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5월 광주…‘사과’ 그리고 ‘용서’
입력 2022.05.22 (09:00)
수정 2022.05.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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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최정희 씨의 남편은 소를 판 돈을 받아오겠다며 전남 담양 집에서 광주로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 돼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돼 집 앞마당에 놓였다. 광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광주교도소 근처에서 난데없는 계엄군의 총격을 받은 것이다.
"밥이 식을 때까지 오지 않은 당신을 교도소에서 시신으로 만났지요. 이 억울한 마음을 세상천지에 누가 또 알까요. 젊어선 3남매 키우느라 너무 팍팍해서 당신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서른여섯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 남편에게 띄운 최정희 씨 편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 中 2020년 5월 18일) |
한(恨)으로 보낸 42년. 취재진은 광주 시민에 사과한 계엄군의 영상을 최 씨에게 전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5·18 민주화운동.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준 이들 중 사과를 한 건 이들이 처음이다. 최 씨는 주저하지 않고, '용서'라는 말을 꺼냈다.
'용서'를 말한 이들은 최 씨 말고도 더 있다.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 금남로. 거리는 어두웠고, 흩뿌려진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그 사이로 시민군 배 씨가 버스를 몰았다. 전남도청을 향하던 버스, 저지선을 구축하던 경찰들을 덮쳤다.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이 숨졌다.
배 씨는 그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82년 12월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고, 199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적 책임은 피했지만, 배 씨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9일, 배 씨는 힘겹게 유가족 앞에 섰다. "죄스럽다"는 배 씨의 말에 유가족은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배OO 씨/ 당시 버스 운전사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그냥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정원영 / 고 정충길 경사 아들 "선생님이 이제 아픔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안아주십시오." |
'5월의 광주' ... 그 자리에는 수많은 시민과 계엄군, 경찰 등이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 그 가족은 아픔을 안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42년...이제서야 '사과'와 '용서'라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진정 사과해야 할, 용서받기엔 너무 큰 죄를 저지른 책임자들은 입을 닫고 있다. 전두환은 사과 없이 눈을 감았다.
남아 있는 신군부의 사죄. 그리고 진상규명. 어렵사리 '사과'와 '용서'를 말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분명한 건 배 씨의 사과가 전부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을 시작으로 사과해야 할 당사자들의 사과가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배 씨를 만났다. 우리도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용기에 말없이 응할 뿐이다."
'용서'를 결심한 5·18 순직 경찰관 유족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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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후] 5월 광주…‘사과’ 그리고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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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2-05-22 09: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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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1일. 최정희 씨의 남편은 소를 판 돈을 받아오겠다며 전남 담양 집에서 광주로 떠났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 돼 남편은 싸늘한 주검이 돼 집 앞마당에 놓였다. 광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 광주교도소 근처에서 난데없는 계엄군의 총격을 받은 것이다.
"밥이 식을 때까지 오지 않은 당신을 교도소에서 시신으로 만났지요. 이 억울한 마음을 세상천지에 누가 또 알까요. 젊어선 3남매 키우느라 너무 팍팍해서 당신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서른여섯 나이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요." - 남편에게 띄운 최정희 씨 편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 中 2020년 5월 18일) |
한(恨)으로 보낸 42년. 취재진은 광주 시민에 사과한 계엄군의 영상을 최 씨에게 전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5·18 민주화운동.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준 이들 중 사과를 한 건 이들이 처음이다. 최 씨는 주저하지 않고, '용서'라는 말을 꺼냈다.
'용서'를 말한 이들은 최 씨 말고도 더 있다.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 금남로. 거리는 어두웠고, 흩뿌려진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그 사이로 시민군 배 씨가 버스를 몰았다. 전남도청을 향하던 버스, 저지선을 구축하던 경찰들을 덮쳤다. 이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이 숨졌다.
배 씨는 그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82년 12월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고, 199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적 책임은 피했지만, 배 씨의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9일, 배 씨는 힘겹게 유가족 앞에 섰다. "죄스럽다"는 배 씨의 말에 유가족은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배OO 씨/ 당시 버스 운전사 "뭐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그냥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정원영 / 고 정충길 경사 아들 "선생님이 이제 아픔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안아주십시오." |
'5월의 광주' ... 그 자리에는 수많은 시민과 계엄군, 경찰 등이 있었다. 살아남은 이들, 그 가족은 아픔을 안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42년...이제서야 '사과'와 '용서'라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진정 사과해야 할, 용서받기엔 너무 큰 죄를 저지른 책임자들은 입을 닫고 있다. 전두환은 사과 없이 눈을 감았다.
남아 있는 신군부의 사죄. 그리고 진상규명. 어렵사리 '사과'와 '용서'를 말하는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분명한 건 배 씨의 사과가 전부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을 시작으로 사과해야 할 당사자들의 사과가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배 씨를 만났다. 우리도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용기에 말없이 응할 뿐이다."
'용서'를 결심한 5·18 순직 경찰관 유족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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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기자 ssoo@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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