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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통치성에 대한 공포와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 - 김훈 ‘칼의 노래’
입력 2022.05.12 (17:35) 수정 2022.05.12 (17:36) 취재K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줄곧 김훈의 <칼의 노래>에 붙어 다니는 헌사다. 과잉 수사라는 비판에 직면할 법도 하련만 <칼의 노래>를 꾸미는 말로 여전히 굳건하다. 이 구절만큼 <칼의 노래>가 지니는 특이성과 가치를 정확하게 짚어낸 구절을 찾기 힘든 까닭일 게다. 그렇다. <칼의 노래>는 작품이 발표된 그때도, 적잖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위의 구절이 암시하듯 <칼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 한국문학의 기대지평 너머에서 온 작품이다. <칼의 노래>를 보고서야 한국문학 전반은 한국문학에 이제까지 이런 작품이 없었음을, 사실 오래 전부터 이런 작품이 필요했었음을 절감한다. 그러니 <칼의 노래> 이후 <칼의 노래>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이 연이어졌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길지 않은 글이므로 결론부터 말해 놓자. <칼의 노래>는 한국문학사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경향을 출발시킨 획시기적(劃時期的) 작품이자 21세기 한국문학 전반을 한껏 풍요롭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능을 행사한 바로 그 작품이다.

<칼의 노래>가 획시기적인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의 재발견 혹은 또 다른 이순신의 창조.

말로는 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 사실이다. 이순신이 누군가. <칼의 노래>의 질문법대로 하자면 누가 이순신인가.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 아닌가. 영웅도 그냥 영웅인가. 극한상황에서 나라를 구해내 성웅(聖雄)이라는 칭호를 얻은 절대지존의 존재 아닌가. 성웅이라는 칭호 외에 그 어느 접근법도 허용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상징물. 이런 점을 고려하면 대문자 역사가 누대에 걸쳐 거의 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순신상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이순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것은 금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대문자 역사에 대한 선전포고에 다름아니라고 해야 맞다.

<칼의 노래>는 그러나 그 일을 감행한다. 그리고 대문자 역사가 견고하게 구축해온 이순신상과 전혀 다른 이순신의 형상을 핍진하게 창조해낸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칼의 노래>는 또 다른 이순신상을 위해, 그러니까 또 다른 이순신상을 통해 현재의 상징질서의 총화인 대문자 역사를 균열시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칼의 노래>의 이순신상은 대문자 역사가 악착스럽게 반복해온, 그리고 현재의 상징질서가 집요하게 고박시킨 이순신상에 단호하게 저항한다.

