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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계엄군이 42년 만에 고백한 ‘그날의 광주’
입력 2022.05.21 (07:00) 수정 2022.05.21 (07:25) 취재후·사건후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2만여 명. 이들은 광주 시민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줬다. 동시에 자신들도 오랜 세월 회한을 안은 채 살아왔다.
이들은 현재 60대로 대부분 숨진 신군부들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증언할 생생한 목격자기도 하다. 광주에 사죄의 뜻을 전하고 싶은 사람도 여럿. 이들의 사과는 '치유'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입을 연 계엄군은 1% 정도, 200여 명에 불과하다는 게 5·18 진상규명위의 설명이다.
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취재진이 계엄군 목소리를 들은 이유다.

"어릴 때, 남자답고 '와일드'한 게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군대에 들어가 성격 고치고 싶어서 공수부대에 지원했어요."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던 김귀삼 씨. 입대 4년 만인 1980년 5월, 인생에서 지우지 못할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3공수부대 소속,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것. 작전은 잔혹했다. 명령에 따라, 김 씨는 시민군을 향해 총을 겨눠야 했다. 그 시민군은 고향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민군 틈엔 김 씨의 친형과 동생도 있었다.

"걷지 못하고 질질 도로에 끌려온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우리 부대는 초전에 박살을 내야하는 구호로 훈련된 사람들이라서 무력으로 진압을 해야 하다보니 잔인하게 했었던 것 같아요. 시민군으로 형 동생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시민군 속에서)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중략) 광주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 가정, 부모, 형제들이 비극을 겪어야 됐고.."
-당시 계엄군 중사 김귀삼

역시 3공수부대 소속으로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김OO 씨.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가 임무였다. 광주교도소는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곳. 42년 전, 피로 얼룩진 그 날의 기억을 김OO 씨는 지우지 못하고 있다.

" 나무 구르마(수레)가 있었어요. 거기 피가 고여있고. 밥을 가지고 왔는데 피는 응고돼 있는 그(수레) 위에다가 밥을 그대로 싣고 온 거에요. 밥에 이렇게 피가 흥건하게 묻은 거예요. … (중략)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같아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당시 계엄군 중사 김00

■ 지우지 못한 '5월 광주'

1980년 5월, 아직도 이들의 머릿속에선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은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싸우고 있다. 그 고통의 뿌리, '신군부'다. 한때 상관이었던 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광주시민을 향한 사과도 아직 하지 않았다.

Q. 전두환 씨는 발포 명령을 인정하지 않고 숨졌는데요?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 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중략) 사람이라는 건 인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동물은 인정 못 하고 잊어먹을 수도 있지만.."
-당시 계엄군 중사 김00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듣는 것 역시 고통이다. 김귀삼 씨는 그런 음모론이 자신을 KBS 카메라 앞에 서게 했다고 말한다.

"항간에 보니까 무슨 북한군이 백명이 왔니,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를 쏴 죽이러 왔니.. 제가 현장에서 봤던 건 이게 사실이 아닌데 ... (이런 음모론 때문에) 서로 미워하니까 싫어하니까..."
-당시 계엄군 중사 김귀삼

■ "계엄군의 고백, 진상 규명의 단초"

40년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묻혀있는 '그날의 광주'.

계엄군의 고백은, 진실을 밝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날의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엄군들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양심적 증언과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당시 격랑에 휩쓸려 부당한 명령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 분들의 용기있는 증언과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선태 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 (12일 대국민 보고회 中)

5·18 진상규명위원회는 한마디 사과 없이 죽은 전두환이나 방관하는 신군부와 달리 이들은 광주에 사과할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취재진과 만난 두 명의 계엄군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과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남편을 잃었던 최정희 씨에게 닿았다. 최씨가 이들에게 전한 말, 내일(22일) 이어서 보도한다.
  • [취재후] 계엄군이 42년 만에 고백한 ‘그날의 광주’
    • 입력 2022-05-21 07:00:39
    • 수정2022-05-21 07:25:48
    취재후·사건후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은 2만여 명. 이들은 광주 시민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줬다. 동시에 자신들도 오랜 세월 회한을 안은 채 살아왔다.
이들은 현재 60대로 대부분 숨진 신군부들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증언할 생생한 목격자기도 하다. 광주에 사죄의 뜻을 전하고 싶은 사람도 여럿. 이들의 사과는 '치유'의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입을 연 계엄군은 1% 정도, 200여 명에 불과하다는 게 5·18 진상규명위의 설명이다.
변명보다는 사과, 사과보다는 진상규명... 취재진이 계엄군 목소리를 들은 이유다.

