을에 수도 시설이 없어 펌프로 물을 퍼올려 사용했던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마을에 수도 시설이 없어 펌프로 물을 퍼올려 사용했던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수도시설' 없는 우토로 보고 충격

다가와 씨가 우토로 운동에 뛰어든 것도 그런 열악한 환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우지시에 살면서도 조선인 마을에는 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우토로마을 '수도부설운동'에 나섰습니다.

우토로 출신 친구가 우지시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가르쳐줬습니다. 그 전까진 우토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 때까지 그녀가 걸어온 40여 년, 제가 걸어온 40여 년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우토로에 '수도 시설'이 없다는 걸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우지시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일단 가보자는 생각에 우토로로 갔습니다. 수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이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수도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전신입니다.


해방 뒤 우토로 마을의 땅 주인이 군수기업인 닛산차체(日産車体)에서 여러 차례 바뀌었고, 갈 곳 없는 주민들은 강제퇴거 위기에까지 내몰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1989년 일본 내의 양심적 변호사와 시민들이 모여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었고, 다가와 씨가 줄곧 대표를 맡아 왔습니다.


우토로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우토로 마을 지키기 활동 자료우토로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우토로 마을 지키기 활동 자료

■우토로 운동의 원동력 된 할머니들의 '정'

빈곤과 차별, 그에 대한 저항이 일상이었던 우토로 마을. 그 속에서도 우토로의 조선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여준 따뜻한 '정'이 다가와 씨가 우토로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냐'고 꼭 물어봤어요. 배가 고프다고 하면 김치랑 흰 밥만이라도 먹게 해주셨어요. 상대방이 배가 고픈 상태로는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았어요. 풍족한 생활이 절대 아니었지만 그런 따뜻함이 저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기념관 한 켠에 재일교포 1세였던 김군자 할머니의 집이 재현됐다기념관 한 켠에 재일교포 1세였던 김군자 할머니의 집이 재현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토로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0년 한일 시민사회 모금액으로 설립된 ‘우토로 민간기금재단’과 이듬해 한국 정부 지원금을 관리하는 ‘우토로 재단법인’이 우토로 땅의 3분의 1을 매입했습니다.

우토로 마을을 위한 모금운동에 사용했던 통장들우토로 마을을 위한 모금운동에 사용했던 통장들

우지시도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새 보금자리인 시영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2018년 60가구가 입주했고, 지금 추가로 짓고 있는 곳에 12세대가 입주할 예정입니다.

기념관 옆에 지어지고 있는 두 번째 시영주택. 재일교포 12세대가 입주 예정이다기념관 옆에 지어지고 있는 두 번째 시영주택. 재일교포 12세대가 입주 예정이다

우토로 마을에는 일본 내에 조선인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마을 자체가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면, 더구나 현재의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기적'같은 성과라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식 참석자들과 이를 취재 중인 한일 취재진들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식 참석자들과 이를 취재 중인 한일 취재진들

하지만 다가와 관장은 기념관 개관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함께 조선인 마을을 지켜내며 동고동락해온 재일교포 1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려 이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너무 유감스럽습니다. 유감스럽다는 건, 여기에 '우토로에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과거형으로 쓰인 것처럼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정말로 이 기념관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장 보여드리고 싶었던 분들에게 이 곳을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우토로마을 조선인들의 얼굴 옆에 ‘우토로에 살았던 사람들(ウトロに生きた人々)’이라고 쓰여 있다우토로마을 조선인들의 얼굴 옆에 ‘우토로에 살았던 사람들(ウトロに生きた人々)’이라고 쓰여 있다

■옛 모습은 사라지지만…

우토로 마을엔 아직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우토로마을 방화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일본 내 조선인 마을, 한국인에 대한 혐오가 남아있습니다.

다가와 관장은 이런 혐오와 차별 발언이나 범죄가 우토로의 문제가 아닌 일본, '일본인'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념관이 일본 내 편견을 없애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재일교포들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재일교포들

기념관에 와서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되면 생각도 달라질 거라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재일(在日) 문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지만 '재일 문제'라는 건 없습니다. 저는 줄곧 '재일 일본인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우토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이 기념관으로 인해 그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완화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친절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시영주택이 완성되면 우토로에 남아 있는 옛 집들은 모두 철거됩니다. 마을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지는 겁니다.

1940년대 만들어진 '함바'만을 그 모습 그대로 기념관 부지로 옮겨와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다가와 관장은 기념관 입구에서 2층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마을 광장'의 사진이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우토로의 사람들이 광장에 함께 모여 흥겹게 박수를 치고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우토로평화기념관. 2층 유리창 너머로 마을 광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정면에서 바라본 우토로평화기념관. 2층 유리창 너머로 마을 광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앞으로 마을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테지만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이런 광장의 역할을 계속 할 거라는 다짐도 함께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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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자이니치 문제는 없다” 우토로 지켜낸 일본인의 말
    • 입력 2022-05-04 07:00:11
    특파원 리포트

■'자이니치 문제'란 건 없다

일본에 자이니치 문제라는 건 없습니다. 자이니치 니혼진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일본 내 조선인 차별의 상징적인 공간인 '우토로(ウトロ)마을'의 문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의 문제라는 다가와 아키코(田川明子) 씨. 40년 가까이 일본 내 조선인 마을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헌신해 온 우토로 평화기념관 다가와 관장을 만났습니다.

