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 김진숙 아닌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러주세요

입력 2022.06.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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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연대해준 시민들의 힘 때문에 복직 희망 잃지 않아
- 노동자들의 연대가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안타까워
-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데 사회가 관심과 힘을 쏟아야!
-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정부가 노동계를 바라봤으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37년. 한 해고 노동자가 그냥 평범한 노동자로 불리기까지 걸린 세월이다. 보통 한 사람이 직장에 들어가서 정년퇴직을 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김진숙은 해고자 신분으로 살아왔다. 초로(初老)에 이른 지금, 그의 몸에는 암이 발병해 몇 년째 투병 중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이제 김진숙 이름 앞에 '해고노동자'라는 타이틀은 붙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러 달라는 그를 최근 부산에서 만났다. 한진중공업에 복직한 지 석 달여가 됐다. 그는 1986년 노조 대인원이 된 뒤 유인물을 돌렸다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해고됐고 37년 만인 2020년 2월 25일 복직과 동시에 퇴직했다.

그에게 한평생 노동계의 투쟁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 복직 투쟁을 멈추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최근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언론의 비판적 시선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갈수록 깊어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물어봤다.

Q. 해고된 지 37년 만에 복직하고 이제 넉 달째가 돼 갑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병원에 다니는 시간이 제일 많고요. 그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단식 투쟁 현장에서 1인 시위도 했고 파리바게뜨 노조 지회장 단식이 길어지면서 서울도 다녀오고 일상이 거의 비슷해요."

Q. 해고자 신분이었을 때랑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거네요?
"해고자 생활이 워낙 길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복직을 해서 일을 했으면 문제가 달라지는데 정년도 지난 복직이었고, 그리고 제 건강상태나 이런 것들이 용접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이 안 되고요, 그날 복직했다가 그날 퇴직한 상태라 크게 일신상의 달라진 점은 없어요. 다만 기분이 엄청 좋고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Q. 37년간 해고자 신분이었죠. 특히 지난해부터 복직을 위해 더 노력하셨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제가 해고될 때 검은 보자기에 덮어 씌워져 끌려갔던 곳이 대공분실이었어요. 거기서 엎어놓고 맞았거든요. 근데 저는 제 몸에 흉터가 아직까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제 등을 제가 볼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몇 년 전에 암이 발병하고 몸도 너무 안 좋고. 우울증도 심해서 필라테스를 하면 좀 심신이 좋아지지 않겠나 생각하고 필라테스를 하러 갔죠. 거기서 '비포 애프터' 사진을 찍었는데 강사가 그 날 저녁에 사진을 저한테 보냈더라고요. "진숙 회원님 이게 무슨 흉터에요?"라고 물었는데 보니까 등에 뱀 지나간 자리 같은 게 있더라고요. 터진 상처들이…그게 삼십 년이 넘도록 몸에 남아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 흉터들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몸과 마음에는 그때 당시 당했던 일들이 그대로 다 남아있는데 이걸 그대로 덮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또 제가 암이 발병하고 이런 상태가 돼 보니까 암 병동에 입원해서도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복직하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죽고 나서 내가 뭘 가장 많이 아쉬워할까 생각하니 복직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크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복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복직을 통해서 뭐 다른 어떤 것을 꿈꿨다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 나오는 거, 쫓겨 나오고 잡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걸 이룬 거죠."

Q. 그동안 복직투쟁을 많이 하면서 당한 경험이 많으시잖아요?
"그동안에는 회사 앞에서 복직하겠다고 출근투쟁을 하거나, 하다 못해 뛰어 들어가면 잡혀 나오거나 끌려 나온 적도 있었고, 무수한 폭력이 뒤따랐었거든요. 출근하겠다고 하면 그건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경비 아저씨, 경찰들, 어용노조 간부들, 회사 관리자들 동원해서 수백 명이 저 하나를 막았죠. 폭력이었죠. 그때는 폭력이 다 용인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회사 안에 한 발 들여놓는 게 불가능했었죠. 그래서 제 발로 들어가서 걸어 나오는 일이 한 사람의 소원이 될 만큼 간절한 일이었죠. 그런데 2월 24일 복직 행사를 하는 날 저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안 막히고, 안 두들겨 맞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더라고요."


