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책] 나의 분신을 만난다면…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

입력 2022.06.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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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납니다.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할 그를 위해 무슨 얘기를 먼저 해줄 것 같습니까?

반대로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석 달 앞으로 흘러 버리고, 내 앞에 석 달 후의 내가 나타납니다. 나보다 석 달을 더 산 또 다른 나에게 지난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먼저 물어볼 것 같습니까?

소설 '아노말리'는 이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세상이 배경입니다. 줄거리만 보면 판타지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설 속 사건의 발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파리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뉴욕으로 향하다가 비행기를 삼킬 듯한 난기류를 만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착륙합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고, 석 달 전에 존재했던 파리발 뉴욕행 여객기가 갑자기 다시 영공에 나타납니다. 확인해 보니 여객기 안에는 이미 석 달 전에 공항에 내렸던 똑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마치 '복사 후 붙여넣기'처럼, 석 달 전 여객기와 모든 게 똑같은 여객기가 하나 더 생겨난 것이죠. 소설 속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아노말리'는 2020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영국의 부커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힙니다. 상금은 10유로, 한화로 15,000원이 채 안 되지만, 공쿠르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예와 권위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단 한 작품만 받을 수 있는 상인데, 여객기가 공항에 착륙하고 석 달 뒤 똑같은 여객기가 다시 착륙한다는, 마술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받은 겁니다.

아노말리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_2022.06.02.(사진제공: 민음사)아노말리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_2022.06.02.(사진제공: 민음사)

소설 아노말리를 쓴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는 지난 2일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작가는 이 자리에서 '처음에는 나 자신을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책을 구상했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를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더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작가의 호기심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외모도 같고, 성격도 같고, 석 달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기억도 같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 긴장감 넘치는 일일 수도 있고, 흥분되는 일일 수도 있고, 두려움을 느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는 소설 아노말리에서 8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통해 나의 분신을 만나게 됐을 때의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줍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보면 청부살인업자도 있고, 작가도 있고, 가수도 있고, 변호사도 있습니다. 저마다 직업이 다릅니다. 젊은이도 있고, 중년, 장년도 있는 등 나이대도 제각각입니다. 당연히 다들 고민도 다릅니다. 이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됐을 때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상상해보고,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은 문학성을 갖추면서도 대중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면서, 이번 책은 특히나 조금 더 대중적인 책이 되기를 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설이 재미있을 겁니다.'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으로 보였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그러면서도 소설 아노말리가 어떤 동화나 우화 같은 성격으로 여겨지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더 다양한 해석이 뒤따르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작가의 희망대로 동화나 우화는 아니겠지만 일단 프랑스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선택을 받은 작품이 됐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공쿠르상 수상 작품이 30~40만 부 정도 판매되는데, 아노말리는 그 세 배 정도 판매됐다'고 밝혔습니다.

대중적인 만큼 소설에는 유머나 풍자, 해학을 담고 있는 장면들도 잇따라 나옵니다. 어떤 때는 탐정소설 같은 느낌을 풍기다가, 어떤 때는 과학소설 같기도 합니다. 작가는 베스트셀러가 지닌 코드들을 적용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더 많은 독자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여러 '장치'들을 넣었다는 얘기입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사진제공: 민음사)에르베 르 텔리에(사진제공: 민음사)

오마주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연일까요.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을 꼽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톨스토이 소설을 옮겨놓은 것 같은 표현도 등장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민음사), 이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도 나옵니다.

'순탄한 비행은 모두 비슷하다. 반면 난비행은 각기 나름대로 힘들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사람이라면, 문학사에 남을 그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예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인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입니다. 기준이나 표준을 뜻하는 '노멀'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제목부터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공쿠르상을 받고 백만 부 이상 팔리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이제 한국 서점에도 깔려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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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말& 책] 나의 분신을 만난다면…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
    • 입력 2022-06-11 07:00:21
    취재K

석 달 전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납니다.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할 그를 위해 무슨 얘기를 먼저 해줄 것 같습니까?