그렇다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상이 그간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낯선 사실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다. 그것들이야말로 이순신 삶의 뼈대를 이루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배제한다면 이는 이순신의 재창조가 아니라 이순신의 왜곡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칼의 노래>에 그려진 이순신에게도 나라에 대한 사랑, 나라의 중심인 임금에 대한 충정, 백성과 국토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 <칼의 노래>는 여기에 이순신의 또 다른 삶의 흔적 약간을 추가한다. 아마도 작가가 이순신의 삶의 흔적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발굴했을 이것은 기존의 이순신상과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길항하면서 이전과 다른 이순신상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삶의 요소로 외삽한 것 중 크게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통치성(혹은 장치)에 대한 불안과 공포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 국토의 모든 것을 유린하는 왜적으로부터 백성을 위시한 나라 안의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싸움에서 이겨야 나라 안의 모든 생명이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만큼 <칼의 노래>의 이순신 역시 그 싸움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임금의 명을 충직하게 따르며 왜적의 칼날 아래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해내고자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위계화하고 통제하는 통치성(아감벤의 용어에 따르자면)에 대한 불안과 공포다. <칼의 노래>는 끼니, 노동, 몸, 냄새, 배고픔, 슬픔, 사실들, 실제들, 실재들, 실체들, 백성들의 희망과 원망, 고통, 고유성, 이질성, 환원불가능한 가치들 같은 것들을 묶고 구성하고 분할하고 분류하고 질서화하는 통치성을 작중화자인 이순신의 말을 빌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이라고 부른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 따르면 통치성은 비록 한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다는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나 그것은 곧 자립화되어 생명체들의 목소리와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것은 오로지 통치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을 서슴없이 벌이는가 하면, 전쟁 중에 적과 싸우는 장수를 죄인으로 잡아들인다.(<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한평생을 다루되, 이순신의 파직과 문초, 그리고 백의종군 시절로부터 소설이 열리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이 통치성이 영 불만이다. 그는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혹은 ‘눈으로 본 것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라는 원칙으로 정언명령으로 삼는 실재주의자다. 그런 까닭에 그는 통치성 바깥의 실재들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아니 실재들을 본 상태에서 형성된 앎을 죄악시하는 ‘허망하고 무내용한’ 통치성에 일체 동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불만은 곧 불안과 공포로 바뀐다. 세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통치성이 아무리 저항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완강한 까닭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 국토를 침탈한 왜국의 통치성은 물론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백성의 안위는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종묘사직의 체통에 집착하는 조선의 통치성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저항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 어떠한 통치성에도 더 이상 그렇게 통치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여러 겹의 통치성과 대치하고 결사항전을 벌인다. 하지만 여러 겹의 통치성은 이순신의 저항을 교묘한 감시와 처벌의 장치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통제한다. 이 견고한 통치성 앞에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줄곧 불안과 공포에 떤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내내 자신이 ‘나는 온 천지의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낀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삶에 외삽한 또 하나의 요소는 개별적인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교감이다.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에게 한편으로는 분노를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를 엿보곤 하는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 전부와 단독자로 홀로 맞서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 누구인가와 교감하고 연대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연대하는 존재들은 크게 세 부류이다. 우선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 중에서 설핏 맨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종묘사직의 법통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 다른 존재자에 의해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임금에서부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드러내는 왜적에게도 연민의 정동을 느낀다. 그러니까 통치성에 ‘순종하는 신체들’ 중 그들이 그 어떤 계기에 의해 통치성의 그늘에서 벗어날 경우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들을 연민으로 감싸안는다. 말하자면 이순신은 그가 누구이든 그를 개별적인 존재로 마주할 경우 그 존재에게 무한한 연민과 연대를 느낀다. 존재들 모두가 제각각의 개별적인 존재이(고자 하)나 통치성에 의해 존재자로서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때문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속수무책으로 통치성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자들에게는 분노와 두려움을 숨기지 않지만 통치성에 의해 죽음의 존재로 전락한 또는 존재의 죽음에 전율하는 존재들에게는 뜨거운 연민과 동질감을 나눈다. 뿐만 아니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필연의 이치로 그 악착스러운 통치성의 압제 속에서도 그 통치성에 의해 그렇게 통치되지 않으려는 하는 존재 혹은 그 통치성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누구라도 고개를 숙인다. 한마디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통치성에는 충성하지 않되, 그 통치성 안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무존재성에 절망하며 어쩔 수 없이 순종적 신체로 살아가는 개별적이(고자 하)는 존재들에게는 깊은 연대를 느낀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연대하는 두 번째 부류는 통치성에 의해서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왜국의 통치성과 조선의 통치성, 그리고 명나라의 통치성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그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하는 조선의 백성들을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을 이를 악물고 씹어삼킨다. 이순신이 ‘보아 아는’ 조선의 백성들은 왜국과 조선의 통치성의 각축 속에서 조선 백성-왜군-조선군 사이를 오가며 겨우 목숨을 연명할 뿐 아니라 죽어서도 코와 귀가 잘리는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백성들이 오로지 통치성의 단순한 제물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통치성이 그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면서도 그들의 생명은 물론 죽음마저도 도구로만 이용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통치성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한편, 통치성의 외곽에서 통치성 바깥의 실재와 종종 외설적으로 조우하는 까닭에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감과 세계관을 지닌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론적 조건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견고한 통치성 외에 새로운 실재적 공동체를 갈구하는 존재들이 되며, 역시 그 때문에 이들과 이순신 사이에는 끈적끈적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어느 순간에는 인간 존재(자)들보다 비인간적 존재들에게 더 외경에 가까운 일체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들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존중하는 세 번째 부류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삶의 경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사물, 그리고 세계의 질서에 세심한 시선을 던진다. 특히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대지와 바다의 생명체들은 물론 날씨나 물때 등 자연의 질서가 목소리 없이 전달하는 소리들을 무엇보다 경청한다. 경청할 뿐만 아니라 외경한다. 이렇게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인간 중심의 통치성의 원리가 인간을 위한 생명없는 사물로 도구화시킨 모든 비인간적 존재 혹은 객체들을 인간만큼 의미 있는 그것으로 귀환시키고 복권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아주 일찍 ‘객체들과의 민주주의’를 꿈꾼 존재이고, 또한 그를 위해 ‘비인간적인 존재들과의 연대’를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구축하고자 한 그런 인물이라 부를 수 있다.