2022년 2월 25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해고 37년 만에 명예복직을 했다.2022년 2월 25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해고 37년 만에 명예복직을 했다.

Q. 복직 후 출근한 날 처음 하신 일이 뭔가요?
"한진중공업에서 돌아가셨던 열사들, 동지들이 일했던 공간들을 돌아본 거로도 저는 그냥 37년의 한이 씻기는 느낌이었습니다."

Q. 혹시 아쉬움 같은 건 남는 게 있으신가요?
"아쉬움이 크죠. 현장에 들어가 보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 전에 제가 일했을 때만 하더라도 현장이 몇천 명 일할 때니까 사람이 '와글와글' 했어요. 여기저기 공장마다 정말 활기가 넘치는 현장이었죠. 이유는 한진중공업 시절에 수주를 전혀 안 받았던 거예요. 수주를 전혀 안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 시끄러웠던 망치 소라들, 용접 불꽃들, 그라인더 불꽃. 이런 것들이 안 보였죠. 노동자들이 느꼈을 어떤 생존의 위협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그 많던 하도급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어요. 그나마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얇기는 하더라도 보호망이 있지만, 하도급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도 없는 상태에서 생존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Q. 복직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심진호 집행부가 가장 큰 도움을 줬죠.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할 때 희망 버스를 타고 와서 연대해 줬던 수많은 시민이 있어요.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도 없는 수많은 연대 시민의 힘이 있죠. 서울 청와대 앞에서 단식할 때도 매일 와서 글쓰기 강좌를 열었던 분들도 계시고, 노래하신 분도 계시고. 그림을 그렸던 분들도 계시고, 청와대까지 ‘희망 뚜벅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시민이 오셨어요. 그런 힘들이 결국은 37년 만에 복직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낸 거로 생각해요."

Q. 5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김진숙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동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노동계의 공통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였는데요. 사실 문재인 정부 말에 복직되셨어요. 아쉬움은 없으세요?
"해고됐을 때부터 지금의 시점까지 정부의 어떤 힘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정부는 오히려 핍박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죠. 늘 수배, 구속, 대공 분실 이런 것에서만 정부의 힘을 느껴왔던 사람이라 제 삶이 변화하는데 정부가 어떤 개입을 할 거라는 희망조차도 없었어요."

Q. 그동안 유혹은 없으셨어요?
"사측에서는 돈으로 유혹을 여러 차례 했었죠. 그런데 다 거절했죠. '다른 거 필요 없고 그냥 내 발로 걸어 나온다'는 걸 옛날부터 얘기했었어요. 사측에서도 2008년 이후에는 돈 얘기는 더는 안 하더라고요. 저도 인간이니까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사람한테 실망할 때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때마다 또 사람을 보고 희망을 얻기도 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죠."


김진숙은 2011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복직을 주장하면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6일간 고공농성을 했다.김진숙은 2011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복직을 주장하면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6일간 고공농성을 했다.

Q. 사람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 2011년도 크레인 농성하실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제 인생은 2011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기점이 됐던 게 저는 희망 버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분이 연대를 오시고 응원을 해주실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크레인은 이미 2003년에 동료가 목을 맸던 크레인이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도 신변 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죠. 그래서 살아서 내려온다는 희망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1차 희망 버스가 오면서 어쩌면 살아서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에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을 했었죠."

Q. 연대의 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은 노동자들의 연대도 보기 힘든 것 같고, 특히 노동계나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잖아요?
"저는 민주노총이라는 어떤 틀에 갇힌 프레임을 만들어 낸 건 언론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다 철밥통이다'같은 프레임이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 민주당 정부를 거치면서 더 강화됐던 것들도 있고요. 물론 민주노총이 비판받아야 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죠. 예를 들면 도로공사라든지 건강보험공단 노조라든지 이런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생각하고 도와주지를 않았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데 그걸 사측의 입장에 서서 오히려 그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들을 정규직들이 해왔었던 게 많죠. 그런 것들은 정말 역사적으로 상당히 비판받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 지금은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돼도 현장 조합원들은 거의 몰라요. 그게 자기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죠. 저는 예전처럼 노동자들의 기개와 정신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비정규직들이 늘어나지도 않았을 거로 생각해요. 지금처럼 노동 현장 내 차별이 만연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때 당시 노동자들은 그런 차별들을 용인하지 않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같은 노동자들 내에서도 연대를 외쳐야 하고, 연대가 아예 이제 사라져버리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안타까워요."