2022년 4월 30일,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이 열렸습니다. 이름에는 일반적으로 쓰는 '기념(記念)'이 아니라 '평화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기념(祈念)'이라고 썼습니다.


일본 교토부 우지(宇治)시 이세다초 51번지 우토로지구.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토비행장을 짓기 위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살던 숙소 '함바(飯場)'가 우토로 마을의 시작입니다.

2차대전 때 유대인들이 격리 구역인 '게토'에 갇혔던 것처럼 우토로는 '고립의 땅'이었습니다. 일본의 패전 후에도 조선인들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로 방치됐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80년대까지 수도시설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일본 정부와 자치단체는 조선인 마을을 방치했습니다.

마을에 수도 시설이 없어 펌프로 물을 퍼올려 사용했던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수도시설' 없는 우토로 보고 충격

다가와 씨가 우토로 운동에 뛰어든 것도 그런 열악한 환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우지시에 살면서도 조선인 마을에는 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우토로마을 '수도부설운동'에 나섰습니다.

우토로 출신 친구가 우지시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처음 가르쳐줬습니다. 그 전까진 우토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 때까지 그녀가 걸어온 40여 년, 제가 걸어온 40여 년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우토로에 '수도 시설'이 없다는 걸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우지시에 그런 곳이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일단 가보자는 생각에 우토로로 갔습니다. 수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거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이건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 수도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게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의 전신입니다.


해방 뒤 우토로 마을의 땅 주인이 군수기업인 닛산차체(日産車体)에서 여러 차례 바뀌었고, 갈 곳 없는 주민들은 강제퇴거 위기에까지 내몰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1989년 일본 내의 양심적 변호사와 시민들이 모여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었고, 다가와 씨가 줄곧 대표를 맡아 왔습니다.


우토로평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우토로 마을 지키기 활동 자료
■우토로 운동의 원동력 된 할머니들의 '정'

빈곤과 차별, 그에 대한 저항이 일상이었던 우토로 마을. 그 속에서도 우토로의 조선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보여준 따뜻한 '정'이 다가와 씨가 우토로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냐'고 꼭 물어봤어요. 배가 고프다고 하면 김치랑 흰 밥만이라도 먹게 해주셨어요. 상대방이 배가 고픈 상태로는 절대로 돌려보내지 않았어요. 풍족한 생활이 절대 아니었지만 그런 따뜻함이 저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기념관 한 켠에 재일교포 1세였던 김군자 할머니의 집이 재현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토로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2010년 한일 시민사회 모금액으로 설립된 ‘우토로 민간기금재단’과 이듬해 한국 정부 지원금을 관리하는 ‘우토로 재단법인’이 우토로 땅의 3분의 1을 매입했습니다.

우토로 마을을 위한 모금운동에 사용했던 통장들
우지시도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새 보금자리인 시영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2018년 60가구가 입주했고, 지금 추가로 짓고 있는 곳에 12세대가 입주할 예정입니다.

기념관 옆에 지어지고 있는 두 번째 시영주택. 재일교포 12세대가 입주 예정이다
우토로 마을에는 일본 내에 조선인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이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마을 자체가 새롭게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면, 더구나 현재의 한일관계를 생각해보면 '기적'같은 성과라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개관식 참석자들과 이를 취재 중인 한일 취재진들
하지만 다가와 관장은 기념관 개관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고 했습니다. 함께 조선인 마을을 지켜내며 동고동락해온 재일교포 1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려 이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우 기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너무 유감스럽습니다. 유감스럽다는 건, 여기에 '우토로에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과거형으로 쓰인 것처럼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분들에게 정말로 이 기념관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장 보여드리고 싶었던 분들에게 이 곳을 보여드리지 못했다는 게 정말 아쉽습니다.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우토로마을 조선인들의 얼굴 옆에 ‘우토로에 살았던 사람들(ウトロに生きた人々)’이라고 쓰여 있다
■옛 모습은 사라지지만…

우토로 마을엔 아직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우토로마을 방화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일본 내 조선인 마을, 한국인에 대한 혐오가 남아있습니다.

다가와 관장은 이런 혐오와 차별 발언이나 범죄가 우토로의 문제가 아닌 일본, '일본인'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념관이 일본 내 편견을 없애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재일교포들
기념관에 와서 우토로 마을의 역사를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되면 생각도 달라질 거라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재일(在日) 문제'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지만 '재일 문제'라는 건 없습니다. 저는 줄곧 '재일 일본인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우토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이 기념관으로 인해 그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완화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친절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시영주택이 완성되면 우토로에 남아 있는 옛 집들은 모두 철거됩니다. 마을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지는 겁니다.

1940년대 만들어진 '함바'만을 그 모습 그대로 기념관 부지로 옮겨와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다가와 관장은 기념관 입구에서 2층 유리창 안으로 보이는 '마을 광장'의 사진이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우토로의 사람들이 광장에 함께 모여 흥겹게 박수를 치고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정면에서 바라본 우토로평화기념관. 2층 유리창 너머로 마을 광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앞으로 마을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테지만 우토로평화기념관이 이런 광장의 역할을 계속 할 거라는 다짐도 함께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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