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로 민족의식 고취하던 독립운동가’…몽양컵 유도대회 열린다

입력 2022.06.09 (09:00) 수정 2022.06.0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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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양평군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 개최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 시기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 독립운동가와 사상가, 언론인이자 체육인으로 활동했던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을 기리는 전국 유도 대회가 처음으로 열린다. 경기도 양평군은 내일(10일)부터 15일까지 엿새 동안 '물맑은양평체육관'에서 몽양 선생의 뜻을 기리는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 선생은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대한민국 체육의 근간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 로터리에서 극우파 테리러스트의 습격을 받아 만 6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몽양은 동학운동에 가담한 증조부와 조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1906년 부친이 세상을 뜨고 삼년상을 마치는 날, 집 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놓은 자리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부에서 활약

몽양은 1900년 당시 14살의 나이로 서울로 유학을 떠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체육과의 인연을 맺어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부원으로 활약했다. 1912년 11월 2일엔 와세다 대학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기독교 선교회의 추천을 받아 중국 난징 진링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몽양은 몸무게 80kg의 거구로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이 발달했으며 운동을 좋아하고 즐겼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증언했다.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야구 경기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몽양 여운형(앞줄 맨 오른쪽). 1929년 7월 10일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됐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에 압송돼 재판을 받고 3년형을 받아 복역했다.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야구 경기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몽양 여운형(앞줄 맨 오른쪽). 1929년 7월 10일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됐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에 압송돼 재판을 받고 3년형을 받아 복역했다.

■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

몽양은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과도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3년 형기를 마치고 1933년 출옥한 몽양은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해 상당수 스포츠 관련 인사들을 기자와 주필로 채용하고 국내 일간지 가운데 최초로 스포츠면을 따로 만들었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손기정은 '굳이 일본 대표로 올림픽을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몽양 선생에게 털어놓았다. 몽양은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했고.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몽양의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한 기사에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실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이 사태로 조선중앙일보는 일제 경무국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은 뒤 복간되지 못한 채 결국 1937년 11월 5일 폐간했다.
손기정 우승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운  1936년 8월 13일 자 두 신문.  왼쪽 조선중앙일보는 서울판, 오른쪽 동아일보는 지방판으로, 지방판이 하루 전날 인쇄하던 당시 상황으로 미뤄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동아일보가 앞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손기정 우승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운 1936년 8월 13일 자 두 신문. 왼쪽 조선중앙일보는 서울판, 오른쪽 동아일보는 지방판으로, 지방판이 하루 전날 인쇄하던 당시 상황으로 미뤄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동아일보가 앞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경성축구단 설립·덴마크식 체조 보급… '조선 체육의 아버지'

여러 종목에 걸쳐 운동 경기에 능했던 터라 다양한 종목에서 심판을 보기도 했던 몽양은 YMCA 야구단 활동뿐 아니라 축구에도 애정이 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축구단'이 재정 문제로 해체 위기에 직면하자 직접 나서 축구단 설립을 주도했고 경성 축구단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몽양은 스포츠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년들과 포환 던지기를 해서 1등을 했다는 얘기라든가, 물놀이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할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는 것, 여러 직함을 겸하고 있던 40대 후반에 체면을 벗어던지고 웃옷을 벗은 채 '현대 철봉 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로 철봉 운동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것 등이다. 또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던 것도 몽양이다.

몽양이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스포츠 보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스포츠가 대중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 차장 등 몽양은 수많은 직함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초대 대한체육장을 역임하며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유는 스포츠를 사랑한 몽양의 사상 때문이다.
제 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를 개최하는 양평군이 제작한 홍보영상 (제공:양평군청)

■ "몽양 선생은 유도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1947년 7월 19일 혜화 로터리에서 극우파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할 때, 몽양의 옆을 지켰던 비서 중 한 명은 유도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고 이제황 선생이다. 이제황 선생의 제자로 대한유도회장을 거쳐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김정행 전 회장은 "몽양 선생은 유도인과 많은 교류를 하며 유도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는 것을 이제황 선생이 종종 회고했다"고 말한다.