Q. 노동자들의 연대 정신이 사라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우선은 탄압이 너무 심했죠. 그러니까 법을 통해서 ‘업무방해’든지 ‘3자 개입 금지법’ 이런 것을 통해서 구속한다든지 벌금을 매긴다든지 이런 것들이 우선은 제일 컸죠.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장이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거예요. 그러니까 정규직들이 자신들의 삶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현장에 비정규직들을 보니까 '야, 이거 내가 잘리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걸 현장에서 너무 여실하게 보게 되는 거예요. 방송국 같은 경우도 사실 젊은 분들은 다 비정규직이잖아요. 이런 부당함이 존재하는데 내가 싸우거나 투쟁하면 '저런 비정규직 삶으로 살 수밖에 없다'라는 걸 노동자들이 느끼게 되니까 몸을 사리게 되는 거죠. 또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켜야 할 게 많아지는 것도 있죠. 아이들은 커가고 집도 있어야 하고, 차 할부금도 갚아야 하고, 아이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학교도 보내야 하고 살면서 발목을 잡는 일들이 많아진 거예요. 어쨌든 그걸 기득권으로 표현하는 분들이 있지만 저는 생존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기 삶에서 지켜야 하는 문제들이 커진 거죠."

Q.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 같네요?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적이 사라진 거예요. 옛날에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대상이 명확했거든요. 군부독재, 악덕 재벌, 자본 이런 대상이 명확했는데, 이제는 정규직들의 적은 비정규직이 돼버리고 비정규직들의 적은 정규직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업장 내에서 정규직 노조가 투쟁하면 비정규직들은 작업해요. 그럼 파업의 힘이 하나도 없어지잖아요. 그럼 정규직 노조가 봤을 때는 저 사람들(비정규직) 때문에 우리가 파업에 힘을 못 가진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비정규직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왜 우리를 원망해, 너희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생각을 하게 돼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노동자들 간의 골들이 굉장히 깊어진 것 같아요."

Q. 세대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정규직으로 진입하기 힘든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기성세대 정규직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세대 간의 갈등 측면에서 볼 수도 있는 거겠죠.
"그럴 수 있죠. 며칠 전 SNS에서 보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사회 문제나 민주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586'들은 그렇게 해왔는데…' 이런 글이 올라오니까, 어떤 젊은 친구가 '당신들은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우리는 불완전노동을 한다' 이렇게 반박한 것을 보고 굉장히 서글펐었어요. 제 조카들도 거의 다 비정규직들인데 현장에 가보면 젊은 사람들은 거의 비정규직 이외에는 일자리가 없죠. 그리고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게 너무 힘든 세상에 되어버렸죠. 예를 들어서 ‘인천공항공사’나 ‘지하철공사’ 같은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 투쟁을 하면, 정부에서도 정규직화 필요성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너희들도 시험 쳐서 들어와라. 왜 공짜로 먹으려고 그러느냐'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정규직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를 어떻게 들어왔는데' 그런 감정이 있는 거예요. '나는 몇 년을 공부하고, 그 젊은 시절 중요한 시간을 여기 입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해왔는데, 너희들은 왜 그런 노력 안 하고 투쟁을 통해서 들어오려고 그러느냐'라는 논리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일에 대해서 이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쏟아야 하는데 젊은 세대들을 경쟁하게 하고,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갈등하게 만들어버리는 이건 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해요."

