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44만 명이 버스를 무료로 타려면 얼마가 들까?

입력 2022.05.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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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이상 어르신들은 버스를 무료로 타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곳곳에 이런 공약이 등장했습니다. 서울, 인천, 세종, 강원…. 시도지사뿐 아니라 시장 등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들도 많이 내놓은 공약입니다.

그런데 이 공약, 지키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 같은 공약인데…예산은 50억 원 vs. 530억 원

인천에선 여야 시장 후보가 똑같이 '65세 이상 버스비 무료' 공약을 냈습니다. 후보들에게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물어봤습니다.

민주당 박남춘 후보 측, 연간 530억 원이 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힘 유정복 후보 측은 연간 5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똑같은 지역에서 같은 공약을 두고 필요한 예산 추계가 10배 넘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왜 그럴까. 인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양쪽 다 44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다만 박남춘 후보 측에서는 노인 1인당 연간 12만 원어치 정도 버스를 이용할 것으로 추산했고, 유정복 후보 측에서는 65세 이상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 이용액이 연간 300억 정도인데, 버스는 지하철의 6분의 1 정도 이용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노인들은 지하철보다 버스 타기가 어렵다는 취지에서입니다.)

국민의힘 최민호 세종시장 후보 선거 공보국민의힘 최민호 세종시장 후보 선거 공보

세종시장 후보들도 여야 모두 '버스비 무료' 공약을 내놨습니다. 민주당 이춘희 후보는 '단계적 무료'를, 국민의힘 최민호 후보는 연령에 관계없이 '전면 무료'를 약속했습니다. 최민호 후보 측, 버스 전면 무료 공약을 지키는 데 30억 원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춘희 후보는 18세 이하와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우선 무료화하는 데 65억 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이춘희 후보는 후보 토론회에서 세종교통공사와 민간버스회사 두 곳의 버스 요금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179억 원인데 30억 원으로 어떻게 '버스 전면 무료화'가 가능하냐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최민호 후보는 이에 대해 "현직이 아니어서 자료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KBS는 이후 최민호 후보 측에 '버스비 전면 무료'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다시 추계를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대략 90억 원 정도로 생각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예산 계획 명시하도록 한 '선거공약서'…제출한 시도지사 후보는 7명

주먹구구식이라도 공약을 지키는 데 얼마나 예산이 필요할지 계산해 공개하는 후보는 '양반'입니다. 후보들이 선관위에 제출하는 '선거 공약서'라는 게 있습니다. 선거 공보와 별개로,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고 그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지 구체적으로 적게 돼 있습니다.

의무 사항이 아니긴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 시도지사 후보자 55명 가운데 선거 공약서를 제출한 후보는 단 7명이었습니다. 2014년, 2018년 지방선거 때 70% 가까이가 제출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예산이 얼마나 들지 계산해 공개하면 그게 맞는지 상대 후보와 유권자들이 따지고 들까 봐, 오히려 논란에 휩싸일까 봐, 그냥 공개하지 않는 걸까요?

■시도지사 후보 31명 공약 지키는데 '980조 원'

KBS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와 함께 6.1 지방선거에 출마한 원내정당 시도지사 후보 41명을 대상으로,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따져봤습니다. 후보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예산 규모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31명의 후보가 답했습니다. 이 31명이 공약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밝힌 예산을 더해봤더니 980조 원 가까이 됐습니다. 올해 전국 지자체 예산이 288조 원 정도인데 그 3배가 넘는 돈입니다.


후보들이 가장 많은 돈을 쓰겠다고 한 것은 철도를 깔고 공항을 만들고 주택을 짓는 대형건설 공약, 사회기반시설(SOC) 공약이었습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이 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제출한 10대 공약만 따졌을 때도 340조 원가량이 들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형 건설공약 가운데 단일 사업으로 가장 규모가 큰 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GTX입니다. 서울, 경기, 인천에 출마한 모든 시도지사 후보가 당을 가리지 않고 낸 공약이기도 합니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약속했던 걸 그대로 다시 공약으로 냈고, 강원지사 후보들은 춘천 연장을 충남지사 후보들은 천안·아산 연장을 추가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GTX 추가 건설에 필요한 예산, 20조 원이 훌쩍 넘습니다.

후보들은 GTX는 민자 사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민간 자본으로 지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공사 중인 GTX-A 노선의 예를 보더라도 민자사업이라지만 건설보조금 등으로 정부와 지자체 등의 예산이 투입되는데 이게 총 사업비의 70% 가까이 됩니다. 또 민자 사업의 경우 수익이 나지 않으면 요금을 올리게 될테니 부담이 시민들에게 돌아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자사업, 민자유치가 만능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재원 조달 방안을 물으면 후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 '국비 확보'입니다. 여기에도 허점이 있습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이 확보하겠다는 국비를 더해봤더니 300조 원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국정 과제 발표 당시 "정부 예산 600조 원 가운데 인건비 등 경직성 예산을 빼고 사업 구조조정 등을 통해 쓸 수 있는 예산이 20조 원"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국비, 즉 정부 예산 중 가용할 수 있는 돈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의 '국비 확보' 약속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재정계획이 없는 정책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우선순위 없이 한정된 재정으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과 같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선거 공약이라는 걸, 꼭 예산 계획을 완벽히 갖추고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만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돈이 드는 공약이라도 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저 '다 해주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겠다'고, 믿을 수 있는 약속을 내놓는 성의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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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르신 44만 명이 버스를 무료로 타려면 얼마가 들까?
    • 입력 2022-05-28 08:00:51
    취재K

"65세 이상 어르신들은 버스를 무료로 타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곳곳에 이런 공약이 등장했습니다. 서울, 인천, 세종, 강원…. 시도지사뿐 아니라 시장 등 기초자치단체장 후보들도 많이 내놓은 공약입니다.

