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TV에서 얼굴 가려라”…탈레반, 여성 억압 재개

입력 2022.05.2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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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TV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앵커들이, 어제(22일)부터 얼굴을 가리고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진행자들은 눈만 겨우 내놓은 채 코와 입 등 얼굴을 가리고 뉴스를 전달했습니다. 재집권한 탈레반 당국이 TV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도록 하는 새로운 법령을 공포했기 때문입니다.

아프간 정부는 이 정책이 '권고'일 뿐이라면서도, 법안의 내용은 "최종적이고 타협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위반 시 제재 조치가 따를 것이라고 했는데 제재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 탈레반 "얼굴 가리지 않은 여성은 방송 출연 금지"

아프가니스탄 TV 방송에서 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도록 한 조치가 첫 시행된 22일 톨로뉴스의 뉴스 스튜디오 모습.아프가니스탄 TV 방송에서 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도록 한 조치가 첫 시행된 22일 톨로뉴스의 뉴스 스튜디오 모습.

이에 따라 앵커, 기자, 출연자 할 것없이 아프간 방송에 출연하는 모든 여성들이 얼굴을 천이나 마스크로 가린 채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24시간 뉴스채널 톨로뉴스(TOLO news)의 여성 앵커인 소냐 냐지는 얼굴을 가린 채 뉴스를 진행한 뒤 알자지라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냐지는 "얼굴을 가린 것 때문에 프로그램 진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방송국의 앵커인 파리다 시알도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무슬림이기 때문에 히잡을 쓰고 머리카락을 가린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방송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연속해서 두세 시간을 그 상태로 얘기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밝혔습니다.

역시 톨로뉴스 앵커인 카티라 아흐마디는 "제대로 숨쉬거나 말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고 전했습니다.

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는 조치가 시행되기 이전인 지난해 9월, 톨로뉴스의 아침 방송에서 여성 앵커가 히잡을 착용한 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는 조치가 시행되기 이전인 지난해 9월, 톨로뉴스의 아침 방송에서 여성 앵커가 히잡을 착용한 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

탈레반의 이 같은 조치에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여성 앵커들은 더욱 반발하고 있습니다. 냐지는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이슬람 율법이 아니어서, 모든 여성 진행자들이 이 같은 조치를 예상할 수 없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탈레반 당국은 얼굴을 가릴 때 천과 함께 마스크도 착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냐지는 마스크 착용이야말로 외부의 문화가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여성 언론인들은 이런 조치가 아프가니스탄의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여성 앵커들이 얼굴을 가리라는 지시를 거부하려 하자, 아프간 당국이 방송국에, '얼굴을 가리지 않는 여성들을 방송에서 배제하거나 해고하라'는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여성과 연대하겠다" 함께 얼굴 가린 남성 앵커들

여성 앵커들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한 조치가 시행되자, 남성 앵커들이 이에 반발해 연대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날 톨로뉴스의 모든 앵커는 남녀 구분 없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언론계에서 여러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인데, 톨로뉴스는 자사 홈페이지 상단에 입장문을 올려 "당국이 TV프로그램에서 여성 앵커들의 얼굴을 가리도록 한 법령에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면서 "TV에 보이는 (얼굴을 가린) 여성의 이미지는 가상의 것이지, 실제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탈레반은 이 같은 조치가 "우리의 명령이 아니라 신의 지시"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프간 정부 '권선징악부'(탈레반식으로 이슬람 율법을 해석해 시민들의 일상을 규율하는 부처)는 "얼굴을 가리는 것은 히잡의 일부"라면서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것은 히잡을 엄격하게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히잡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여성을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 탈레반, 여성 억압 조치 잇따라 부활시켜

지난해 8월 재집권 당시 여성 앵커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던 탈레반은 최근 들어 이전의 억압적인 조치들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정권을 장악했던 1996년부터 2001년에도 여성의 공적 활동과 교육을 금지하고 전신을 천으로 감싸는 부르카 착용을 강요한 바 있습니다.

탈레반 집권 당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착용한 모습탈레반 집권 당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착용한 모습

탈레반은 이달 초 모든 여성에게 공공 장소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여성이 이 같은 복식 규정을 위반하면 남성 친척이 처벌받도록 했습니다. 여성은 필요할 때만 집을 벗어날 수 있다면서 장거리 여행은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도록 했고, 여성 지원 사회단체들은 해산시켰습니다.

재집권 당시 여학생들의 교육을 허용할 것이라고 한 약속도 뒤집었습니다. 탈레반은 최근 여학생은 6학년까지만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대학에서는 남성과 여성 학생들의 수업일을 분리했습니다.

