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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34년…‘영원한 현역’ 송해 별세
입력 2022.06.08 (10:09) 수정 2022.06.19 (07:28) 취재K
“전국에 계신 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국내외 모든 근로자 여러분들, 원양 선원 여러분, 또 이역만리 해외에서 내일의 희망 속에 열심히 살아가시는 해외 우리 동포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매주 일요일 낮 이렇게 시작하던 친근한 입담을 이제 육성으로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일요일의 남자’ 송해 씨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봤습니다.
송해(1927~2022)송해(1927~2022)

장수 프로그램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자인 방송인 송해 씨가 오늘(8일) 별세했습니다. 1927년생으로 향년 95세입니다.

송해 씨는 올해 들어 건강 문제로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지난 3월엔 코로나19에 확진됐다가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송 씨는 최근 전국노래자랑 하차를 고민해 왔고, 지난 5일 2년여 만에 재개된 전국노래자랑 현장 녹화에도 불참했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코미디언협회 희극인장으로 치러집니다.

본명이 송복희인 송해 씨는 대한민국 최고령 방송인으로 방송계의 산증인으로 불립니다. 1954년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꾸준히 활동해 왔습니다.

특히 1988년부터 최근까지 '전국노래자랑' 사회자로 활약했습니다. 무려 34년간 국민의 일요일을 책임졌던 고인은 전 세계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가운데 최고령자로 공식 확인돼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육군 복무 시절육군 복무 시절
■ 단신 월남→악극단 가수→방송 코미디언→MC로
“그 때는 해주에 음악전문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음악을 잘하고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 교복이 참 멋있었어요. 감청색 유니폼 쫙 뽑아입고 모자 탁 쓰면 세상에 저거 한 번 돼 봤으면(…)부모님 몰래 그 학교를 들어갔죠.”
<KBS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2003.09.08.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 씨는 해주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배웠습니다. 중국 군가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율성이 설립하고 가곡 ‘산유화’를 작곡한 김순남이 가르친 학교입니다. 고인은 음악에 빠져서가 아니라 교복이 멋있어서 악기까지 사서 마련해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경험이 뒷날 연예계 생활의 발판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1954.03.05.경향신문 1954.03.05.
1951년 1.4 후퇴 때 가족을 뒤로 하고 홀로 월남한 고인은 3년 8개월간 군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고인의 경력은 1954년부터입니다. 고인은 육군 복무 중이던 1954년 3월 1일, 국방부가 서울 시공관에서 개최한 ‘3.1절 기념 3군 일선 사병 군가 콩쿨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창공악극단 시절(가운데)창공악극단 시절(가운데)
고인은 제대 후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를 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고인의 회고에 따르면 유랑극단인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를 했는데, 공연 사이사이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사 진행 경험을 쌓게 됐다고 합니다.
“군 제대하고 얻은 첫 직장이 ‘창공 악극단’이었어. 처음엔 청소도 하고, 선배들 심부름도 하고(…) 구력이 조금 붙으면 공연과 공연 사이, 바람잡이도 하고 시간 때우는 역할도 하고, 그러다가 노래도 부르게 되고, 나중엔 사회도 보게 되고…한 마디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 때 배운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버티는데 큰 자산이 됐지.”
-<KBS 아침마당> 2021.11.09.

고인은 악극단 시절 쌓은 경력을 인정받아 영화와 방송계에 진출했습니다. 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에서 단역을 맡아 영화배우로, 1964년엔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스무고개>에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TV 희극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활약하며 풍자 코미디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5년 11월부터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을 맡았습니다. 요즘 교통정보 방송의 원조 격인 이 프로그램은 출근길 교통 통신원을 연결해 실시간 교통상황을, 기상청을 연결해서는 그날 날씨를 전해주며 특히 운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지금도 황금시간대인 이 시간대 라디오는 시사 프로그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당시는 서울의 교통량이 급격히 늘면서 채널마다 교통정보 프로그램이 각축전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고인은 1989년 6월까지 무려 14년간 거의 날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 ’전국노래자랑‘ 34년…환갑 지나 찾아온 전성기

1988년 고인은 인생의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해 5월부터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겁니다. 예순하나, 여느 사람이라면 환갑 진갑 다 지나 사회에서 은퇴한다는 나이였습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이후 숱하게 출현한 국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입니다. 아흔다섯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34년간 고인은 손에서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놓지 않았습니다. 송해가 곧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이 곧 송해였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이면 어김없이 실로폰 소리에 흥겨운 음악과 함께 시청자들을 찾아간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조연급 연예인 송해 씨는 ’국민 MC‘ 로 거듭났습니다. 출연자와 함께 울고 웃고 노래하며 때로는 몸을 사리지 않은 진행으로 텔레비전 앞의 남녀노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악극단 가수 출신에 코미디언 활동, 라디오 MC로 잔뼈가 굵었던 고인은 노래, 연기, 진행 3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최장수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국내 최고령 방송인의 자리를 이어갔습니다.

☞관련 영상
방송80년 특집 ‘전국노래자랑 팔도명물총집합’ (https://www.youtube.com/watch?v=DUJegyI3T1w)


■ 평양까지 갔지만…고향 재령 땅 밟지 못해

<전국노래자랑>은 국내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일본과 미국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무대를 북한 평양으로까지 넓혔습니다.