Q.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세요?
"제가 사실은 카드를 안 썼어요. 카드를 안 쓰다가 이제 최근에 카드를 어쩔 수 없이 만들었어요. 이유가 카드를 안 내면 아예 결재 자체가 안 되는 곳이 너무 많은 거예요. 어디 가서 빵이나 음료수를 하나 사 먹더라도 무인판매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익숙하지 않으니까 젊은 사람들 눈치 보이게 되고. 근데 그렇게 해서 일자리가 없어진 것이 필요가 없어져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를 핑계를 대긴 했죠. 우리 사회가 그런 위기들을 많이 겪었죠, IMF 나 메르스 때도 그렇고, 코로나를 거치면서 양질의 일자리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기계가 대체하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산업 구조가 변화된 측면들도 있지만, 사회 전체가 노동력의 가격을 너무 싸게 만들어버려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 기계로 대체해 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진 것이라고 봐요. 저는 선진국이라는 개념이 아주 많이 기계화되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것이 선진국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위해서 굉장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한 계층을 무능한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고 소외시키는 산업화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Q.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는데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 하셨던 말씀들이 굉장히 우려스러웠던 점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152시간 노동이라든지, 취임하고 나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다섯 차례를 만났다든지. 그리고 민주노총이나 이런 노동계 인사들을 만나는 건 없이 재벌 총수들만 만난다든지, 그들의 얘기를 듣고 핫라인을 개설한다고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저는 굉장히 우려스럽죠. 노동자, 민주노총 내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찍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노동계에서는 굉장히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죠. 저는 좀 균형 잡힌 시각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검찰에서 이제 오랫동안 생활하신 분이라 민주노총을 범죄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냥 불법의 틀을 씌워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죠. 그게 아니라 민주노총이 주장하고 역점을 두고 있는 일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바라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게 이 사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 일들 인지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누구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면 공정한 시선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Q.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2030 젊은 세대들이 많이 지지했는데요. 어떻게 보세요?
"이번에 윤석열 정부를 만들어 낸 것도 이른바 이대남이다 이런 얘기들도 있지만, 저는 그것도 불만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제 민주당 정권이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실업 문제들을 해결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안 되면서 반사이익을 국민의힘이 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그것이 ‘영원불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생존 문제를 계속 찾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 정권이 제대로 못 하면 그 힘은 다른 데로 모일 것으로 생각해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 김진숙 이름 앞에서 무슨 수식어가 붙어서 불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냥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제 삶에서 저를 규정했던 것이 해고자였거든요. '해고자 김진숙' 그것은 족쇄 같은 거였죠. 언젠가는 복직을 해야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해고자 딱지는 사라졌으니 평생을 노동 운동했던 사람으로서 노동자로 삶을 마감하는 게 제 생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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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고 노동자 김진숙 아닌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러주세요
    • 입력 2022-06-11 09:00:22
    취재K
<strong>- 연대해준 시민들의 힘 때문에 복직 희망 잃지 않아<br /></strong><strong>- 노동자들의 연대가 사라져버리는 것들이 안타까워<br /></strong><strong>-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데 사회가 관심과 힘을 쏟아야!<br /></strong><strong>- 균형 잡힌 시각에서 정부가 노동계를 바라봤으면</strong><br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37년. 한 해고 노동자가 그냥 평범한 노동자로 불리기까지 걸린 세월이다. 보통 한 사람이 직장에 들어가서 정년퇴직을 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보다 훨씬 긴 세월이 흐를 때까지 김진숙은 해고자 신분으로 살아왔다. 초로(初老)에 이른 지금, 그의 몸에는 암이 발병해 몇 년째 투병 중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이제 김진숙 이름 앞에 '해고노동자'라는 타이틀은 붙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러 달라는 그를 최근 부산에서 만났다. 한진중공업에 복직한 지 석 달여가 됐다. 그는 1986년 노조 대인원이 된 뒤 유인물을 돌렸다가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해고됐고 37년 만인 2020년 2월 25일 복직과 동시에 퇴직했다.

그에게 한평생 노동계의 투쟁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 복직 투쟁을 멈추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최근 노동계, 특히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언론의 비판적 시선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갈수록 깊어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을 물어봤다.

Q. 해고된 지 37년 만에 복직하고 이제 넉 달째가 돼 갑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병원에 다니는 시간이 제일 많고요. 그리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단식 투쟁 현장에서 1인 시위도 했고 파리바게뜨 노조 지회장 단식이 길어지면서 서울도 다녀오고 일상이 거의 비슷해요."