이 같은 탈레반의 조치에 대해, 전 아프간 의회 부대변인인 파우지아 쿠피는 "탈레반이 여성의 옷차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주요 이슈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탈레반은 경제난에 대응하거나, 부정부패, 전쟁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법령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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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은 TV에서 얼굴 가려라”…탈레반, 여성 억압 재개
    • 입력 2022-05-23 15: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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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TV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앵커들이, 어제(22일)부터 얼굴을 가리고 출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 진행자들은 눈만 겨우 내놓은 채 코와 입 등 얼굴을 가리고 뉴스를 전달했습니다. 재집권한 탈레반 당국이 TV에 나오는 여성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도록 하는 새로운 법령을 공포했기 때문입니다.

아프간 정부는 이 정책이 '권고'일 뿐이라면서도, 법안의 내용은 "최종적이고 타협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위반 시 제재 조치가 따를 것이라고 했는데 제재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 탈레반 "얼굴 가리지 않은 여성은 방송 출연 금지"

아프가니스탄 TV 방송에서 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도록 한 조치가 첫 시행된 22일 톨로뉴스의 뉴스 스튜디오 모습.
이에 따라 앵커, 기자, 출연자 할 것없이 아프간 방송에 출연하는 모든 여성들이 얼굴을 천이나 마스크로 가린 채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24시간 뉴스채널 톨로뉴스(TOLO news)의 여성 앵커인 소냐 냐지는 얼굴을 가린 채 뉴스를 진행한 뒤 알자지라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냐지는 "얼굴을 가린 것 때문에 프로그램 진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방송국의 앵커인 파리다 시알도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무슬림이기 때문에 히잡을 쓰고 머리카락을 가린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방송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연속해서 두세 시간을 그 상태로 얘기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밝혔습니다.

역시 톨로뉴스 앵커인 카티라 아흐마디는 "제대로 숨쉬거나 말할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고 전했습니다.

여성 앵커의 얼굴을 가리는 조치가 시행되기 이전인 지난해 9월, 톨로뉴스의 아침 방송에서 여성 앵커가 히잡을 착용한 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
탈레반의 이 같은 조치에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여성 앵커들은 더욱 반발하고 있습니다. 냐지는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것은 이슬람 율법이 아니어서, 모든 여성 진행자들이 이 같은 조치를 예상할 수 없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탈레반 당국은 얼굴을 가릴 때 천과 함께 마스크도 착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냐지는 마스크 착용이야말로 외부의 문화가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여성 언론인들은 이런 조치가 아프가니스탄의 공공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여성 앵커들이 얼굴을 가리라는 지시를 거부하려 하자, 아프간 당국이 방송국에, '얼굴을 가리지 않는 여성들을 방송에서 배제하거나 해고하라'는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여성과 연대하겠다" 함께 얼굴 가린 남성 앵커들

여성 앵커들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한 조치가 시행되자, 남성 앵커들이 이에 반발해 연대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날 톨로뉴스의 모든 앵커는 남녀 구분 없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방송을 진행했습니다.


언론계에서 여러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인데, 톨로뉴스는 자사 홈페이지 상단에 입장문을 올려 "당국이 TV프로그램에서 여성 앵커들의 얼굴을 가리도록 한 법령에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다"면서 "TV에 보이는 (얼굴을 가린) 여성의 이미지는 가상의 것이지, 실제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탈레반은 이 같은 조치가 "우리의 명령이 아니라 신의 지시"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프간 정부 '권선징악부'(탈레반식으로 이슬람 율법을 해석해 시민들의 일상을 규율하는 부처)는 "얼굴을 가리는 것은 히잡의 일부"라면서 "얼굴을 가리지 않는 것은 히잡을 엄격하게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히잡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은 여성을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 탈레반, 여성 억압 조치 잇따라 부활시켜

지난해 8월 재집권 당시 여성 앵커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던 탈레반은 최근 들어 이전의 억압적인 조치들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정권을 장악했던 1996년부터 2001년에도 여성의 공적 활동과 교육을 금지하고 전신을 천으로 감싸는 부르카 착용을 강요한 바 있습니다.

탈레반 집권 당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착용한 모습
탈레반은 이달 초 모든 여성에게 공공 장소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여성이 이 같은 복식 규정을 위반하면 남성 친척이 처벌받도록 했습니다. 여성은 필요할 때만 집을 벗어날 수 있다면서 장거리 여행은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도록 했고, 여성 지원 사회단체들은 해산시켰습니다.

재집권 당시 여학생들의 교육을 허용할 것이라고 한 약속도 뒤집었습니다. 탈레반은 최근 여학생은 6학년까지만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한했습니다. 대학에서는 남성과 여성 학생들의 수업일을 분리했습니다.

이 같은 탈레반의 조치에 대해, 전 아프간 의회 부대변인인 파우지아 쿠피는 "탈레반이 여성의 옷차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주요 이슈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탈레반은 경제난에 대응하거나, 부정부패, 전쟁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법령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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