"어릴 때, 남자답고 '와일드'한 게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군대에 들어가 성격 고치고 싶어서 공수부대에 지원했어요."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던 김귀삼 씨. 입대 4년 만인 1980년 5월, 인생에서 지우지 못할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3공수부대 소속,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된 것. 작전은 잔혹했다. 명령에 따라, 김 씨는 시민군을 향해 총을 겨눠야 했다. 그 시민군은 고향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시민군 틈엔 김 씨의 친형과 동생도 있었다.

"걷지 못하고 질질 도로에 끌려온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더라고요. 우리 부대는 초전에 박살을 내야하는 구호로 훈련된 사람들이라서 무력으로 진압을 해야 하다보니 잔인하게 했었던 것 같아요. 시민군으로 형 동생이 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시민군 속에서) 형인지 동생인지 얼굴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많이 쏠려있었죠.… (중략) 광주에서 있었던 일로 우리 가정, 부모, 형제들이 비극을 겪어야 됐고.."
-당시 계엄군 중사 김귀삼

역시 3공수부대 소속으로 '5월 광주'에 투입됐던 김OO 씨. 광주교도소 경계 근무가 임무였다. 광주교도소는 훗날 '집단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곳. 42년 전, 피로 얼룩진 그 날의 기억을 김OO 씨는 지우지 못하고 있다.

" 나무 구르마(수레)가 있었어요. 거기 피가 고여있고. 밥을 가지고 왔는데 피는 응고돼 있는 그(수레) 위에다가 밥을 그대로 싣고 온 거에요. 밥에 이렇게 피가 흥건하게 묻은 거예요. … (중략) 사람들 많은 데서 웅성웅성하고 그러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같아서) 이성을 잃을 정도로 성격이 날카로워져요."
-당시 계엄군 중사 김00

■ 지우지 못한 '5월 광주'

1980년 5월, 아직도 이들의 머릿속에선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은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싸우고 있다. 그 고통의 뿌리, '신군부'다. 한때 상관이었던 이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광주시민을 향한 사과도 아직 하지 않았다.

Q. 전두환 씨는 발포 명령을 인정하지 않고 숨졌는데요?

"군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 가고 하는 걸 다 보고하게 돼 있고. 그게(발포가) 명령 없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보죠. 그걸 했으면 군법을 해서 사형이에요. (중략) 사람이라는 건 인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동물은 인정 못 하고 잊어먹을 수도 있지만.."
-당시 계엄군 중사 김00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각종 음모론.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듣는 것 역시 고통이다. 김귀삼 씨는 그런 음모론이 자신을 KBS 카메라 앞에 서게 했다고 말한다.

"항간에 보니까 무슨 북한군이 백명이 왔니,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를 쏴 죽이러 왔니.. 제가 현장에서 봤던 건 이게 사실이 아닌데 ... (이런 음모론 때문에) 서로 미워하니까 싫어하니까..."
-당시 계엄군 중사 김귀삼

■ "계엄군의 고백, 진상 규명의 단초"

40년 넘게 흘렀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들이 묻혀있는 '그날의 광주'.

계엄군의 고백은, 진실을 밝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그날의 진상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계엄군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엄군들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조사와 치유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전된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사회적으로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정치적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양심적 증언과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당시 격랑에 휩쓸려 부당한 명령에 의해 5·18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계신 분들의 용기있는 증언과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선태 5·18 진상조사규명위원회 위원장 (12일 대국민 보고회 中)

5·18 진상규명위원회는 한마디 사과 없이 죽은 전두환이나 방관하는 신군부와 달리 이들은 광주에 사과할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취재진과 만난 두 명의 계엄군은 이제라도 사죄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사과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남편을 잃었던 최정희 씨에게 닿았다. 최씨가 이들에게 전한 말, 내일(22일) 이어서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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