<칼의 노래>는 이처럼 이순신의 삶에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새로 추가한다. 그뿐인데, 그러니까 다만 두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 이 두 개의 요소 중심으로 이순신의 삶을 재구성했을 뿐인데, <칼의 노래>에 그려진 이순신의 형상은 이전 이순신과는 전혀 다른 이순신이 된다. <칼의 노래>에 따르면 이순신은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으로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던 이다. 다시말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자신의 통치성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 더 악랄한 적(왜적)과 싸우는 한편 역시 조선의 ‘사직’을 위해 조선의 백성 그중에서도 특히 ‘용맹’한 존재라면 더 서슴없이 처형하는 조선의 통치성에도 맞선다. 이순신은 왜적과 맞서 목숨 걸고 싸우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조선의 임금을 위한 싸움으로 비쳐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조선의 소중한 생명 모두를 지켜내고자 한 결사항전이며, 이러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적의 적으로서 죽’고자 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이제까지 우리가 말해온 맥락으로 바꿔보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오로지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것은 물론 전쟁을 치르면서는 모든 소중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여러 겹의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에 온몸으로 저항한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의 공동체 건설’과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찾아낸 탈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칼의 노래>가 기존의 이순신상을 해체하고 또 다른 이순신상을 발명했다고 해서 오랜 기간 견고하게 구축되어온 이순신상이 한순간에 균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칼의 노래>에 대한 독자들의 열띤 호응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순신 하면 왜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낸 성웅의 이미지가 압도적인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칼의 노래>로 인해 이순신의 삶을 오로지 왜국에 대한 적대감과 조선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이순신의 삶에는 은밀하게 조선이라는 국가-기구에 대한 저항도 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칼의 노래>의 사건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칼의 노래> 이후로 이제 누구도 이순신을 앞세워 통치성 혹은 이념에 충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쉽게 설파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통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삶의 필요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경우 이순신을 앞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국가-기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앞세워 통치성에의 순종을 이념화하고자 할 경우에도 우리는 이순신을 떠올리며 그러한 상징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을 엄호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 아닌가를 의심할 수 있게도 되었다. 이 모든 게 <칼의 노래> 덕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이처럼 <칼의 노래>는 충분히 문학사적 사건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칼의 노래> 이후로 기존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칼의 노래> 이후로 우리는 역사를 ‘살아 있는 전사(前史)’ 정도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충만한 그때’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아마도 <칼의 노래> 이후로도 역사를 단순히 ‘살아 있는 전사’로만 형상화하는 소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칼의 노래>는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말이 <칼의 노래>가 그 어떤 흠결도 없는 천의무봉의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칼의 노래>는 벤야민적 맥락에서 ‘완벽한 작품’에 가깝다. 일찍이 어느 글에선가 벤야민은 ‘중요한 작품은 장르를 세우거나 아니면 지양하는 작품이며, 완벽한 작품들에서 그 둘은 합쳐진다’고 한 적이 있는 바, 이 문맥을 좇아 <칼의 노래>를 맥락화하자면 <칼의 노래>는 기존의 역사소설을 지양하고 전혀 새로운 역사소설의 문법을 만들어낸 바로 그 소설이라 할 수 있다.아무래도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수식어는 <칼의 노래>를 꾸미는 말로 한동안 계속 붙어 다녀야 할 모양이다.