Q. 해고자 신분이었을 때랑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거네요?
"해고자 생활이 워낙 길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복직을 해서 일을 했으면 문제가 달라지는데 정년도 지난 복직이었고, 그리고 제 건강상태나 이런 것들이 용접 일을 할 만큼의 체력이 안 되고요, 그날 복직했다가 그날 퇴직한 상태라 크게 일신상의 달라진 점은 없어요. 다만 기분이 엄청 좋고 아침에 눈을 뜨면 스트레스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Q. 37년간 해고자 신분이었죠. 특히 지난해부터 복직을 위해 더 노력하셨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제가 해고될 때 검은 보자기에 덮어 씌워져 끌려갔던 곳이 대공분실이었어요. 거기서 엎어놓고 맞았거든요. 근데 저는 제 몸에 흉터가 아직까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제 등을 제가 볼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몇 년 전에 암이 발병하고 몸도 너무 안 좋고. 우울증도 심해서 필라테스를 하면 좀 심신이 좋아지지 않겠나 생각하고 필라테스를 하러 갔죠. 거기서 '비포 애프터' 사진을 찍었는데 강사가 그 날 저녁에 사진을 저한테 보냈더라고요. "진숙 회원님 이게 무슨 흉터에요?"라고 물었는데 보니까 등에 뱀 지나간 자리 같은 게 있더라고요. 터진 상처들이…그게 삼십 년이 넘도록 몸에 남아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 흉터들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 몸과 마음에는 그때 당시 당했던 일들이 그대로 다 남아있는데 이걸 그대로 덮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또 제가 암이 발병하고 이런 상태가 돼 보니까 암 병동에 입원해서도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복직하지 못하면 그때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죽고 나서 내가 뭘 가장 많이 아쉬워할까 생각하니 복직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크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복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복직을 통해서 뭐 다른 어떤 것을 꿈꿨다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 나오는 거, 쫓겨 나오고 잡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걸 이룬 거죠."

Q. 그동안 복직투쟁을 많이 하면서 당한 경험이 많으시잖아요?
"그동안에는 회사 앞에서 복직하겠다고 출근투쟁을 하거나, 하다 못해 뛰어 들어가면 잡혀 나오거나 끌려 나온 적도 있었고, 무수한 폭력이 뒤따랐었거든요. 출근하겠다고 하면 그건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경비 아저씨, 경찰들, 어용노조 간부들, 회사 관리자들 동원해서 수백 명이 저 하나를 막았죠. 폭력이었죠. 그때는 폭력이 다 용인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회사 안에 한 발 들여놓는 게 불가능했었죠. 그래서 제 발로 들어가서 걸어 나오는 일이 한 사람의 소원이 될 만큼 간절한 일이었죠. 그런데 2월 24일 복직 행사를 하는 날 저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안 막히고, 안 두들겨 맞고 내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더라고요."


2022년 2월 25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해고 37년 만에 명예복직을 했다.
Q. 복직 후 출근한 날 처음 하신 일이 뭔가요?
"한진중공업에서 돌아가셨던 열사들, 동지들이 일했던 공간들을 돌아본 거로도 저는 그냥 37년의 한이 씻기는 느낌이었습니다."

Q. 혹시 아쉬움 같은 건 남는 게 있으신가요?
"아쉬움이 크죠. 현장에 들어가 보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 전에 제가 일했을 때만 하더라도 현장이 몇천 명 일할 때니까 사람이 '와글와글' 했어요. 여기저기 공장마다 정말 활기가 넘치는 현장이었죠. 이유는 한진중공업 시절에 수주를 전혀 안 받았던 거예요. 수주를 전혀 안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 시끄러웠던 망치 소라들, 용접 불꽃들, 그라인더 불꽃. 이런 것들이 안 보였죠. 노동자들이 느꼈을 어떤 생존의 위협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그 많던 하도급 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하니 한탄이 저절로 나왔어요. 그나마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얇기는 하더라도 보호망이 있지만, 하도급 노동자들은 노동조합도 없는 상태에서 생존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Q. 복직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심진호 집행부가 가장 큰 도움을 줬죠.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할 때 희망 버스를 타고 와서 연대해 줬던 수많은 시민이 있어요.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도 없는 수많은 연대 시민의 힘이 있죠. 서울 청와대 앞에서 단식할 때도 매일 와서 글쓰기 강좌를 열었던 분들도 계시고, 노래하신 분도 계시고. 그림을 그렸던 분들도 계시고, 청와대까지 ‘희망 뚜벅이’를 할 때도 정말 많은 시민이 오셨어요. 그런 힘들이 결국은 37년 만에 복직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낸 거로 생각해요."

