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나온 ‘우크라 영토양보론’…젤렌스키 정면 반박

입력 2022.05.26 (17:19) 수정 2022.05.2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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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석 달을 넘기면서, 우크라이나가 일부 영토를 양보하고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일각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현지 시각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전쟁을 마치려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를 일부 양보하고 정전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도 사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영토 회복은 비현실적인 목표라며, 전쟁 비용과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현지 시각 25일 영상 연설을 통해, "그곳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 키신저 "침공 이전 경계로 협상해야…러시아 참패시키면 안 돼"

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 전 장관은 국제정치에서 이념이나 도덕보다 현실정치를 강조하는 학자로 유명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그는 전쟁의 장기화가 미국과 서방 세계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냉정하게 지적했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국과 서방 세계가 러시아군에 참패를 안기려는 시도는 유럽의 장기적 안정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을 '침공 이전 상태(status quo ante)'로 협상하도록 서방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무기 지원으로 반격에 나서 러시아가 점령했던 자국 영토의 1/4을 수복했습니다. 또,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예전에 빼앗긴 크름반도와 돈바스 지역까지 탈환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침공 이전 상태'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크름반도를 복속하고 비공식적으로 돈바스 지역을 지배한 2014년 이후의 상태를 인정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격변과 긴장을 촉발하지 않으려면 협상을 두 달 안에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침공 이전의 경계선 이상을 목표로 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자유가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전쟁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국 일간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해야 할 일은 유럽의 국경이 아닌 중립적인 완충 국가가 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보여온 영웅적 행동을 지혜와 결합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외신들은 이 같은 입장이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사설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9일 "우크라이나 전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지만, 미국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가 자유로워지도록 미국이 동맹과 함께 지지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한다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전면전에 미국이 돌입하는 것은 최선의 이익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신문은 미국인들에게는 우크라이나보다 인플레이션과 국제 식량난, 에너지 불안정이 더 와닿는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가 2014년 이전에 러시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는 것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면서, "비현실적인 기대로 인해 미국과 나토가 비용이 많이 들고 장기화되는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싸우고, 죽고, 집을 잃는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며, 전쟁의 끝이 어떻게 될지 결정하는 일도 그들”이라며 “어떤 타협이 요구되더라도 고통스러운 영토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한 발짝 물러설 것을 요구했습니다.

■ 젤렌스키 "허구의 평화로 평범한 사람들 희생해선 안 돼"

26일 영상 연설을 통해  볼로디비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양보론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26일 영상 연설을 통해 볼로디비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양보론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이 같은 영토양보론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 연설에서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무슨 짓을 하든 '그래, 여기서 이득을 좀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올해 다보스에서 또다시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1923년생으로 올해 99살인 키신저 전 장관을 '먼 과거에서 나타난 인물'이라면서 "그의 달력이 2022년이 아닌 1938년, 뮌헨에 멈춰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언급한 1938년 뮌헨은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독일의 히틀러에게 체코의 영토 일부를 넘기기로 하고 평화 협정을 맺은 뮌헨협정을 뜻합니다.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다음해 체코를 침공했고 이어 폴란드까지 공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15살이었던 키신저가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실을 언급하며, "당시의 그였다면 탈출하거나 싸우는 대신 나치와 타협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대해서도 마찬기자로 1938년에도 그런 얘기를 썼을 것 같다면서, 지금은 2022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게 양보하라고 우크라이나에 조언하는 '위대한 지정학자'들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을 보기를 꺼린다"고 말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영토를 허구적인 평화와 바꿀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계가 (국제관계에서) 러시아를 항상 고려하면서, 우크라이나는 고려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잠재력을 잘못 평가하거나, 아예 평가를 시작하지 않거나, 평가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재자와의 또다른 회의를 하느라 바쁜 이들의 이익과 우크라이나의 이익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쟁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의 다수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82%는 '전쟁이 길어지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영토를 포기할 수 있다'는 응답은 10%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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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서 나온 ‘우크라 영토양보론’…젤렌스키 정면 반박
    • 입력 2022-05-26 17:19:06
    • 수정2022-05-26 17: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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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석 달을 넘기면서, 우크라이나가 일부 영토를 양보하고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일각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현지 시각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전쟁을 마치려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영토를 일부 양보하고 정전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도 사설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영토 회복은 비현실적인 목표라며, 전쟁 비용과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현지 시각 25일 영상 연설을 통해, "그곳에 살고 있는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 키신저 "침공 이전 경계로 협상해야…러시아 참패시키면 안 돼"

