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삼성·LG가 워싱턴 정계 인사 영입한 이유는?

입력 2022.05.14 (08:00) 수정 2022.05.14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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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로비스트들은 의회에서 장사진을 친다” 출처: 의회잡지 롤콜(RollCall)“워싱턴의 로비스트들은 의회에서 장사진을 친다” 출처: 의회잡지 롤콜(RollCall)

미국 정가의 심장인 워싱턴 D.C.에는 수많은 각국 정부 관리들이 음으로 양으로 파견돼 있다. 각국의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워싱턴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결정과정에 조금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기업들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한다. 글로벌 기업으로 손꼽히는 삼성, SK, 현대차뿐 아니라 한화, 항공우주산업 등 방산업계도 워싱턴에 사무소는 중요한 포인트.

■그런데 최근 삼성과 LG의 행보가 눈에 띈다
삼성은 2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 대사를 삼성 미주 법인장으로 영입했고, 4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워싱턴 사무소가 없던 LG는 얼마 전 사무소를 개설했다. 법인장으로는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을 영입했다. LG는 미 의회와 정부, 기관, 단체를 대상으로 대외 협력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워싱턴 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정가 네트워크 정면으로 공략
그간 LG는 미주 대관업무 조직을 워싱턴에 따로 두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자동차 배터리와 관련한 영업 비밀 침해 소송이 2년간의 공방을 거쳐 2조원의 배상을 받게 됐지만 지난해 사실상 대관 업무 측면에선 SK의 승리로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며 워싱턴에 사무소를 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는 후문.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

초대 소장으로 영입된 조 헤이긴은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은 로널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걸쳐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던 15년 동안 백악관 비서실을 맡았던 인사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준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해외 기업 입장에서 끈끈한 인맥으로 이뤄진 워싱턴 네트워크를 공략하기에 적합한 인물을 고르고 고른 셈.

삼성이 북미 대관 조직을 크게 강화하며 영입한 마크 리퍼트는 오바마 행정부 당시 주한 미국 대사로 재임하면서 한국 사랑으로 유명한 대표적 지한파다. 민주당 소속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 운동에도 참여한 측근이다보니, 현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도 네트워크는 독보적이라는 평가다.

■미중 갈등, 반 러시아 전선 확장... '워싱턴 라인 잡아라'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반도체 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 물류 대란 속에서 직격탄을 맞은 게 반도체 수급. 반도체가 없어서 미국의 차량 제조업체들이 차를 만들어놓고도 야적장에 신차 수천 대를 쌓아놓는 장면들이 언론에 매일 보도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마음은 급했다. 삼성과 TSMC 등 반도체 생산업체들을 직접 백악관에 불러서 두 달에 한 번 꼴로 회의를 소집했고,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회의장에서 반도체 칩이나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문제는 미 행정부의 움직임이 단순히 "바이 아메리카"(미국에 투자하거나 미국에서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제품을 생산하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시작된 미중 갈등과 중국을 배제해 동맹국들을 줄세우기하는 행태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만큼 노골적으로 '말' 하지 않을 뿐,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도 똑같다는 것이 우리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여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동맹들'의 전선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틈만 나면 입에 '동맹들' 을 달고 사는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미국의 무역을 책임지는 부처 USTR의 캐서린 타이 대표도, 상무부 장관도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동맹이 올바른 결정(right decision)을 내릴 것으로 믿는다"며 압박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모두 최대 교역지이지만 - 수출 금액이나 규모는 중국이 더 크다 - 미국이 통상에 있어 자유무역이 아닌 '국가 안보'를 최우선 기준으로 꺼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이른바 '워싱턴 라인'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

하루가 멀다하고 러시아를 향한 제재가 쏟아지는 요즘은 워싱턴 사무소에 나와있는 우리 기업들의 전화통에서 불이 난다. 현지 직원들을 채용해 상시적으로 미국 백악관과 의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장기적인 대응을 고민해 판단할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SK 반도체·배터리로 일찌감치 '워싱턴 채널' 가동
SK그룹은 일찌감치 워싱턴 채널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LG 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소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SK 하이닉스는 미국에서 벌어진 특허 소송을 수년 동안 치르며 미국 내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선제적으로(?) 절감했다는 것.