Q. 5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김진숙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동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노동계의 공통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였는데요. 사실 문재인 정부 말에 복직되셨어요. 아쉬움은 없으세요?
"해고됐을 때부터 지금의 시점까지 정부의 어떤 힘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정부는 오히려 핍박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죠. 늘 수배, 구속, 대공 분실 이런 것에서만 정부의 힘을 느껴왔던 사람이라 제 삶이 변화하는데 정부가 어떤 개입을 할 거라는 희망조차도 없었어요."

Q. 그동안 유혹은 없으셨어요?
"사측에서는 돈으로 유혹을 여러 차례 했었죠. 그런데 다 거절했죠. '다른 거 필요 없고 그냥 내 발로 걸어 나온다'는 걸 옛날부터 얘기했었어요. 사측에서도 2008년 이후에는 돈 얘기는 더는 안 하더라고요. 저도 인간이니까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사람한테 실망할 때도 많았고요. 그런데 그때마다 또 사람을 보고 희망을 얻기도 하면서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죠."


김진숙은 2011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복직을 주장하면서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306일간 고공농성을 했다.
Q. 사람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 2011년도 크레인 농성하실 때를 말씀하시는 거죠?
"제 인생은 2011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기점이 됐던 게 저는 희망 버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분이 연대를 오시고 응원을 해주실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크레인은 이미 2003년에 동료가 목을 맸던 크레인이고, 제가 크레인에 올라갈 때도 신변 정리를 다 하고 올라갔었죠. 그래서 살아서 내려온다는 희망 자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1차 희망 버스가 오면서 어쩌면 살아서 내려갈 수도 있겠다는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이후에 노동자들의 연대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절감을 했었죠."

Q. 연대의 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은 노동자들의 연대도 보기 힘든 것 같고, 특히 노동계나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잖아요?
"저는 민주노총이라는 어떤 틀에 갇힌 프레임을 만들어 낸 건 언론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다 철밥통이다'같은 프레임이 역설적으로 문재인 정부, 민주당 정부를 거치면서 더 강화됐던 것들도 있고요. 물론 민주노총이 비판받아야 하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죠. 예를 들면 도로공사라든지 건강보험공단 노조라든지 이런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로 생각하고 도와주지를 않았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는데 그걸 사측의 입장에 서서 오히려 그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역할들을 정규직들이 해왔었던 게 많죠. 그런 것들은 정말 역사적으로 상당히 비판받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또 지금은 민주노총 위원장이 구속돼도 현장 조합원들은 거의 몰라요. 그게 자기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죠. 저는 예전처럼 노동자들의 기개와 정신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비정규직들이 늘어나지도 않았을 거로 생각해요. 지금처럼 노동 현장 내 차별이 만연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때 당시 노동자들은 그런 차별들을 용인하지 않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같은 노동자들 내에서도 연대를 외쳐야 하고, 연대가 아예 이제 사라져버리는 이런 것들이 굉장히 안타까워요."