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 전 장관은 국제정치에서 이념이나 도덕보다 현실정치를 강조하는 학자로 유명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그는 전쟁의 장기화가 미국과 서방 세계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냉정하게 지적했습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미국과 서방 세계가 러시아군에 참패를 안기려는 시도는 유럽의 장기적 안정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을 '침공 이전 상태(status quo ante)'로 협상하도록 서방 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무기 지원으로 반격에 나서 러시아가 점령했던 자국 영토의 1/4을 수복했습니다. 또,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예전에 빼앗긴 크름반도와 돈바스 지역까지 탈환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침공 이전 상태'는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크름반도를 복속하고 비공식적으로 돈바스 지역을 지배한 2014년 이후의 상태를 인정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격변과 긴장을 촉발하지 않으려면 협상을 두 달 안에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침공 이전의 경계선 이상을 목표로 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자유가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전쟁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국 일간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해야 할 일은 유럽의 국경이 아닌 중립적인 완충 국가가 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보여온 영웅적 행동을 지혜와 결합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외신들은 이 같은 입장이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사설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9일 "우크라이나 전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지만, 미국은 준비되지 않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우크라이나가 자유로워지도록 미국이 동맹과 함께 지지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한다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전면전에 미국이 돌입하는 것은 최선의 이익이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신문은 미국인들에게는 우크라이나보다 인플레이션과 국제 식량난, 에너지 불안정이 더 와닿는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우크라이나가 2014년 이전에 러시아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는 것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라면서, "비현실적인 기대로 인해 미국과 나토가 비용이 많이 들고 장기화되는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싸우고, 죽고, 집을 잃는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며, 전쟁의 끝이 어떻게 될지 결정하는 일도 그들”이라며 “어떤 타협이 요구되더라도 고통스러운 영토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될 것”이라고 미국 정부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한 발짝 물러설 것을 요구했습니다.

■ 젤렌스키 "허구의 평화로 평범한 사람들 희생해선 안 돼"

26일 영상 연설을 통해  볼로디비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양보론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모습.
이 같은 영토양보론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 연설에서 강하게 반박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무슨 짓을 하든 '그래, 여기서 이득을 좀 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올해 다보스에서 또다시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그는 1923년생으로 올해 99살인 키신저 전 장관을 '먼 과거에서 나타난 인물'이라면서 "그의 달력이 2022년이 아닌 1938년, 뮌헨에 멈춰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언급한 1938년 뮌헨은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독일의 히틀러에게 체코의 영토 일부를 넘기기로 하고 평화 협정을 맺은 뮌헨협정을 뜻합니다. 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다음해 체코를 침공했고 이어 폴란드까지 공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38년 뮌헨 협정 당시 15살이었던 키신저가 나치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실을 언급하며, "당시의 그였다면 탈출하거나 싸우는 대신 나치와 타협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대해서도 마찬기자로 1938년에도 그런 얘기를 썼을 것 같다면서, 지금은 2022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게 양보하라고 우크라이나에 조언하는 '위대한 지정학자'들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을 보기를 꺼린다"고 말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영토를 허구적인 평화와 바꿀 수 없다"고 못박았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계가 (국제관계에서) 러시아를 항상 고려하면서, 우크라이나는 고려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잠재력을 잘못 평가하거나, 아예 평가를 시작하지 않거나, 평가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재자와의 또다른 회의를 하느라 바쁜 이들의 이익과 우크라이나의 이익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쟁이 출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의 다수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82%는 '전쟁이 길어지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영토를 포기할 수 있다'는 응답은 10%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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