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평가 엇갈렸다는 ‘브로커’, 저는 이렇게 봤습니다

입력 2022.06.05 (08:01)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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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2)_제공 CJ ENM.〈브로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2)_제공 CJ ENM.

※주의 : 영화 '브로커'와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될 만 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타지임을 직감했다. 엄마 소영(이지은)이 아이를 안고 비가 쏟아지는 달동네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는데, 생후 3개월쯤 되는 아기가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해피엔드'에서처럼 애한테 수면제라도 먹였겠지,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다음 컷에서 아기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 그래, 대단히 무던한 아기구나. 너무 무던해서 기저귀를 가는 것도 분유를 먹이는 장면도 영화 내내 딱 한 번 나오고, 몇 시간씩 낡은 승합차 카시트에 앉아 장거리 운전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울거나 보채지 않으며 거의 대부분 얌전히 품에 안겨 있기만 하는 아기. 내 친구 아기는 엄마 품에서 잠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지러지고, 3~4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먹으며 하루에도 열댓 번은 기저귀를 갈던데. 밤에도 통잠은커녕 두 시간마다 깨서 울던데. 그게 일반적인 아기의 발달 단계인데. 아기는 원래 그러라고 아기인데. 우리 집 고양이보다 손이 안 가는 '기적의 신생아'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육아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피상적인지 한참 더 쓸 수 있지만, '브로커'의 장르가 동화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 동화라면 살인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특정되고도 저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 신생아를 암거래하는 브로커 일당이 저렇게 눈에 띄는 5인 집단을 유지하며 놀이 공원과 고급 호텔을 드나들 수 있지. 공식 설정상 어두운 과거와 상처로 가득한 캐릭터인 소영이 만난 지 이틀쯤 된 남에게 묻지도 않은 제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감상적인 대사를 읊는 것도, 수감 생활을 포함해 산전수전 다 겪은 상현(송강호)이 일주일 만에 선의와 박애 정신 그 자체로 변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다.

똑같이 '가족 아닌 가족'을 다룬 2018년 작품 '어느 가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섯 남녀를 보여주며 정상 가족의 신화에 도전했다. " 낳으면 다 엄마입니까? 시체를 버렸다고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의 애드리브만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진 심문 장면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자청한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카메라를 노려보며 묻는다. 낳는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게 아니며, 숨진 할머니의 진짜 가족은 멀리 떨어져 살며 안부조차 챙기지 않는 친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유대 관계를 맺은 우리라고 얘기한다. 이 호소가 설득력이 있었던 건, 최소 늦가을에서 한여름까지 네 계절을 온전히 거치면서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가 충분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를 쪄먹고 소면을 삶아 먹고 함께 목욕하고 갑자기 내린 비를 닦아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을.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8)_출처 IMDB.〈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8)_출처 IMDB.

그러나 네 계절을 일주일 남짓한 기간으로 줄이고, 생활감 가득한 집안 대신 놀이공원과 모텔 같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배경을 옮긴 '브로커'는 부족한 유대관계의 근거를 다시 정상 가족, 특히 위대한 모성 신화에 온전히 기대는 방향으로 후퇴한다. 영화 말미, 경찰에 자수하는 소영의 선택은 유사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묘사되지만 상현은 이를 두고 "엄마니까 그럴 수 있다"며 감싼다. 당초에 소영이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것도 아들 우성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였고, 영화 내내 아들에게 말 한 번 걸지 않은 이유도 행여나 정들까 봐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모성애의 발현이었다는 속사정까지 영화는 친절히 덧붙인다. 결정적으로, 소영-우성 모자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희생을 감수하는 역할은 이 대안 가족의 '아버지'인 상현의 몫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 (유사)가족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는 아버지…. 내가 지금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보고 있는 게 맞나 의심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러나 영화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경찰 수진(배두나)의 입을 빌려 "어쩌면 우리가 브로커인 건 아닐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신생아를 사고파는 인신매매 일당을 추적하던 형사가 단 며칠간 잠복근무 끝에 던지는 질문치고는 꽤나 직설적이고 급진적인데, 영화는 이 질문의 근거를 착실히 보여주지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도 않는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를 서둘러 입양 보내거나 보육시설에 맡겨 눈앞에서 치우고 없던 일 취급하려는 사회의 비정함을 꼬집으려는 대사였겠지만, 이 영화의 핵심 정서가 앞서 말한 모성 신화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되려 기만적이다. 왜 많은 여성이 신원을 숨기고 베이비박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지, 왜 한국에서 베이비박스에 맡겨지는 아이의 수가 일본의 10배에 이르는지 같은 문제를 파고들기보다 영화는 손쉽게 사람들의 선량함과 모성에 기대어 끝을 맺는다.

