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책] 유고집으로 만나는 ‘실버 취준생 분투기’

입력 2022.05.21 (10:00) 수정 2022.05.2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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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내가 62세에서 65세까지 겪은 취업 분투기다.

퇴근 시간이 가까운 취업창구는 한산했다.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내밀자 이력서를 훑던 담당자 입꼬리에 묘한 비틀림이 스쳤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실버 취준생 분투기'의 첫 문장, 첫 문단입니다.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입니다. 지난해 화제가 많이 됐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많이 됐습니다. 글에 감동받은 누군가가 공유하고, 또 다른 누군가도 공유하고, 공유한 글을 보고 다시 또 누군가가 공유를 하고, 그러면서 글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글 일부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직원도 당황스러웠던지 험한 일 하실 분 같지 않으시네, 곱게 나이 드셨네. 라며 위로랍시고 몇 마디 거든다. 직원이 이력서를 들고 이렇게 많은 능력이 사장된다는 게 안타깝다고 애석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 굿이다. 나도 안다. 너도나도 구직활동에 나선 초로의 구직자들의 아직은 대접받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걸. 그걸 적당히 다루는 방법도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 같은 일도 하실 수 있겠냐고 공손하게 묻는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재고 따지고 할 여유도 없다.

글을 쓴 분은 이순자 작가입니다. 글을 썼을 때 그는 60대였습니다. '실버'였습니다. 일자리를 얻으려 했습니다. '취준생'이었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분투'의 날들이었죠.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하나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렇게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글을 읽은 많은 분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올해 읽은 최고의 글 가운데 하나', '그 어떤 기사보다 힘 있고 살아있는 글', '맑은 물처럼 살아간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 등 여러 평을 남겼습니다.

'눈사람 기자'로 유명한 KBS의 박대기 기자도 지난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최고의 글이다. 내 어머니와 동갑이신데 올해 이 글로 상을 받으신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우리나라는 르포 기사가 약하다. 기자들이 좀 더 드라이하게 현실을 전하는 기사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 남이 아니라 나부터도.'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자 작가는 박대기 기자의 글에 언급돼 있듯이, 세상에 없습니다. 상을 받고 한 달여 뒤, 그의 글이 널리 알려지기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영면했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독자들이 더는 이순자 작가의 글을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만, 이번에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덜 수 있게 됐습니다. 이순자 작가의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가 나온 겁니다.


이순자 작가의 딸은 책 서문에서 '어머니는 크고 작은 문학상을 타며 창작의 결실을 얻고 시나리오 작업으로 더 큰 꿈을 꾸고 계시던 때에 돌아가셨다'며, '어머니 손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글들을 책으로 내는 게 바른 일인지 고민도 했지만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 달린 수많은 댓글에 힘을 얻어 책 출간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책은 산문집이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갖가지 사례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박대기 기자의 표현대로 르포의 분위기 또한 풍깁니다. 극적인 얘기들이 많아서 소설 같기도 합니다.

※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책에 실려 있는 '순분할매 바람 났네'라는 글을 보겠습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이순자 작가는 이 글로 제16회 전국장애인문학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는 시트콤의 한 풍경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온갖 험한 꼴 다 보고, 힘든 일 다 겪은 순분 할머니의 인생역정을 그린 글입니다.

순분할매는 이순자 작가가 강원도 평창에 살 때 이웃에 살았습니다. 순분할매는, 남편을 일찍 잃었습니다.

'스물서이에 아아 둘 데불고 혼자 되이 막막하더이. 그래도 아아들 밥은 멕여야 하이 이 집 저 집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았제.'

아이들 밥도 제대로 못 해주고 이러다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순분할매에게 제의가 하나 들어옵니다. 산 너머 아이 못 낳는 김가네 아이를 하나 낳아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아들 낳아주면 밭 오백 평을 준다는 말에 순분할매는 그러기로 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삼십칠일 만에 데려갑니다. 하지만 한 달 뒤 아이를 도로 데리고 옵니다. 데려간 집에서 키울 수 없다며 아이를 돌려준 겁니다.

'여자가 아를 받어디릴 수 없으이, 키울 수가 없으니 나보고 키우라 카믄서, 허어허어, 참나, 그러고 남정네는 내삐버리고.'

순분할매는 없는 살림에 셋째까지 키우게 됩니다.

'내 배 아파 낳았으이 버릴 수도 없구. 아만 하나 더 생겨버렸으이. 이런 팔자가 오데가 있겠으. 동네 사람들은 서방도 없는 년이 아를 낳았다고 쑥덕거리고.'

순분할매의 남다른 인생사는 계속됩니다. 또 다른 얘기들이 이어집니다. 더 극적인 사연들이 펼쳐집니다.

이순자 작가의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에는 이런 일도 있을까 싶은,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청소하고, 어린이집 주방 일을 하고, 가정집 아기 돌보미를 하고, 요양보호사가 되고, 생계를 위해 갖가지 일을 하면서 숱한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 곁에 서려 했던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책이 나온 지 십여 일, 이순자 작가의 글은 이제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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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말& 책] 유고집으로 만나는 ‘실버 취준생 분투기’
    • 입력 2022-05-21 10:00:26
    • 수정2022-05-21 11:14:43
    취재K

이글은 내가 62세에서 65세까지 겪은 취업 분투기다.