황해도 재령 실향민인 고인은 평양에서 노래자랑 진행까지 했지만 정작 고향 재령 땅은 밟지 못했습니다. 이 경험은 고인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고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황해도 대표로 출연한 고인은 고향을 꼭 가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자신이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을 불렀습니다. 눈물 흘리며 툇마루에서 손 흔들며 이별한 어머니, 이후 만나지 못하고 70년이 흘렀다는 노랫말은 바로 20대에 단신으로 월남하면서 어머니와 헤어진 뒤 평생 만나지 못한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 “제 나이는 마흔여섯”… 아흔 넘어서도 현역 활동
“덧없이 흐르는 세월 한 것 없이 그렇게 갔구나 그래서 미안스러움도 많고 죄송스러운 것도 많아서 이제 (제 나이는) 마흔 여섯입니다 그럽니다. 마흔 여섯이면 4자하고 6자하고 꽉 찼기 때문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니까 거기 그냥 서 있습니다, 그런 얘기죠.”
<KBS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2003.09.08.

아흔이 넘어서도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고인은 남들이 자신의 나이를 물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렇게 답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쯤 더 활동할 거라고 생각하느냐의 질문에 130살까지 버티기로 시청자들과 약속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순 넘어 비로소 최전성기를 맞은 자신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돌려 한 것처럼 보입니다.

송해 씨는 서영춘, 곽규석, 배삼룡, 구봉서 씨 등 쟁쟁했던 코미디언들이 주역으로 활약하던 1960~70년대엔 그들에 가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사이, 평생 2인자에 머물 것 같았던 고인은 특유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인생 후반부 최고의 방송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2006년, 자신의 삶을 나팔꽃에 빗댄 노래 '나팔꽃 인생'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왜 나팔꽃이냐 묻자 답이 이랬습니다. "나팔꽃은 아침에 환하게 피었다 오후에 지고 다음날 다시 밝게 피는, 제 인생과 비슷한 꽃입니다"

[故 송해 추모 게시판 바로가기]
https://program.kbs.co.kr/1tv/enter/jarang/pc/board.html?smenu=f542bd&bbs_loc=T2000-0054-04-755689,list,none,1,0
  • 전국노래자랑 34년…‘영원한 현역’ 송해 별세
    • 입력 2022-06-08 10:09:41
    • 수정2022-06-19 07:28:27
    취재K
<strong>“전국에 계신 노래자랑 가족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국내외 모든 근로자 여러분들, 원양 선원 여러분, 또 이역만리 해외에서 내일의 희망 속에 열심히 살아가시는 해외 우리 동포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br /></strong><strong><br /></strong><strong>매주 일요일 낮 이렇게 시작하던 친근한 입담을 이제 육성으로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일요일의 남자’ 송해 씨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봤습니다. </strong>
송해(1927~2022)송해(1927~2022)

장수 프로그램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자인 방송인 송해 씨가 오늘(8일) 별세했습니다. 1927년생으로 향년 95세입니다.

송해 씨는 올해 들어 건강 문제로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고, 지난 3월엔 코로나19에 확진됐다가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송 씨는 최근 전국노래자랑 하차를 고민해 왔고, 지난 5일 2년여 만에 재개된 전국노래자랑 현장 녹화에도 불참했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는 코미디언협회 희극인장으로 치러집니다.

본명이 송복희인 송해 씨는 대한민국 최고령 방송인으로 방송계의 산증인으로 불립니다. 1954년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70년 가까이 현역 방송인으로 꾸준히 활동해 왔습니다.

특히 1988년부터 최근까지 '전국노래자랑' 사회자로 활약했습니다. 무려 34년간 국민의 일요일을 책임졌던 고인은 전 세계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가운데 최고령자로 공식 확인돼 기네스북에 올랐습니다.

육군 복무 시절육군 복무 시절
■ 단신 월남→악극단 가수→방송 코미디언→MC로
“그 때는 해주에 음악전문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음악을 잘하고 소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기 교복이 참 멋있었어요. 감청색 유니폼 쫙 뽑아입고 모자 탁 쓰면 세상에 저거 한 번 돼 봤으면(…)부모님 몰래 그 학교를 들어갔죠.”
<KBS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2003.09.08.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 씨는 해주음악전문학교에서 성악을 배웠습니다. 중국 군가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율성이 설립하고 가곡 ‘산유화’를 작곡한 김순남이 가르친 학교입니다. 고인은 음악에 빠져서가 아니라 교복이 멋있어서 악기까지 사서 마련해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경험이 뒷날 연예계 생활의 발판이 됐습니다.

