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분단 뒤 첫 공식회담, 무슨 말을 했을까?

입력 2022.05.0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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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분단 26년 만에 남과 북의 당국자가 처음으로 공식 회담 석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자며 대한적십자사(남)와 조선적십자회(북)의 파견원이 판문점에서 만난 것입니다.

훗날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질 남북적십자회담, 그 시작을 담은 사료가 오늘(4일) 공개됐습니다.

통일부가 시범 공개한 천6백여 쪽 분량의 남북회담 사료집에는 당시 남북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동포들 반갑습니다"…26년 만의 안부 인사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자며 북한 적십자사에 회담을 제의합니다. 이를 북측이 수락하면서, 남북의 파견원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8월 20일 오전 11시 58분, 대한적십자사 이 모 서무부장 등 남측 파견원이 판문점 중립국 회의장으로 들어섰고, 3분 만인 12시 1분쯤, 조선적십자회 문화선전부 서 모 부부장 등 북측 파견원이 회의장에 입장했습니다.

이 부장이 먼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남북 분단 후 회담을 위해 처음으로 마주 앉은 남북 공식 대표의 첫 대화는 따뜻한 안부 인사였습니다.

남북적십자회담 관련 소식을 전달한 1973년 신문 (자료: KBS 뉴스)남북적십자회담 관련 소식을 전달한 1973년 신문 (자료: KBS 뉴스)

당시 회의록을 보면 남북의 파견원들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친분을 쌓아 갑니다. 고향과 자녀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키를 묻기도 하며, 훗날 남북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훈훈한 기류 속 팽팽한 긴장감도 감돕니다. 1971년 9월 16일 5번째로 만난 자리에서 북측 대표가 남한의 교육비가 비싸다고 말하자, 남측 대표는 북측에서 개인의 능력을 무능화시켜서 되겠느냐고 응수합니다.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기자들의 모습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기자들의 모습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 냉전 완화됐던 '데탕트' 바람 타고…남북도 '인도적 교류'

남북이 이렇게 마주 앉을 수 있던 건 1970년대 초 '데탕트'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멀어진 것을 계기로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갑니다. 냉전의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사진은 당시 닉슨 대통령이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와 체육 행사를 관람하는 모습 (자료: KBS 뉴스)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사진은 당시 닉슨 대통령이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와 체육 행사를 관람하는 모습 (자료: KBS 뉴스)

남북도 회담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갔습니다.

1971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는 남북적십자회담의 본회담을 준비하는 예비회담이 열렸습니다. 남북 적십자사의 대표들이 25차례의 전체회담과 16차례의 실무회담을 진행했습니다.

10월에 열렸던 2차 예비회담에서는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서를 채택하게 됩니다. 남북회담 연락사무소의 설치, 수행원의 수, 회의 기록 방법과 순서 등을 담은 이 합의서는 아직도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 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이산가족 문제 의제 설정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진행된 16차례의 실무회담 중 13차례의 회의는 의제를 논의하는 '의제문안' 실무회의로 진행됐습니다. 의제는 본회담에서 논의할 주제들로 회담의 핵심 요소입니다.

남북적십자사 본회담을 앞두고 ‘의제문안’ 실무회의를 하는 모습. ‘의제문안’ 실무회의는 1972년 2월부터 6월까지 13차례 진행됐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남북적십자사 본회담을 앞두고 ‘의제문안’ 실무회의를 하는 모습. ‘의제문안’ 실무회의는 1972년 2월부터 6월까지 13차례 진행됐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마지막 '의제문안' 실무회의가 열렸던 1972년 6월 5일, 남북은 적십자회담 본회의에서 논의할 의제 5개 항을 채택합니다.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교환,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 다섯 가지의 의제는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 의제들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 1,652쪽에 담긴 생생한 회의록…'국가 이익 침해' 26%는 "공란"

통일부가 이번에 공개한 남북회담 사료집은 1,652쪽 분량으로,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오간 당국자들의 발언을 가감 없이 볼 수 있습니다. 통일부는 사료 공개를 위해 지난 1월 1일 통일부 훈령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관계 기관 협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다만, 심의 과정에서 약 418페이지가 공란으로 처리됐습니다. 공개 예정이던 사료의 약 26%는 비공개 결정한 것입니다. 통일부는 훈령의 상위법인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실무 인력의 인적사항이나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 등은 비공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 사료집 추가 공개 예정…7·4 남북공동성명 회의록 주목

통일부는 이번 사료집 시범 공개를 시작으로 남북회담 사료집을 단계적으로 공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특히, 남북적십자회담과 비슷한 시기 진행됐던 '7·4 남북공동성명'의 회의록이 올해 안에 공개될지 주목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입니다. 그 막전막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일부의 공개 문서는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습니다. 문서 공개 목록과 열람 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을 참고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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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분단 뒤 첫 공식회담, 무슨 말을 했을까?
    • 입력 2022-05-04 09:48:40
    취재K

1971년 8월, 분단 26년 만에 남과 북의 당국자가 처음으로 공식 회담 석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자며 대한적십자사(남)와 조선적십자회(북)의 파견원이 판문점에서 만난 것입니다.