결국, 남는 건 지친 어른들의 자기연민과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관념적인 감상이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극 중에서 무려 다섯 번 반복되는 이 대사를 가장 뭉클하게 듣는 사람은 갓난아기 우성이 아니라 어른인 소영과 상현이다. 지치고 힘든 인생, 따뜻하게 위로해 주겠다는 선의는 고마운데, 나는 이를 고레에다 감독의 퇴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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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05 08:01:49
    • 수정2022-12-26 09:39:21
    씨네마진국
〈브로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22)_제공 CJ ENM.
※주의 : 영화 '브로커'와 '어느 가족'의 스포일러가 될 만 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타지임을 직감했다. 엄마 소영(이지은)이 아이를 안고 비가 쏟아지는 달동네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는데, 생후 3개월쯤 되는 아기가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해피엔드'에서처럼 애한테 수면제라도 먹였겠지, 생각하며 보고 있는데 다음 컷에서 아기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 그래, 대단히 무던한 아기구나. 너무 무던해서 기저귀를 가는 것도 분유를 먹이는 장면도 영화 내내 딱 한 번 나오고, 몇 시간씩 낡은 승합차 카시트에 앉아 장거리 운전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울거나 보채지 않으며 거의 대부분 얌전히 품에 안겨 있기만 하는 아기. 내 친구 아기는 엄마 품에서 잠시 떨어지기라도 하면 자지러지고, 3~4시간 간격으로 분유를 먹으며 하루에도 열댓 번은 기저귀를 갈던데. 밤에도 통잠은커녕 두 시간마다 깨서 울던데. 그게 일반적인 아기의 발달 단계인데. 아기는 원래 그러라고 아기인데. 우리 집 고양이보다 손이 안 가는 '기적의 신생아'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육아가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피상적인지 한참 더 쓸 수 있지만, '브로커'의 장르가 동화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 동화라면 살인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특정되고도 저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 신생아를 암거래하는 브로커 일당이 저렇게 눈에 띄는 5인 집단을 유지하며 놀이 공원과 고급 호텔을 드나들 수 있지. 공식 설정상 어두운 과거와 상처로 가득한 캐릭터인 소영이 만난 지 이틀쯤 된 남에게 묻지도 않은 제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감상적인 대사를 읊는 것도, 수감 생활을 포함해 산전수전 다 겪은 상현(송강호)이 일주일 만에 선의와 박애 정신 그 자체로 변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메시지다.

똑같이 '가족 아닌 가족'을 다룬 2018년 작품 '어느 가족'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섯 남녀를 보여주며 정상 가족의 신화에 도전했다. " 낳으면 다 엄마입니까? 시체를 버렸다고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정해진 각본 없이, 배우의 애드리브만으로 완성했다고 알려진 심문 장면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자청한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카메라를 노려보며 묻는다. 낳는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게 아니며, 숨진 할머니의 진짜 가족은 멀리 떨어져 살며 안부조차 챙기지 않는 친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유대 관계를 맺은 우리라고 얘기한다. 이 호소가 설득력이 있었던 건, 최소 늦가을에서 한여름까지 네 계절을 온전히 거치면서 이들의 일상을 카메라가 충분히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옥수수를 쪄먹고 소면을 삶아 먹고 함께 목욕하고 갑자기 내린 비를 닦아주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을.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2018)_출처 IMDB.
그러나 네 계절을 일주일 남짓한 기간으로 줄이고, 생활감 가득한 집안 대신 놀이공원과 모텔 같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배경을 옮긴 '브로커'는 부족한 유대관계의 근거를 다시 정상 가족, 특히 위대한 모성 신화에 온전히 기대는 방향으로 후퇴한다. 영화 말미, 경찰에 자수하는 소영의 선택은 유사 가족에 대한 배신으로 묘사되지만 상현은 이를 두고 "엄마니까 그럴 수 있다"며 감싼다. 당초에 소영이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것도 아들 우성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였고, 영화 내내 아들에게 말 한 번 걸지 않은 이유도 행여나 정들까 봐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모성애의 발현이었다는 속사정까지 영화는 친절히 덧붙인다. 결정적으로, 소영-우성 모자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희생을 감수하는 역할은 이 대안 가족의 '아버지'인 상현의 몫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위대한 어머니, (유사)가족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는 아버지…. 내가 지금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보고 있는 게 맞나 의심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러나 영화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경찰 수진(배두나)의 입을 빌려 "어쩌면 우리가 브로커인 건 아닐까?"하고 질문을 던진다. 신생아를 사고파는 인신매매 일당을 추적하던 형사가 단 며칠간 잠복근무 끝에 던지는 질문치고는 꽤나 직설적이고 급진적인데, 영화는 이 질문의 근거를 착실히 보여주지도, 여기서 더 나아가지도 않는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를 서둘러 입양 보내거나 보육시설에 맡겨 눈앞에서 치우고 없던 일 취급하려는 사회의 비정함을 꼬집으려는 대사였겠지만, 이 영화의 핵심 정서가 앞서 말한 모성 신화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되려 기만적이다. 왜 많은 여성이 신원을 숨기고 베이비박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지, 왜 한국에서 베이비박스에 맡겨지는 아이의 수가 일본의 10배에 이르는지 같은 문제를 파고들기보다 영화는 손쉽게 사람들의 선량함과 모성에 기대어 끝을 맺는다.

결국, 남는 건 지친 어른들의 자기연민과 '생명의 소중함'이라는 관념적인 감상이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극 중에서 무려 다섯 번 반복되는 이 대사를 가장 뭉클하게 듣는 사람은 갓난아기 우성이 아니라 어른인 소영과 상현이다. 지치고 힘든 인생, 따뜻하게 위로해 주겠다는 선의는 고마운데, 나는 이를 고레에다 감독의 퇴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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