류보선 문학평론가·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비평] 통치성에 대한 공포와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 - 김훈 ‘칼의 노래’
    • 입력 2022-05-12 17:35:14
    • 수정2022-05-12 17:36:03
    취재K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 줄곧 김훈의 <칼의 노래>에 붙어 다니는 헌사다. 과잉 수사라는 비판에 직면할 법도 하련만 <칼의 노래>를 꾸미는 말로 여전히 굳건하다. 이 구절만큼 <칼의 노래>가 지니는 특이성과 가치를 정확하게 짚어낸 구절을 찾기 힘든 까닭일 게다. 그렇다. <칼의 노래>는 작품이 발표된 그때도, 적잖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위의 구절이 암시하듯 <칼의 노래>는 어떤 면에서 한국문학의 기대지평 너머에서 온 작품이다. <칼의 노래>를 보고서야 한국문학 전반은 한국문학에 이제까지 이런 작품이 없었음을, 사실 오래 전부터 이런 작품이 필요했었음을 절감한다. 그러니 <칼의 노래> 이후 <칼의 노래>의 계보를 잇는 작품들이 연이어졌음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길지 않은 글이므로 결론부터 말해 놓자. <칼의 노래>는 한국문학사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경향을 출발시킨 획시기적(劃時期的) 작품이자 21세기 한국문학 전반을 한껏 풍요롭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능을 행사한 바로 그 작품이다.

<칼의 노래>가 획시기적인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의 재발견 혹은 또 다른 이순신의 창조.

말로는 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닌 것이 사실이다. 이순신이 누군가. <칼의 노래>의 질문법대로 하자면 누가 이순신인가.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 아닌가. 영웅도 그냥 영웅인가. 극한상황에서 나라를 구해내 성웅(聖雄)이라는 칭호를 얻은 절대지존의 존재 아닌가. 성웅이라는 칭호 외에 그 어느 접근법도 허용되지 않는 난공불락의 상징물. 이런 점을 고려하면 대문자 역사가 누대에 걸쳐 거의 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순신상을 대신하여 또 다른 이순신의 형상을 빚어낸다는 것은 금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자 대문자 역사에 대한 선전포고에 다름아니라고 해야 맞다.

<칼의 노래>는 그러나 그 일을 감행한다. 그리고 대문자 역사가 견고하게 구축해온 이순신상과 전혀 다른 이순신의 형상을 핍진하게 창조해낸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게 낫겠다. <칼의 노래>는 또 다른 이순신상을 위해, 그러니까 또 다른 이순신상을 통해 현재의 상징질서의 총화인 대문자 역사를 균열시키기 위해 씌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칼의 노래>의 이순신상은 대문자 역사가 악착스럽게 반복해온, 그리고 현재의 상징질서가 집요하게 고박시킨 이순신상에 단호하게 저항한다.

그렇다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상이 그간 우리가 이순신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낯선 사실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다. 그것들이야말로 이순신 삶의 뼈대를 이루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배제한다면 이는 이순신의 재창조가 아니라 이순신의 왜곡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칼의 노래>에 그려진 이순신에게도 나라에 대한 사랑, 나라의 중심인 임금에 대한 충정, 백성과 국토에 대한 사랑은 여전하다. <칼의 노래>는 여기에 이순신의 또 다른 삶의 흔적 약간을 추가한다. 아마도 작가가 이순신의 삶의 흔적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발굴했을 이것은 기존의 이순신상과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길항하면서 이전과 다른 이순신상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삶의 요소로 외삽한 것 중 크게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통치성(혹은 장치)에 대한 불안과 공포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 국토의 모든 것을 유린하는 왜적으로부터 백성을 위시한 나라 안의 모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싸움에서 이겨야 나라 안의 모든 생명이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만큼 <칼의 노래>의 이순신 역시 그 싸움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임금의 명을 충직하게 따르며 왜적의 칼날 아래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해내고자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게는 또 다른 것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위계화하고 통제하는 통치성(아감벤의 용어에 따르자면)에 대한 불안과 공포다. <칼의 노래>는 끼니, 노동, 몸, 냄새, 배고픔, 슬픔, 사실들, 실제들, 실재들, 실체들, 백성들의 희망과 원망, 고통, 고유성, 이질성, 환원불가능한 가치들 같은 것들을 묶고 구성하고 분할하고 분류하고 질서화하는 통치성을 작중화자인 이순신의 말을 빌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이라고 부른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에 따르면 통치성은 비록 한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다는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나 그것은 곧 자립화되어 생명체들의 목소리와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기에 이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것은 오로지 통치성을 위해 나라의 모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을 서슴없이 벌이는가 하면, 전쟁 중에 적과 싸우는 장수를 죄인으로 잡아들인다.(<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한평생을 다루되, 이순신의 파직과 문초, 그리고 백의종군 시절로부터 소설이 열리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이 통치성이 영 불만이다. 그는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 혹은 ‘눈으로 본 것은 모조리 보고하라. 귀로 들은 것도 모조리 보고하라. 본 것과 들은 것을 구별해서 보고하라. 눈으로 보지 않은 것과 귀로 듣지 않은 것은 것은 일언반구도 보고하지 말라’라는 원칙으로 정언명령으로 삼는 실재주의자다. 그런 까닭에 그는 통치성 바깥의 실재들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아니 실재들을 본 상태에서 형성된 앎을 죄악시하는 ‘허망하고 무내용한’ 통치성에 일체 동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불만은 곧 불안과 공포로 바뀐다. 세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통치성이 아무리 저항해도 꿈쩍도 하지 않을 만큼 완강한 까닭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우리 국토를 침탈한 왜국의 통치성은 물론 왜적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백성의 안위는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종묘사직의 체통에 집착하는 조선의 통치성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저항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 어떠한 통치성에도 더 이상 그렇게 통치받지 않겠다는 태도로 여러 겹의 통치성과 대치하고 결사항전을 벌인다. 하지만 여러 겹의 통치성은 이순신의 저항을 교묘한 감시와 처벌의 장치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통제한다. 이 견고한 통치성 앞에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줄곧 불안과 공포에 떤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내내 자신이 ‘나는 온 천지의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낀다.

