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3년 전 감독은 알았을까…꿈 이룬 ‘사랑의 영부인’

입력 2022.05.15 (08:00)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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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이멜다 마르코스 : 사랑의 영부인’의 해외 포스터. 원제인 ‘킹 메이커’가 표기돼 있다. 출처 IMDB.다큐멘터리 영화 ‘이멜다 마르코스 : 사랑의 영부인’의 해외 포스터. 원제인 ‘킹 메이커’가 표기돼 있다. 출처 IMDB.

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했던 지난 10일, 이웃 나라 필리핀에서도 대선 결과가 발표됐다. 6년간 필리핀 정부 수장을 맡을 새 대통령의 이름은 봉봉 마르코스.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 집권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페르디난드는 21년 재임 기간 중 14년 간 계엄령을 통해 권력을 휘둘렀다. 7만여 명의 시민들을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 등으로 체포했고, 절반을 고문했다. 3천 2백여 명이 죽었다. 최대 정적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는 대낮에 공항에서 암살됐다. 부정 축재와 인권 유린을 견디다 못한 국민이 혁명을 일으켜 마르코스 일가를 내쫓은 게 불과 36년 전인데, 어떻게 그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3년 전, 이 날의 승리를 내다본 듯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로렌 그린필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킹메이커(2019)'다. 한국 OTT 서비스 '왓챠'에선 '이멜다 마르코스 : 사랑의 영부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어 제목이 이멜다의 모순을 비꼬았다면, 원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아들 봉봉의 정치자산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드러낸다.

화려하게 꾸며진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파트. 피카소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화려하게 꾸며진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파트. 피카소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영단어 '킹 메이커'는 자신은 왕이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권좌에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을 갖춘 막후의 인물을 뜻한다. "대통령직을 맡는 게 제 아들의 운명이에요." 자신만만하게 미래를 넘겨짚은 이멜다의 말은 2022년 현실이 됐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영화 곳곳에서 '징후'가 보인다. 이멜다가 가는 곳마다 몰려든 지지자들, 계엄령 덕분에 필리핀의 평화가 지켜졌다고 읊는 학생들…. 빈민가의 한 여성은 마르코스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 봉봉에게 투표할 거라며 환하게 웃는다.

이멜다 역시 과거의 영광을 진심으로 믿는다. 익히 알려진 '사치의 여왕' 시절은 오로지 태평성대로만 기억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사진 작가인 그린필드 감독은 이멜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진실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인터뷰 도중 자신의 잘못으로 유리 액자가 산산조각 난 상황, 이멜다는 묵묵히 조각을 치우는 남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코앞의 직원에게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자애로운 '국모'였는지 설명하기 바쁘다.

곧바로 뒤따르는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정반대 사실을 증언한다. 집에서 내쫓기고, 전기 고문을 당하고, 가족이 살해된 이들의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져도 이멜다는 꿈쩍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게 현실이죠. 진실은 그렇지 않고요." 마르코스 일가가 뿌려 대는 후원금과 정치 자금으로 독재 정권의 만행은 없던 일이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사다.

이멜다는 '킹'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아들 봉봉은 사람들에게 필리핀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던 시기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들의 말처럼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일까, 아니면 잊는 순간 반복될 미래일까. 봉봉 마르코스는 당선 확정 뒤 '과거 대신 행동으로 평가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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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3년 전 감독은 알았을까…꿈 이룬 ‘사랑의 영부인’
    • 입력 2022-05-15 08:00:50
    • 수정2022-12-26 09:39:22
    씨네마진국
다큐멘터리 영화 ‘이멜다 마르코스 : 사랑의 영부인’의 해외 포스터. 원제인 ‘킹 메이커’가 표기돼 있다. 출처 IMDB.
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했던 지난 10일, 이웃 나라 필리핀에서도 대선 결과가 발표됐다. 6년간 필리핀 정부 수장을 맡을 새 대통령의 이름은 봉봉 마르코스. 1965년부터 1986년까지 장기 집권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페르디난드는 21년 재임 기간 중 14년 간 계엄령을 통해 권력을 휘둘렀다. 7만여 명의 시민들을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 등으로 체포했고, 절반을 고문했다. 3천 2백여 명이 죽었다. 최대 정적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는 대낮에 공항에서 암살됐다. 부정 축재와 인권 유린을 견디다 못한 국민이 혁명을 일으켜 마르코스 일가를 내쫓은 게 불과 36년 전인데, 어떻게 그 아들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3년 전, 이 날의 승리를 내다본 듯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 로렌 그린필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킹메이커(2019)'다. 한국 OTT 서비스 '왓챠'에선 '이멜다 마르코스 : 사랑의 영부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어 제목이 이멜다의 모순을 비꼬았다면, 원제는 보다 직접적으로 아들 봉봉의 정치자산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임을 드러낸다.

화려하게 꾸며진 이멜다 마르코스의 아파트. 피카소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영단어 '킹 메이커'는 자신은 왕이 아닐지라도, 누군가를 권좌에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을 갖춘 막후의 인물을 뜻한다. "대통령직을 맡는 게 제 아들의 운명이에요." 자신만만하게 미래를 넘겨짚은 이멜다의 말은 2022년 현실이 됐다.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영화 곳곳에서 '징후'가 보인다. 이멜다가 가는 곳마다 몰려든 지지자들, 계엄령 덕분에 필리핀의 평화가 지켜졌다고 읊는 학생들…. 빈민가의 한 여성은 마르코스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 봉봉에게 투표할 거라며 환하게 웃는다.

이멜다 역시 과거의 영광을 진심으로 믿는다. 익히 알려진 '사치의 여왕' 시절은 오로지 태평성대로만 기억된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사진 작가인 그린필드 감독은 이멜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진실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인터뷰 도중 자신의 잘못으로 유리 액자가 산산조각 난 상황, 이멜다는 묵묵히 조각을 치우는 남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코앞의 직원에게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자애로운 '국모'였는지 설명하기 바쁘다.

곧바로 뒤따르는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정반대 사실을 증언한다. 집에서 내쫓기고, 전기 고문을 당하고, 가족이 살해된 이들의 목소리가 끝없이 이어져도 이멜다는 꿈쩍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게 현실이죠. 진실은 그렇지 않고요." 마르코스 일가가 뿌려 대는 후원금과 정치 자금으로 독재 정권의 만행은 없던 일이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사다.

이멜다는 '킹'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아들 봉봉은 사람들에게 필리핀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던 시기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들의 말처럼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일까, 아니면 잊는 순간 반복될 미래일까. 봉봉 마르코스는 당선 확정 뒤 '과거 대신 행동으로 평가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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