덕분인지 때문인지 SK는 배터리 소송에서 LG의 영업 비밀을 침해했으니 10년 간 SK 배터리의 미국을 금지한다는 ITC 판결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양사 간 중재에 나서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약 65만 달러(우리 돈 7억 3천여만 원, 출처 정치반응센터 CRP)의 로비 자금을 사용했다지만, LG도 비슷한 금액을 들였던 만큼, 결국 워싱턴 정가의 네트워크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SK 최태원 회장과 조지아주 미 연방 상원의원 존 오소프 의원SK 최태원 회장과 조지아주 미 연방 상원의원 존 오소프 의원

대관 업무 뿐 아니라 최태원 회장까지 나선 이른바 '지식 네트워크' 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9년 워싱턴 정치권, 관계, 재계 인사들을 초청해 'SK 나이트' 행사를 연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최종현 학술원 주최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대화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 컨퍼런스를 주최했다. 코로나19로 대면 행사가 거의 열리지 않았던 상황임에도 최태원 회장이 직접 나선 이 행사에는 척 헤이글 전 국방장관, 커트 캠벨 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차관보 등 정관계 인사들은 물론 국제관계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 등이 참여했다.

■"더 이상 정부의 외교력에 의존할 수 없다"
"이제 자유무역시대는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 좋은 제품 만들어서 경쟁력 있는 가격에 파는 게 우리 기업들의 노하우였다면, 여기에 미국의 정치, 외교, 안보, 국방이 변수로 날마다 등장하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로선 힘든 상황이 도래했다는 게 기업들의 판단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심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은 이미 새로운 경제 질서 재편 수순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가 대표적이다. 백악관이 직접 삼성과 SK에 전화하는 판국에 한국 정부가 각 기업들의 이익을 일일이 대신해서 외교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각개격파가 답입니다"
워싱턴에 사무소를 내고 활동하고 있는 우리 대기업 수는 이미 열 곳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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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5-14 08:00:21
    • 수정2022-05-14 09:31:27
    특파원 리포트
“워싱턴의 로비스트들은 의회에서 장사진을 친다” 출처: 의회잡지 롤콜(RollCall)
미국 정가의 심장인 워싱턴 D.C.에는 수많은 각국 정부 관리들이 음으로 양으로 파견돼 있다. 각국의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워싱턴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결정과정에 조금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기업들도 워싱턴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한다. 글로벌 기업으로 손꼽히는 삼성, SK, 현대차뿐 아니라 한화, 항공우주산업 등 방산업계도 워싱턴에 사무소는 중요한 포인트.

■그런데 최근 삼성과 LG의 행보가 눈에 띈다
삼성은 2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 대사를 삼성 미주 법인장으로 영입했고, 4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워싱턴 사무소가 없던 LG는 얼마 전 사무소를 개설했다. 법인장으로는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을 영입했다. LG는 미 의회와 정부, 기관, 단체를 대상으로 대외 협력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워싱턴 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워싱턴 정가 네트워크 정면으로 공략
그간 LG는 미주 대관업무 조직을 워싱턴에 따로 두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자동차 배터리와 관련한 영업 비밀 침해 소송이 2년간의 공방을 거쳐 2조원의 배상을 받게 됐지만 지난해 사실상 대관 업무 측면에선 SK의 승리로 끝났다는 평가가 나오며 워싱턴에 사무소를 내야겠다는 결단을 내렸다는 후문.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
초대 소장으로 영입된 조 헤이긴은 전 백악관 비서실 차장은 로널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걸쳐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던 15년 동안 백악관 비서실을 맡았던 인사다. 201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 준비를 주도하기도 했다. 해외 기업 입장에서 끈끈한 인맥으로 이뤄진 워싱턴 네트워크를 공략하기에 적합한 인물을 고르고 고른 셈.

삼성이 북미 대관 조직을 크게 강화하며 영입한 마크 리퍼트는 오바마 행정부 당시 주한 미국 대사로 재임하면서 한국 사랑으로 유명한 대표적 지한파다. 민주당 소속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 운동에도 참여한 측근이다보니, 현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도 네트워크는 독보적이라는 평가다.

