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이은해 공소장에도 적힌 ‘가스라이팅’…시초는 흑백 영화?

입력 2022.05.08 (07:01)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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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급한 돈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계곡 살인 사건' 피의자 이은해는 수시로 남편을 몰아붙였다. 정당한 문제 제기에도 헤어지고 싶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검찰은 공소장에 이 씨가 남편을 '가스라이팅'했다고 적었다. 상대 방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가스 등불'을 뜻하는 이 단어가 어쩌다 심리적 지배 행위를 이르는 용어가 됐을까.

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

'가스라이팅'의 원조는 조지 큐커 감독의 1944년 작 〈가스등〉이다. 영화 제목이 그대로 용어가 됐다. 그만큼 교묘한 심리 지배의 기법이 고스란히 담겼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하는 젊은 아내 '폴라'는 매일 밤 신혼 집을 떠나 작업실로 사라지는 남편을 의심한다. 남편이 떠난 뒤엔 천장에 매달린 가스 등불이 희미해진다. 샤워 도중 설거지를 하면 수압이 약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처음엔 다른 방에서 불이 켜졌나 보다 생각하지만, 불을 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체 모를 발걸음 소리도 폴라를 괴롭히지만, 남편은 신경 과민이라고 몰아붙인다.

뻔한 플롯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호소력은 상당하다. 콕 집어 설명할 순 없는 찜찜함, 당하는 사람만 아는 '미치고 팔짝 뛸' 억울함이 겹겹이 쌓인다. "당신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잖아." 지나가는 말처럼 남편이 말을 던진 뒤 폴라는 진짜로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 "당신은 환자야. 몸이 아프니 파티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진심으로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배려일까, 아니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막으려는 교묘한 통제술일까?

갓 결혼한 여성의 질투,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등 폴라의 이상 행동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앞뒤 정황을 다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마법은 자욱한 런던 밤거리 안개처럼 관객의 눈을 가린다. 어느 정도 남편의 비밀이 드러난 뒤에도, 관객 마저 폴라가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후반부의 몇 분이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

영화에서 폴라는 남편과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을 결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었고, 대신 돌봐 주던 이모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등 한동안 불행하기만 해서 행복을 모르겠다는 대사도 등장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는 게 '포식자'들의 특기다.

남편 그레고리는 결혼 전 잠시 시간을 갖겠다며 떠난 폴라의 여행지에 말없이 나타나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소중한 이모의 물건들도 죄다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빨리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권한다. 버릇없는 하녀는 혼을 내기는커녕 불손한 태도를 부추기고, 하인들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아내에게 억지로 명령을 내리라고 윽박지른다. 한 번도 폴라를 때리거나, 대놓고 '당신은 미쳤다'고 말하지 않지만, 폴라 스스로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가스라이팅'의 무서움이다.

감독은 인물의 그림자를 통해 점점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부부 사이를 표현했다. 큼직한 두 눈으로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는 잉그리드 버그먼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눈썹 하나로 자상한 남편에서 집안의 폭군을 오가는 샤를 보와이에를 빼놓고 상상하긴 힘들다. 그레고리가 아내를 옭아매는 이유가 무엇인지, 폴라는 이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알고 싶다면 영화를 봐야 한다. 유튜브와 '왓챠'에서 볼 수 있고, 비슷한 영화를 더 보고 싶다면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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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이은해 공소장에도 적힌 ‘가스라이팅’…시초는 흑백 영화?
    • 입력 2022-05-08 07:01:17
    • 수정2022-12-26 09:39:22
    씨네마진국
"내가 급한 돈이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계곡 살인 사건' 피의자 이은해는 수시로 남편을 몰아붙였다. 정당한 문제 제기에도 헤어지고 싶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검찰은 공소장에 이 씨가 남편을 '가스라이팅'했다고 적었다. 상대 방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가스 등불'을 뜻하는 이 단어가 어쩌다 심리적 지배 행위를 이르는 용어가 됐을까.

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
'가스라이팅'의 원조는 조지 큐커 감독의 1944년 작 〈가스등〉이다. 영화 제목이 그대로 용어가 됐다. 그만큼 교묘한 심리 지배의 기법이 고스란히 담겼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하는 젊은 아내 '폴라'는 매일 밤 신혼 집을 떠나 작업실로 사라지는 남편을 의심한다. 남편이 떠난 뒤엔 천장에 매달린 가스 등불이 희미해진다. 샤워 도중 설거지를 하면 수압이 약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처음엔 다른 방에서 불이 켜졌나 보다 생각하지만, 불을 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체 모를 발걸음 소리도 폴라를 괴롭히지만, 남편은 신경 과민이라고 몰아붙인다.

뻔한 플롯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호소력은 상당하다. 콕 집어 설명할 순 없는 찜찜함, 당하는 사람만 아는 '미치고 팔짝 뛸' 억울함이 겹겹이 쌓인다. "당신은 물건을 잘 잃어버리잖아." 지나가는 말처럼 남편이 말을 던진 뒤 폴라는 진짜로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다. "당신은 환자야. 몸이 아프니 파티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진심으로 아내를 걱정하는 남편의 배려일까, 아니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막으려는 교묘한 통제술일까?

갓 결혼한 여성의 질투,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등 폴라의 이상 행동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앞뒤 정황을 다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마법은 자욱한 런던 밤거리 안개처럼 관객의 눈을 가린다. 어느 정도 남편의 비밀이 드러난 뒤에도, 관객 마저 폴라가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후반부의 몇 분이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 ‘가스등(1944)’의 한 장면. 출처 IMDB.
영화에서 폴라는 남편과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을 결심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렸을 때 엄마를 잃었고, 대신 돌봐 주던 이모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등 한동안 불행하기만 해서 행복을 모르겠다는 대사도 등장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취약한 상대를 한눈에 알아보는 게 '포식자'들의 특기다.

남편 그레고리는 결혼 전 잠시 시간을 갖겠다며 떠난 폴라의 여행지에 말없이 나타나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소중한 이모의 물건들도 죄다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빨리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권한다. 버릇없는 하녀는 혼을 내기는커녕 불손한 태도를 부추기고, 하인들을 존중하고 싶어 하는 아내에게 억지로 명령을 내리라고 윽박지른다. 한 번도 폴라를 때리거나, 대놓고 '당신은 미쳤다'고 말하지 않지만, 폴라 스스로 자기가 미쳤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가스라이팅'의 무서움이다.

감독은 인물의 그림자를 통해 점점 무게추가 기울어지는 부부 사이를 표현했다. 큼직한 두 눈으로 풍부한 감정을 전달하는 잉그리드 버그먼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눈썹 하나로 자상한 남편에서 집안의 폭군을 오가는 샤를 보와이에를 빼놓고 상상하긴 힘들다. 그레고리가 아내를 옭아매는 이유가 무엇인지, 폴라는 이 마수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 알고 싶다면 영화를 봐야 한다. 유튜브와 '왓챠'에서 볼 수 있고, 비슷한 영화를 더 보고 싶다면 폴란스키 감독의 '악마의 씨(1968)'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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