퇴근 시간이 가까운 취업창구는 한산했다. 담당자에게 이력서를 내밀자 이력서를 훑던 담당자 입꼬리에 묘한 비틀림이 스쳤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실버 취준생 분투기'의 첫 문장, 첫 문단입니다.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입니다. 지난해 화제가 많이 됐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많이 됐습니다. 글에 감동받은 누군가가 공유하고, 또 다른 누군가도 공유하고, 공유한 글을 보고 다시 또 누군가가 공유를 하고, 그러면서 글이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글 일부를 그대로 옮겨 봅니다.

직원도 당황스러웠던지 험한 일 하실 분 같지 않으시네, 곱게 나이 드셨네. 라며 위로랍시고 몇 마디 거든다. 직원이 이력서를 들고 이렇게 많은 능력이 사장된다는 게 안타깝다고 애석한 표정을 짓는다. 연기 굿이다. 나도 안다. 너도나도 구직활동에 나선 초로의 구직자들의 아직은 대접받고 싶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걸. 그걸 적당히 다루는 방법도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다.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 같은 일도 하실 수 있겠냐고 공손하게 묻는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재고 따지고 할 여유도 없다.

글을 쓴 분은 이순자 작가입니다. 글을 썼을 때 그는 60대였습니다. '실버'였습니다. 일자리를 얻으려 했습니다. '취준생'이었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분투'의 날들이었죠. 여러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하나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렇게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글을 읽은 많은 분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올해 읽은 최고의 글 가운데 하나', '그 어떤 기사보다 힘 있고 살아있는 글', '맑은 물처럼 살아간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 등 여러 평을 남겼습니다.

'눈사람 기자'로 유명한 KBS의 박대기 기자도 지난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최고의 글이다. 내 어머니와 동갑이신데 올해 이 글로 상을 받으신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우리나라는 르포 기사가 약하다. 기자들이 좀 더 드라이하게 현실을 전하는 기사를 많이 썼으면 좋겠다. 남이 아니라 나부터도.'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자 작가는 박대기 기자의 글에 언급돼 있듯이, 세상에 없습니다. 상을 받고 한 달여 뒤, 그의 글이 널리 알려지기 전 급성심근경색으로 영면했습니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독자들이 더는 이순자 작가의 글을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만, 이번에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덜 수 있게 됐습니다. 이순자 작가의 산문집이자 유고집인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가 나온 겁니다.


이순자 작가의 딸은 책 서문에서 '어머니는 크고 작은 문학상을 타며 창작의 결실을 얻고 시나리오 작업으로 더 큰 꿈을 꾸고 계시던 때에 돌아가셨다'며, '어머니 손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글들을 책으로 내는 게 바른 일인지 고민도 했지만 실버 취준생 분투기에 달린 수많은 댓글에 힘을 얻어 책 출간을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책은 산문집이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갖가지 사례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한 편의 다큐멘터리 느낌도 납니다. 그래서 박대기 기자의 표현대로 르포의 분위기 또한 풍깁니다. 극적인 얘기들이 많아서 소설 같기도 합니다.

※ 사진 제공: 휴머니스트

책에 실려 있는 '순분할매 바람 났네'라는 글을 보겠습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이순자 작가는 이 글로 제16회 전국장애인문학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목만 봤을 때는 시트콤의 한 풍경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온갖 험한 꼴 다 보고, 힘든 일 다 겪은 순분 할머니의 인생역정을 그린 글입니다.

순분할매는 이순자 작가가 강원도 평창에 살 때 이웃에 살았습니다. 순분할매는, 남편을 일찍 잃었습니다.

'스물서이에 아아 둘 데불고 혼자 되이 막막하더이. 그래도 아아들 밥은 멕여야 하이 이 집 저 집 닥치는 대로 품을 팔았제.'

아이들 밥도 제대로 못 해주고 이러다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순분할매에게 제의가 하나 들어옵니다. 산 너머 아이 못 낳는 김가네 아이를 하나 낳아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아들 낳아주면 밭 오백 평을 준다는 말에 순분할매는 그러기로 합니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삼십칠일 만에 데려갑니다. 하지만 한 달 뒤 아이를 도로 데리고 옵니다. 데려간 집에서 키울 수 없다며 아이를 돌려준 겁니다.

'여자가 아를 받어디릴 수 없으이, 키울 수가 없으니 나보고 키우라 카믄서, 허어허어, 참나, 그러고 남정네는 내삐버리고.'

순분할매는 없는 살림에 셋째까지 키우게 됩니다.

'내 배 아파 낳았으이 버릴 수도 없구. 아만 하나 더 생겨버렸으이. 이런 팔자가 오데가 있겠으. 동네 사람들은 서방도 없는 년이 아를 낳았다고 쑥덕거리고.'

순분할매의 남다른 인생사는 계속됩니다. 또 다른 얘기들이 이어집니다. 더 극적인 사연들이 펼쳐집니다.

이순자 작가의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에는 이런 일도 있을까 싶은,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백화점에서 청소하고, 어린이집 주방 일을 하고, 가정집 아기 돌보미를 하고, 요양보호사가 되고, 생계를 위해 갖가지 일을 하면서 숱한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면서도 이웃과 소외된 사람들 곁에 서려 했던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책이 나온 지 십여 일, 이순자 작가의 글은 이제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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