훗날 남북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질 남북적십자회담, 그 시작을 담은 사료가 오늘(4일) 공개됐습니다.

통일부가 시범 공개한 천6백여 쪽 분량의 남북회담 사료집에는 당시 남북이 나눈 대화가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동포들 반갑습니다"…26년 만의 안부 인사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하자며 북한 적십자사에 회담을 제의합니다. 이를 북측이 수락하면서, 남북의 파견원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8월 20일 오전 11시 58분, 대한적십자사 이 모 서무부장 등 남측 파견원이 판문점 중립국 회의장으로 들어섰고, 3분 만인 12시 1분쯤, 조선적십자회 문화선전부 서 모 부부장 등 북측 파견원이 회의장에 입장했습니다.

이 부장이 먼저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자 북측은 "동포들과 서로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남북 분단 후 회담을 위해 처음으로 마주 앉은 남북 공식 대표의 첫 대화는 따뜻한 안부 인사였습니다.

남북적십자회담 관련 소식을 전달한 1973년 신문 (자료: KBS 뉴스)
당시 회의록을 보면 남북의 파견원들은 만남을 거듭하면서 점차 친분을 쌓아 갑니다. 고향과 자녀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키를 묻기도 하며, 훗날 남북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서로의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훈훈한 기류 속 팽팽한 긴장감도 감돕니다. 1971년 9월 16일 5번째로 만난 자리에서 북측 대표가 남한의 교육비가 비싸다고 말하자, 남측 대표는 북측에서 개인의 능력을 무능화시켜서 되겠느냐고 응수합니다.

남북적십자회담 당시 기자들의 모습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 냉전 완화됐던 '데탕트' 바람 타고…남북도 '인도적 교류'

남북이 이렇게 마주 앉을 수 있던 건 1970년대 초 '데탕트'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멀어진 것을 계기로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갑니다. 냉전의 긴장이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72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사진은 당시 닉슨 대통령이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와 체육 행사를 관람하는 모습 (자료: KBS 뉴스)
남북도 회담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갔습니다.

1971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는 남북적십자회담의 본회담을 준비하는 예비회담이 열렸습니다. 남북 적십자사의 대표들이 25차례의 전체회담과 16차례의 실무회담을 진행했습니다.

10월에 열렸던 2차 예비회담에서는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서를 채택하게 됩니다. 남북회담 연락사무소의 설치, 수행원의 수, 회의 기록 방법과 순서 등을 담은 이 합의서는 아직도 남북회담 운영의 기본 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이산가족 문제 의제 설정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진행된 16차례의 실무회담 중 13차례의 회의는 의제를 논의하는 '의제문안' 실무회의로 진행됐습니다. 의제는 본회담에서 논의할 주제들로 회담의 핵심 요소입니다.

남북적십자사 본회담을 앞두고 ‘의제문안’ 실무회의를 하는 모습. ‘의제문안’ 실무회의는 1972년 2월부터 6월까지 13차례 진행됐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마지막 '의제문안' 실무회의가 열렸던 1972년 6월 5일, 남북은 적십자회담 본회의에서 논의할 의제 5개 항을 채택합니다.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교환,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등 다섯 가지의 의제는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 의제들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 1,652쪽에 담긴 생생한 회의록…'국가 이익 침해' 26%는 "공란"

통일부가 이번에 공개한 남북회담 사료집은 1,652쪽 분량으로,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오간 당국자들의 발언을 가감 없이 볼 수 있습니다. 통일부는 사료 공개를 위해 지난 1월 1일 통일부 훈령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관계 기관 협의를 진행해 왔습니다.

다만, 심의 과정에서 약 418페이지가 공란으로 처리됐습니다. 공개 예정이던 사료의 약 26%는 비공개 결정한 것입니다. 통일부는 훈령의 상위법인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실무 인력의 인적사항이나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침해할 우려가 있는 부분 등은 비공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북적십자회담 예비회담이 열린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에 취재진이 몰려 있다 (자료: 남북회담 사료집)
■ 사료집 추가 공개 예정…7·4 남북공동성명 회의록 주목

통일부는 이번 사료집 시범 공개를 시작으로 남북회담 사료집을 단계적으로 공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특히, 남북적십자회담과 비슷한 시기 진행됐던 '7·4 남북공동성명'의 회의록이 올해 안에 공개될지 주목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7월 4일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성명입니다. 그 막전막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통일부의 공개 문서는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을 직접 방문해 열람할 수 있습니다. 문서 공개 목록과 열람 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을 참고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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