경향신문 1954.03.05.경향신문 1954.03.05.
1951년 1.4 후퇴 때 가족을 뒤로 하고 홀로 월남한 고인은 3년 8개월간 군 생활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고인의 경력은 1954년부터입니다. 고인은 육군 복무 중이던 1954년 3월 1일, 국방부가 서울 시공관에서 개최한 ‘3.1절 기념 3군 일선 사병 군가 콩쿨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창공악극단 시절(가운데)창공악극단 시절(가운데)
고인은 제대 후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를 하며 본격적으로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고인의 회고에 따르면 유랑극단인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를 했는데, 공연 사이사이 입담을 살려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사 진행 경험을 쌓게 됐다고 합니다.
“군 제대하고 얻은 첫 직장이 ‘창공 악극단’이었어. 처음엔 청소도 하고, 선배들 심부름도 하고(…) 구력이 조금 붙으면 공연과 공연 사이, 바람잡이도 하고 시간 때우는 역할도 하고, 그러다가 노래도 부르게 되고, 나중엔 사회도 보게 되고…한 마디로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거야. 그 때 배운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버티는데 큰 자산이 됐지.”
-<KBS 아침마당> 2021.11.09.

고인은 악극단 시절 쌓은 경력을 인정받아 영화와 방송계에 진출했습니다. 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에서 단역을 맡아 영화배우로, 1964년엔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스무고개>에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TV 희극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활약하며 풍자 코미디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5년 11월부터는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 진행을 맡았습니다. 요즘 교통정보 방송의 원조 격인 이 프로그램은 출근길 교통 통신원을 연결해 실시간 교통상황을, 기상청을 연결해서는 그날 날씨를 전해주며 특히 운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지금도 황금시간대인 이 시간대 라디오는 시사 프로그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당시는 서울의 교통량이 급격히 늘면서 채널마다 교통정보 프로그램이 각축전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고인은 1989년 6월까지 무려 14년간 거의 날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 ’전국노래자랑‘ 34년…환갑 지나 찾아온 전성기

1988년 고인은 인생의 큰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해 5월부터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겁니다. 예순하나, 여느 사람이라면 환갑 진갑 다 지나 사회에서 은퇴한다는 나이였습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이후 숱하게 출현한 국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입니다. 아흔다섯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34년간 고인은 손에서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놓지 않았습니다. 송해가 곧 <전국노래자랑>, <전국노래자랑>이 곧 송해였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이면 어김없이 실로폰 소리에 흥겨운 음악과 함께 시청자들을 찾아간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조연급 연예인 송해 씨는 ’국민 MC‘ 로 거듭났습니다. 출연자와 함께 울고 웃고 노래하며 때로는 몸을 사리지 않은 진행으로 텔레비전 앞의 남녀노소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악극단 가수 출신에 코미디언 활동, 라디오 MC로 잔뼈가 굵었던 고인은 노래, 연기, 진행 3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최장수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국내 최고령 방송인의 자리를 이어갔습니다.

☞관련 영상
방송80년 특집 ‘전국노래자랑 팔도명물총집합’ (https://www.youtube.com/watch?v=DUJegyI3T1w)


■ 평양까지 갔지만…고향 재령 땅 밟지 못해

<전국노래자랑>은 국내 시청자들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일본과 미국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무대를 북한 평양으로까지 넓혔습니다.

황해도 재령 실향민인 고인은 평양에서 노래자랑 진행까지 했지만 정작 고향 재령 땅은 밟지 못했습니다. 이 경험은 고인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고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 황해도 대표로 출연한 고인은 고향을 꼭 가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자신이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을 불렀습니다. 눈물 흘리며 툇마루에서 손 흔들며 이별한 어머니, 이후 만나지 못하고 70년이 흘렀다는 노랫말은 바로 20대에 단신으로 월남하면서 어머니와 헤어진 뒤 평생 만나지 못한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 “제 나이는 마흔여섯”… 아흔 넘어서도 현역 활동
“덧없이 흐르는 세월 한 것 없이 그렇게 갔구나 그래서 미안스러움도 많고 죄송스러운 것도 많아서 이제 (제 나이는) 마흔 여섯입니다 그럽니다. 마흔 여섯이면 4자하고 6자하고 꽉 찼기 때문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니까 거기 그냥 서 있습니다, 그런 얘기죠.”
<KBS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2003.09.08.

아흔이 넘어서도 현역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고인은 남들이 자신의 나이를 물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렇게 답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쯤 더 활동할 거라고 생각하느냐의 질문에 130살까지 버티기로 시청자들과 약속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순 넘어 비로소 최전성기를 맞은 자신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돌려 한 것처럼 보입니다.

송해 씨는 서영춘, 곽규석, 배삼룡, 구봉서 씨 등 쟁쟁했던 코미디언들이 주역으로 활약하던 1960~70년대엔 그들에 가려졌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사이, 평생 2인자에 머물 것 같았던 고인은 특유의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인생 후반부 최고의 방송인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2006년, 자신의 삶을 나팔꽃에 빗댄 노래 '나팔꽃 인생'을 발표했습니다. 그 때 왜 나팔꽃이냐 묻자 답이 이랬습니다. "나팔꽃은 아침에 환하게 피었다 오후에 지고 다음날 다시 밝게 피는, 제 인생과 비슷한 꽃입니다"

[故 송해 추모 게시판 바로가기]
https://program.kbs.co.kr/1tv/enter/jarang/pc/board.html?smenu=f542bd&bbs_loc=T2000-0054-04-755689,list,none,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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