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개척단을 아십니까?…“국가가 세운 반인권 수용소” 첫 인정

입력 2022.05.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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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끌고 갔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고아'나 '부랑인'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때렸습니다. 죽도록 일을 시켜댔습니다. 1,700명 넘게 생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삼청교육대 피해자의 말로 읽힙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증언 같기도 합니다. 실은 서산개척단 사건 입니다.

■ "수년간 지옥 같은 삶의 연속"…폭력의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

"속옷만 입은 채로 한밤중에 끌려갔지. 종일 얻어터지는 바람에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음날 눈이 떠지더라고. 그 뒤로부터 수년간 지옥이 펼쳐졌지"
- 서산개척단 생존자 정영철 씨

60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는 정영철 씨. 서산개척단 사건의 생존자입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끔찍한 폭력의 기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2018년 3월 15일 〈뉴스9〉와 인터뷰한 정영철 씨.2018년 3월 15일 〈뉴스9〉와 인터뷰한 정영철 씨.

1960년대 초 서산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어떤 경험을 했기에 정영철 씨는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 "공짜로 땅 주겠다더니"…서산개척단 사건을 아시나요?

1960년대 초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회정화정책을 명분 삼아 충남 서산에 사업단을 세우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사업에 참여하는 일꾼은 전국의 연고지 없는 이들. 1,700여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경찰과 군인이 마구잡이로 체포해 끌고 왔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폐염전을 개간하면, 대가로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파란 청춘들이 수년 동안 아래 사진과 같은 강제 노역을 견뎠던 건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서산개척단원들이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도비산에서 돌을 나르는 모습 (사진제공 : 진실화해위원회)서산개척단원들이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도비산에서 돌을 나르는 모습 (사진제공 : 진실화해위원회)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습니다. 살아남은 피해자와 가족 270여 명이 진상 규명과 함께 당시 정부가 약속한 토지 배분을 요구한 건 당연한 흐름이었습니다.

■ 진실화해위원회 "이 사건은 국가의 폭력…사과·배상 권고"

숱한 요청 끝에 법령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 기관 '진실화해위원회 2기'는 2020년 말부터 '서산개척단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13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진화위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국가가 자행한 중대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사과와 함께 당시 개간 참여 정도를 고려해 적당한 보상도 함께 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 국가의 집단 인권침해를 인정한 첫 사례

이번 결정이 의미는 남다릅니다. 과거 국가가 행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 가운데 처음 진실을 규명했다는 점인데요.

다시 말해, 정부 기관이 군사정부 시절 국가가 자행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 가운데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들춰낸 첫 사례라는 겁니다.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삼청교육대 사건도, 형제복지원 사건도 다 진실이 드러나고 국가가 사과하지 않았었나?

취재진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형제복지원은요? 삼청교육대는요?"라고 진실화해위원회에 물었습니다.

진화위는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은 '아직도 조사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무려 3백여 건의 사건이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 많다는 뜻이죠.


■ 진화위 "형제복지원·삼청교육대도 조사 중"…남겨진 숙제만 300건

한 번 몸에 새겨진 폭력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폭력을 행사한 주체가 공권력을 가진 국가라면, 개인 받은 상처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의 시작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샅샅이 규명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의 과오를 마주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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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개척단을 아십니까?…“국가가 세운 반인권 수용소” 첫 인정
    • 입력 2022-05-12 07:00:11
    취재K

어느 날 갑자기 끌고 갔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고아'나 '부랑인'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때렸습니다. 죽도록 일을 시켜댔습니다. 1,700명 넘게 생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삼청교육대 피해자의 말로 읽힙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증언 같기도 합니다. 실은 서산개척단 사건 입니다.

■ "수년간 지옥 같은 삶의 연속"…폭력의 주체는 '대한민국 정부'

"속옷만 입은 채로 한밤중에 끌려갔지. 종일 얻어터지는 바람에 죽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음날 눈이 떠지더라고. 그 뒤로부터 수년간 지옥이 펼쳐졌지"
- 서산개척단 생존자 정영철 씨

60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는 정영철 씨. 서산개척단 사건의 생존자입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끔찍한 폭력의 기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2018년 3월 15일 〈뉴스9〉와 인터뷰한 정영철 씨.
1960년대 초 서산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어떤 경험을 했기에 정영철 씨는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 "공짜로 땅 주겠다더니"…서산개척단 사건을 아시나요?

1960년대 초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회정화정책을 명분 삼아 충남 서산에 사업단을 세우고, 대규모 간척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사업에 참여하는 일꾼은 전국의 연고지 없는 이들. 1,700여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경찰과 군인이 마구잡이로 체포해 끌고 왔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폐염전을 개간하면, 대가로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파란 청춘들이 수년 동안 아래 사진과 같은 강제 노역을 견뎠던 건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서산개척단원들이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도비산에서 돌을 나르는 모습 (사진제공 : 진실화해위원회)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렸습니다. 살아남은 피해자와 가족 270여 명이 진상 규명과 함께 당시 정부가 약속한 토지 배분을 요구한 건 당연한 흐름이었습니다.

■ 진실화해위원회 "이 사건은 국가의 폭력…사과·배상 권고"

숱한 요청 끝에 법령에 따라 만들어진 국가 기관 '진실화해위원회 2기'는 2020년 말부터 '서산개척단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13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진화위는 '서산개척단 사건'을 국가가 자행한 중대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국가는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사과와 함께 당시 개간 참여 정도를 고려해 적당한 보상도 함께 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 국가의 집단 인권침해를 인정한 첫 사례

이번 결정이 의미는 남다릅니다. 과거 국가가 행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 가운데 처음 진실을 규명했다는 점인데요.

다시 말해, 정부 기관이 군사정부 시절 국가가 자행한 집단 인권침해 사건 가운데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들춰낸 첫 사례라는 겁니다.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삼청교육대 사건도, 형제복지원 사건도 다 진실이 드러나고 국가가 사과하지 않았었나?

취재진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형제복지원은요? 삼청교육대는요?"라고 진실화해위원회에 물었습니다.

진화위는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은 '아직도 조사 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무려 3백여 건의 사건이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 많다는 뜻이죠.


■ 진화위 "형제복지원·삼청교육대도 조사 중"…남겨진 숙제만 300건

한 번 몸에 새겨진 폭력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폭력을 행사한 주체가 공권력을 가진 국가라면, 개인 받은 상처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의 시작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샅샅이 규명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의 과오를 마주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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