반대로 어느 날 갑자기 시간이 석 달 앞으로 흘러 버리고, 내 앞에 석 달 후의 내가 나타납니다. 나보다 석 달을 더 산 또 다른 나에게 지난 석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먼저 물어볼 것 같습니까?

소설 '아노말리'는 이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물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세상이 배경입니다. 줄거리만 보면 판타지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설 속 사건의 발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파리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뉴욕으로 향하다가 비행기를 삼킬 듯한 난기류를 만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착륙합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고, 석 달 전에 존재했던 파리발 뉴욕행 여객기가 갑자기 다시 영공에 나타납니다. 확인해 보니 여객기 안에는 이미 석 달 전에 공항에 내렸던 똑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마치 '복사 후 붙여넣기'처럼, 석 달 전 여객기와 모든 게 똑같은 여객기가 하나 더 생겨난 것이죠. 소설 속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아노말리'는 2020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입니다. 공쿠르상은 노벨문학상, 영국의 부커상과 함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꼽힙니다. 상금은 10유로, 한화로 15,000원이 채 안 되지만, 공쿠르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명예와 권위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단 한 작품만 받을 수 있는 상인데, 여객기가 공항에 착륙하고 석 달 뒤 똑같은 여객기가 다시 착륙한다는, 마술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받은 겁니다.

아노말리 출간 기념 기자 간담회_2022.06.02.(사진제공: 민음사)
소설 아노말리를 쓴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는 지난 2일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작가는 이 자리에서 '처음에는 나 자신을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책을 구상했다'고 밝혔습니다.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나와 똑같은 또 다른 나를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더 나아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작가의 호기심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외모도 같고, 성격도 같고, 석 달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기억도 같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 긴장감 넘치는 일일 수도 있고, 흥분되는 일일 수도 있고, 두려움을 느끼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는 소설 아노말리에서 8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통해 나의 분신을 만나게 됐을 때의 저마다의 생각과 행동을 보여줍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을 보면 청부살인업자도 있고, 작가도 있고, 가수도 있고, 변호사도 있습니다. 저마다 직업이 다릅니다. 젊은이도 있고, 중년, 장년도 있는 등 나이대도 제각각입니다. 당연히 다들 고민도 다릅니다. 이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됐을 때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를 상상해보고,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은 문학성을 갖추면서도 대중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면서, 이번 책은 특히나 조금 더 대중적인 책이 되기를 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소설이 재미있을 겁니다.'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으로 보였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그러면서도 소설 아노말리가 어떤 동화나 우화 같은 성격으로 여겨지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더 다양한 해석이 뒤따르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작가의 희망대로 동화나 우화는 아니겠지만 일단 프랑스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선택을 받은 작품이 됐습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 공쿠르상 수상 작품이 30~40만 부 정도 판매되는데, 아노말리는 그 세 배 정도 판매됐다'고 밝혔습니다.

대중적인 만큼 소설에는 유머나 풍자, 해학을 담고 있는 장면들도 잇따라 나옵니다. 어떤 때는 탐정소설 같은 느낌을 풍기다가, 어떤 때는 과학소설 같기도 합니다. 작가는 베스트셀러가 지닌 코드들을 적용했다고도 설명했습니다. 더 많은 독자가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도록 여러 '장치'들을 넣었다는 얘기입니다.

에르베 르 텔리에(사진제공: 민음사)
오마주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연일까요.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을 꼽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톨스토이 소설을 옮겨놓은 것 같은 표현도 등장합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민음사), 이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도 나옵니다.

'순탄한 비행은 모두 비슷하다. 반면 난비행은 각기 나름대로 힘들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사람이라면, 문학사에 남을 그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거,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예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책 제목인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입니다. 기준이나 표준을 뜻하는 '노멀'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제목부터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공쿠르상을 받고 백만 부 이상 팔리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은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이제 한국 서점에도 깔려 한국 독자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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