<칼의 노래>가 이순신의 삶에 외삽한 또 하나의 요소는 개별적인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교감이다.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에게 한편으로는 분노를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를 엿보곤 하는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 전부와 단독자로 홀로 맞서는 것은 아니다. 그도 그 누구인가와 교감하고 연대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연대하는 존재들은 크게 세 부류이다. 우선 통치성 안의 존재자들 중에서 설핏 맨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종묘사직의 법통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 다른 존재자에 의해 대체될까 두려워하는 임금에서부터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드러내는 왜적에게도 연민의 정동을 느낀다. 그러니까 통치성에 ‘순종하는 신체들’ 중 그들이 그 어떤 계기에 의해 통치성의 그늘에서 벗어날 경우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그들을 연민으로 감싸안는다. 말하자면 이순신은 그가 누구이든 그를 개별적인 존재로 마주할 경우 그 존재에게 무한한 연민과 연대를 느낀다. 존재들 모두가 제각각의 개별적인 존재이(고자 하)나 통치성에 의해 존재자로서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때문에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속수무책으로 통치성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자들에게는 분노와 두려움을 숨기지 않지만 통치성에 의해 죽음의 존재로 전락한 또는 존재의 죽음에 전율하는 존재들에게는 뜨거운 연민과 동질감을 나눈다. 뿐만 아니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필연의 이치로 그 악착스러운 통치성의 압제 속에서도 그 통치성에 의해 그렇게 통치되지 않으려는 하는 존재 혹은 그 통치성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가 누구라도 고개를 숙인다. 한마디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통치성에는 충성하지 않되, 그 통치성 안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무존재성에 절망하며 어쩔 수 없이 순종적 신체로 살아가는 개별적이(고자 하)는 존재들에게는 깊은 연대를 느낀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연대하는 두 번째 부류는 통치성에 의해서 ‘쓸모없는 실존’으로 격하된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이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왜국의 통치성과 조선의 통치성, 그리고 명나라의 통치성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그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하는 조선의 백성들을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통곡을 이를 악물고 씹어삼킨다. 이순신이 ‘보아 아는’ 조선의 백성들은 왜국과 조선의 통치성의 각축 속에서 조선 백성-왜군-조선군 사이를 오가며 겨우 목숨을 연명할 뿐 아니라 죽어서도 코와 귀가 잘리는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이다. 하지만 이 백성들이 오로지 통치성의 단순한 제물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통치성이 그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면서도 그들의 생명은 물론 죽음마저도 도구로만 이용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통치성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차 있는 한편, 통치성의 외곽에서 통치성 바깥의 실재와 종종 외설적으로 조우하는 까닭에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감과 세계관을 지닌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론적 조건 때문에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견고한 통치성 외에 새로운 실재적 공동체를 갈구하는 존재들이 되며, 역시 그 때문에 이들과 이순신 사이에는 끈적끈적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어느 순간에는 인간 존재(자)들보다 비인간적 존재들에게 더 외경에 가까운 일체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들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존중하는 세 번째 부류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삶의 경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사물, 그리고 세계의 질서에 세심한 시선을 던진다. 특히 인간의 삶에 결정적인 대지와 바다의 생명체들은 물론 날씨나 물때 등 자연의 질서가 목소리 없이 전달하는 소리들을 무엇보다 경청한다. 경청할 뿐만 아니라 외경한다. 이렇게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인간 중심의 통치성의 원리가 인간을 위한 생명없는 사물로 도구화시킨 모든 비인간적 존재 혹은 객체들을 인간만큼 의미 있는 그것으로 귀환시키고 복권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아주 일찍 ‘객체들과의 민주주의’를 꿈꾼 존재이고, 또한 그를 위해 ‘비인간적인 존재들과의 연대’를 누구보다도 치밀하게 구축하고자 한 그런 인물이라 부를 수 있다.