■미중 갈등, 반 러시아 전선 확장... '워싱턴 라인 잡아라'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반도체 이야기를 많이 꺼냈다. 코로나19로 인한 세계적 물류 대란 속에서 직격탄을 맞은 게 반도체 수급. 반도체가 없어서 미국의 차량 제조업체들이 차를 만들어놓고도 야적장에 신차 수천 대를 쌓아놓는 장면들이 언론에 매일 보도되면서 바이든 행정부의 마음은 급했다. 삼성과 TSMC 등 반도체 생산업체들을 직접 백악관에 불러서 두 달에 한 번 꼴로 회의를 소집했고,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회의장에서 반도체 칩이나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문제는 미 행정부의 움직임이 단순히 "바이 아메리카"(미국에 투자하거나 미국에서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제품을 생산하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시작된 미중 갈등과 중국을 배제해 동맹국들을 줄세우기하는 행태는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만큼 노골적으로 '말' 하지 않을 뿐, 바이든 행정부의 기조도 똑같다는 것이 우리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여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미국과 '동맹들'의 전선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틈만 나면 입에 '동맹들' 을 달고 사는 바이든 대통령은 물론 미국의 무역을 책임지는 부처 USTR의 캐서린 타이 대표도, 상무부 장관도 "우리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면서 "동맹이 올바른 결정(right decision)을 내릴 것으로 믿는다"며 압박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모두 최대 교역지이지만 - 수출 금액이나 규모는 중국이 더 크다 - 미국이 통상에 있어 자유무역이 아닌 '국가 안보'를 최우선 기준으로 꺼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이른바 '워싱턴 라인'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

하루가 멀다하고 러시아를 향한 제재가 쏟아지는 요즘은 워싱턴 사무소에 나와있는 우리 기업들의 전화통에서 불이 난다. 현지 직원들을 채용해 상시적으로 미국 백악관과 의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장기적인 대응을 고민해 판단할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SK 반도체·배터리로 일찌감치 '워싱턴 채널' 가동
SK그룹은 일찌감치 워싱턴 채널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LG 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소송이 시작되기 전부터 SK 하이닉스는 미국에서 벌어진 특허 소송을 수년 동안 치르며 미국 내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선제적으로(?) 절감했다는 것.

덕분인지 때문인지 SK는 배터리 소송에서 LG의 영업 비밀을 침해했으니 10년 간 SK 배터리의 미국을 금지한다는 ITC 판결에 대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양사 간 중재에 나서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약 65만 달러(우리 돈 7억 3천여만 원, 출처 정치반응센터 CRP)의 로비 자금을 사용했다지만, LG도 비슷한 금액을 들였던 만큼, 결국 워싱턴 정가의 네트워크가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SK 최태원 회장과 조지아주 미 연방 상원의원 존 오소프 의원
대관 업무 뿐 아니라 최태원 회장까지 나선 이른바 '지식 네트워크' 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2019년 워싱턴 정치권, 관계, 재계 인사들을 초청해 'SK 나이트' 행사를 연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최종현 학술원 주최로 '태평양을 사이에 둔 대화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 컨퍼런스를 주최했다. 코로나19로 대면 행사가 거의 열리지 않았던 상황임에도 최태원 회장이 직접 나선 이 행사에는 척 헤이글 전 국방장관, 커트 캠벨 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인도태평양 차관보 등 정관계 인사들은 물론 국제관계 석학인 존 미어샤이머 교수 등이 참여했다.

■"더 이상 정부의 외교력에 의존할 수 없다"
"이제 자유무역시대는 끝났습니다."
기술적으로 좋은 제품 만들어서 경쟁력 있는 가격에 파는 게 우리 기업들의 노하우였다면, 여기에 미국의 정치, 외교, 안보, 국방이 변수로 날마다 등장하고 있다. 무역 의존도가 큰 우리나라로선 힘든 상황이 도래했다는 게 기업들의 판단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심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은 이미 새로운 경제 질서 재편 수순으로 들어갔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가 대표적이다. 백악관이 직접 삼성과 SK에 전화하는 판국에 한국 정부가 각 기업들의 이익을 일일이 대신해서 외교력을 행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각개격파가 답입니다"
워싱턴에 사무소를 내고 활동하고 있는 우리 대기업 수는 이미 열 곳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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