그런데 이 공약, 지키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 같은 공약인데…예산은 50억 원 vs. 530억 원

인천에선 여야 시장 후보가 똑같이 '65세 이상 버스비 무료' 공약을 냈습니다. 후보들에게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물어봤습니다.

민주당 박남춘 후보 측, 연간 530억 원이 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힘 유정복 후보 측은 연간 50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똑같은 지역에서 같은 공약을 두고 필요한 예산 추계가 10배 넘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왜 그럴까. 인천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양쪽 다 44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다만 박남춘 후보 측에서는 노인 1인당 연간 12만 원어치 정도 버스를 이용할 것으로 추산했고, 유정복 후보 측에서는 65세 이상 노인들의 지하철 무임승차 이용액이 연간 300억 정도인데, 버스는 지하철의 6분의 1 정도 이용할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노인들은 지하철보다 버스 타기가 어렵다는 취지에서입니다.)

국민의힘 최민호 세종시장 후보 선거 공보
세종시장 후보들도 여야 모두 '버스비 무료' 공약을 내놨습니다. 민주당 이춘희 후보는 '단계적 무료'를, 국민의힘 최민호 후보는 연령에 관계없이 '전면 무료'를 약속했습니다. 최민호 후보 측, 버스 전면 무료 공약을 지키는 데 30억 원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춘희 후보는 18세 이하와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우선 무료화하는 데 65억 원이 든다고 했습니다.

이춘희 후보는 후보 토론회에서 세종교통공사와 민간버스회사 두 곳의 버스 요금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179억 원인데 30억 원으로 어떻게 '버스 전면 무료화'가 가능하냐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최민호 후보는 이에 대해 "현직이 아니어서 자료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KBS는 이후 최민호 후보 측에 '버스비 전면 무료'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다시 추계를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대략 90억 원 정도로 생각한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예산 계획 명시하도록 한 '선거공약서'…제출한 시도지사 후보는 7명

주먹구구식이라도 공약을 지키는 데 얼마나 예산이 필요할지 계산해 공개하는 후보는 '양반'입니다. 후보들이 선관위에 제출하는 '선거 공약서'라는 게 있습니다. 선거 공보와 별개로,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고 그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지 구체적으로 적게 돼 있습니다.

의무 사항이 아니긴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 시도지사 후보자 55명 가운데 선거 공약서를 제출한 후보는 단 7명이었습니다. 2014년, 2018년 지방선거 때 70% 가까이가 제출했던 것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예산이 얼마나 들지 계산해 공개하면 그게 맞는지 상대 후보와 유권자들이 따지고 들까 봐, 오히려 논란에 휩싸일까 봐, 그냥 공개하지 않는 걸까요?

■시도지사 후보 31명 공약 지키는데 '980조 원'

KBS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와 함께 6.1 지방선거에 출마한 원내정당 시도지사 후보 41명을 대상으로, 공약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할지 따져봤습니다. 후보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예산 규모를 공개해달라고 요청했는데, 31명의 후보가 답했습니다. 이 31명이 공약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밝힌 예산을 더해봤더니 980조 원 가까이 됐습니다. 올해 전국 지자체 예산이 288조 원 정도인데 그 3배가 넘는 돈입니다.


후보들이 가장 많은 돈을 쓰겠다고 한 것은 철도를 깔고 공항을 만들고 주택을 짓는 대형건설 공약, 사회기반시설(SOC) 공약이었습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이 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 제출한 10대 공약만 따졌을 때도 340조 원가량이 들 것으로 추산됩니다.

대형 건설공약 가운데 단일 사업으로 가장 규모가 큰 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GTX입니다. 서울, 경기, 인천에 출마한 모든 시도지사 후보가 당을 가리지 않고 낸 공약이기도 합니다. 여야 대선 후보들이 약속했던 걸 그대로 다시 공약으로 냈고, 강원지사 후보들은 춘천 연장을 충남지사 후보들은 천안·아산 연장을 추가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GTX 추가 건설에 필요한 예산, 20조 원이 훌쩍 넘습니다.

후보들은 GTX는 민자 사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민간 자본으로 지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공사 중인 GTX-A 노선의 예를 보더라도 민자사업이라지만 건설보조금 등으로 정부와 지자체 등의 예산이 투입되는데 이게 총 사업비의 70% 가까이 됩니다. 또 민자 사업의 경우 수익이 나지 않으면 요금을 올리게 될테니 부담이 시민들에게 돌아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자사업, 민자유치가 만능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재원 조달 방안을 물으면 후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 '국비 확보'입니다. 여기에도 허점이 있습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이 확보하겠다는 국비를 더해봤더니 300조 원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안철수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국정 과제 발표 당시 "정부 예산 600조 원 가운데 인건비 등 경직성 예산을 빼고 사업 구조조정 등을 통해 쓸 수 있는 예산이 20조 원"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국비, 즉 정부 예산 중 가용할 수 있는 돈이 많지 않다는 겁니다. 시도지사 후보들의 '국비 확보' 약속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재정계획이 없는 정책은 허구"라고 말합니다. "우선순위 없이 한정된 재정으로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과 같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선거 공약이라는 걸, 꼭 예산 계획을 완벽히 갖추고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만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돈이 드는 공약이라도 낼 수 있습니다.

다만 그저 '다 해주겠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겠다'고, 믿을 수 있는 약속을 내놓는 성의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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