<칼의 노래>는 이처럼 이순신의 삶에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새로 추가한다. 그뿐인데, 그러니까 다만 두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 이 두 개의 요소 중심으로 이순신의 삶을 재구성했을 뿐인데, <칼의 노래>에 그려진 이순신의 형상은 이전 이순신과는 전혀 다른 이순신이 된다. <칼의 노래>에 따르면 이순신은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으로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던 이다. 다시말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자신의 통치성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 더 악랄한 적(왜적)과 싸우는 한편 역시 조선의 ‘사직’을 위해 조선의 백성 그중에서도 특히 ‘용맹’한 존재라면 더 서슴없이 처형하는 조선의 통치성에도 맞선다. 이순신은 왜적과 맞서 목숨 걸고 싸우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조선의 임금을 위한 싸움으로 비쳐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조선의 소중한 생명 모두를 지켜내고자 한 결사항전이며, 이러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적의 적으로서 죽’고자 한 존재인 것이다. 이를 이제까지 우리가 말해온 맥락으로 바꿔보면,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오로지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것은 물론 전쟁을 치르면서는 모든 소중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여러 겹의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에 온몸으로 저항한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호모사케르적 존재들의 공동체 건설’과 ‘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찾아낸 탈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칼의 노래>가 기존의 이순신상을 해체하고 또 다른 이순신상을 발명했다고 해서 오랜 기간 견고하게 구축되어온 이순신상이 한순간에 균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칼의 노래>에 대한 독자들의 열띤 호응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순신 하면 왜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낸 성웅의 이미지가 압도적인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칼의 노래>로 인해 이순신의 삶을 오로지 왜국에 대한 적대감과 조선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 아니 오히려 이순신의 삶에는 은밀하게 조선이라는 국가-기구에 대한 저항도 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칼의 노래>의 사건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칼의 노래> 이후로 이제 누구도 이순신을 앞세워 통치성 혹은 이념에 충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쉽게 설파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통치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삶의 필요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경우 이순신을 앞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국가-기구가 또 다른 누군가를 앞세워 통치성에의 순종을 이념화하고자 할 경우에도 우리는 이순신을 떠올리며 그러한 상징이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을 엄호하기 위한 상징 조작이 아닌가를 의심할 수 있게도 되었다. 이 모든 게 <칼의 노래> 덕분이라고 해야 하리라.


이처럼 <칼의 노래>는 충분히 문학사적 사건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칼의 노래> 이후로 기존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달라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칼의 노래> 이후로 우리는 역사를 ‘살아 있는 전사(前史)’ 정도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충만한 그때’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아마도 <칼의 노래> 이후로도 역사를 단순히 ‘살아 있는 전사’로만 형상화하는 소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칼의 노래>는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말이 <칼의 노래>가 그 어떤 흠결도 없는 천의무봉의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칼의 노래>는 벤야민적 맥락에서 ‘완벽한 작품’에 가깝다. 일찍이 어느 글에선가 벤야민은 ‘중요한 작품은 장르를 세우거나 아니면 지양하는 작품이며, 완벽한 작품들에서 그 둘은 합쳐진다’고 한 적이 있는 바, 이 문맥을 좇아 <칼의 노래>를 맥락화하자면 <칼의 노래>는 기존의 역사소설을 지양하고 전혀 새로운 역사소설의 문법을 만들어낸 바로 그 소설이라 할 수 있다.아무래도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수식어는 <칼의 노래>를 꾸미는 말로 한동안 계속 붙어 다녀야 할 모양이다.

류보선 문학평론가·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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