암살당한 몽양의 장례식은 1947년 8월 3일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약 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몰렸다.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돼 서울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몽양의 운구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 선수 김성집 등이 맡았다.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 개막을 앞둔 양평군청은 "몽양 선생을 기리는 스포츠 대회는 처음이고 대회 개최에 맞춰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박물관을 단장해 운영하고 있다"면서 대회 기간 유도인들이 기량을 관람하고 스포츠를 사랑했던 몽양의 정신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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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로 민족의식 고취하던 독립운동가’…몽양컵 유도대회 열린다
    • 입력 2022-06-09 09:00:30
    • 수정2022-06-09 16:07:45
    스포츠K

■ 경기도 양평군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 개최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 시기를 거쳐 광복 이후까지 독립운동가와 사상가, 언론인이자 체육인으로 활동했던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을 기리는 전국 유도 대회가 처음으로 열린다. 경기도 양평군은 내일(10일)부터 15일까지 엿새 동안 '물맑은양평체육관'에서 몽양 선생의 뜻을 기리는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 선생은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하고 대한민국 체육의 근간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 로터리에서 극우파 테리러스트의 습격을 받아 만 6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몽양은 동학운동에 가담한 증조부와 조부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1906년 부친이 세상을 뜨고 삼년상을 마치는 날, 집 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놓은 자리에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부에서 활약

몽양은 1900년 당시 14살의 나이로 서울로 유학을 떠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체육과의 인연을 맺어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부원으로 활약했다. 1912년 11월 2일엔 와세다 대학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기독교 선교회의 추천을 받아 중국 난징 진링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몽양은 몸무게 80kg의 거구로 기골이 장대하고 근육이 발달했으며 운동을 좋아하고 즐겼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증언했다.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야구 경기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몽양 여운형(앞줄 맨 오른쪽). 1929년 7월 10일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됐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에 압송돼 재판을 받고 3년형을 받아 복역했다.
■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

몽양은 '조선의 마라토너 손기정' 그리고 '일장기 말소 사건'과도 빼놓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3년 형기를 마치고 1933년 출옥한 몽양은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해 상당수 스포츠 관련 인사들을 기자와 주필로 채용하고 국내 일간지 가운데 최초로 스포츠면을 따로 만들었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손기정은 '굳이 일본 대표로 올림픽을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몽양 선생에게 털어놓았다. 몽양은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출전을 권했고.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몽양의 조선중앙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손기정의 우승을 보도한 기사에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실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이다. 이 사태로 조선중앙일보는 일제 경무국의 무기 정간 처분을 받은 뒤 복간되지 못한 채 결국 1937년 11월 5일 폐간했다.
손기정 우승을 보도하면서 일장기를 지운  1936년 8월 13일 자 두 신문.  왼쪽 조선중앙일보는 서울판, 오른쪽 동아일보는 지방판으로, 지방판이 하루 전날 인쇄하던 당시 상황으로 미뤄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동아일보가 앞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경성축구단 설립·덴마크식 체조 보급… '조선 체육의 아버지'

여러 종목에 걸쳐 운동 경기에 능했던 터라 다양한 종목에서 심판을 보기도 했던 몽양은 YMCA 야구단 활동뿐 아니라 축구에도 애정이 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축구단'이 재정 문제로 해체 위기에 직면하자 직접 나서 축구단 설립을 주도했고 경성 축구단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몽양은 스포츠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년들과 포환 던지기를 해서 1등을 했다는 얘기라든가, 물놀이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할 정도로 수영을 잘했다는 것, 여러 직함을 겸하고 있던 40대 후반에 체면을 벗어던지고 웃옷을 벗은 채 '현대 철봉 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로 철봉 운동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것 등이다. 또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던 것도 몽양이다.

몽양이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스포츠 보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스포츠가 대중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몽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부 차장 등 몽양은 수많은 직함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초대 대한체육장을 역임하며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유는 스포츠를 사랑한 몽양의 사상 때문이다.
제 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를 개최하는 양평군이 제작한 홍보영상 (제공:양평군청)

■ "몽양 선생은 유도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

1947년 7월 19일 혜화 로터리에서 극우파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할 때, 몽양의 옆을 지켰던 비서 중 한 명은 유도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고 이제황 선생이다. 이제황 선생의 제자로 대한유도회장을 거쳐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한 김정행 전 회장은 "몽양 선생은 유도인과 많은 교류를 하며 유도에 대한 사랑도 각별했다는 것을 이제황 선생이 종종 회고했다"고 말한다.

암살당한 몽양의 장례식은 1947년 8월 3일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약 60만 명의 추모 인파가 몰렸다.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돼 서울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몽양의 운구는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 선수 김성집 등이 맡았다.

'제1회 양평 몽양컵 전국유도 대회' 개막을 앞둔 양평군청은 "몽양 선생을 기리는 스포츠 대회는 처음이고 대회 개최에 맞춰 여운형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 박물관을 단장해 운영하고 있다"면서 대회 기간 유도인들이 기량을 관람하고 스포츠를 사랑했던 몽양의 정신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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