Q. 노동자들의 연대 정신이 사라지는 이유는 뭐라고 보세요?
"우선은 탄압이 너무 심했죠. 그러니까 법을 통해서 ‘업무방해’든지 ‘3자 개입 금지법’ 이런 것을 통해서 구속한다든지 벌금을 매긴다든지 이런 것들이 우선은 제일 컸죠. 그리고 두 번째는 현장이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갈라진 거예요. 그러니까 정규직들이 자신들의 삶에 만족해서가 아니라 현장에 비정규직들을 보니까 '야, 이거 내가 잘리면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걸 현장에서 너무 여실하게 보게 되는 거예요. 방송국 같은 경우도 사실 젊은 분들은 다 비정규직이잖아요. 이런 부당함이 존재하는데 내가 싸우거나 투쟁하면 '저런 비정규직 삶으로 살 수밖에 없다'라는 걸 노동자들이 느끼게 되니까 몸을 사리게 되는 거죠. 또 정규직 노동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켜야 할 게 많아지는 것도 있죠. 아이들은 커가고 집도 있어야 하고, 차 할부금도 갚아야 하고, 아이들 결혼도 시켜야 하고. 학교도 보내야 하고 살면서 발목을 잡는 일들이 많아진 거예요. 어쨌든 그걸 기득권으로 표현하는 분들이 있지만 저는 생존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자기 삶에서 지켜야 하는 문제들이 커진 거죠."

Q.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거 같네요?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적이 사라진 거예요. 옛날에는 노동자들이 투쟁할 때 대상이 명확했거든요. 군부독재, 악덕 재벌, 자본 이런 대상이 명확했는데, 이제는 정규직들의 적은 비정규직이 돼버리고 비정규직들의 적은 정규직이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한 사업장 내에서 정규직 노조가 투쟁하면 비정규직들은 작업해요. 그럼 파업의 힘이 하나도 없어지잖아요. 그럼 정규직 노조가 봤을 때는 저 사람들(비정규직) 때문에 우리가 파업에 힘을 못 가진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비정규직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왜 우리를 원망해, 너희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우리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생각을 하게 돼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는 노동자들 간의 골들이 굉장히 깊어진 것 같아요."

Q. 세대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정규직으로 진입하기 힘든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기성세대 정규직이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세대 간의 갈등 측면에서 볼 수도 있는 거겠죠.
"그럴 수 있죠. 며칠 전 SNS에서 보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사회 문제나 민주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586'들은 그렇게 해왔는데…' 이런 글이 올라오니까, 어떤 젊은 친구가 '당신들은 민주화 운동을 했지만, 우리는 불완전노동을 한다' 이렇게 반박한 것을 보고 굉장히 서글펐었어요. 제 조카들도 거의 다 비정규직들인데 현장에 가보면 젊은 사람들은 거의 비정규직 이외에는 일자리가 없죠. 그리고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게 너무 힘든 세상에 되어버렸죠. 예를 들어서 ‘인천공항공사’나 ‘지하철공사’ 같은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 투쟁을 하면, 정부에서도 정규직화 필요성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너희들도 시험 쳐서 들어와라. 왜 공짜로 먹으려고 그러느냐' 이런 얘기들을 한단 말이죠. 그런데 정규직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여기를 어떻게 들어왔는데' 그런 감정이 있는 거예요. '나는 몇 년을 공부하고, 그 젊은 시절 중요한 시간을 여기 입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해왔는데, 너희들은 왜 그런 노력 안 하고 투쟁을 통해서 들어오려고 그러느냐'라는 논리가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일에 대해서 이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쏟아야 하는데 젊은 세대들을 경쟁하게 하고,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갈등하게 만들어버리는 이건 정치의 실패라고 생각해요."

Q.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세요?
"제가 사실은 카드를 안 썼어요. 카드를 안 쓰다가 이제 최근에 카드를 어쩔 수 없이 만들었어요. 이유가 카드를 안 내면 아예 결재 자체가 안 되는 곳이 너무 많은 거예요. 어디 가서 빵이나 음료수를 하나 사 먹더라도 무인판매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익숙하지 않으니까 젊은 사람들 눈치 보이게 되고. 근데 그렇게 해서 일자리가 없어진 것이 필요가 없어져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코로나를 핑계를 대긴 했죠. 우리 사회가 그런 위기들을 많이 겪었죠, IMF 나 메르스 때도 그렇고, 코로나를 거치면서 양질의 일자리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기계가 대체하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산업 구조가 변화된 측면들도 있지만, 사회 전체가 노동력의 가격을 너무 싸게 만들어버려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 기계로 대체해 버리는 것들이 너무 많아진 것이라고 봐요. 저는 선진국이라는 개념이 아주 많이 기계화되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것이 선진국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 전체의 공공선을 위해서 굉장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한 계층을 무능한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고 소외시키는 산업화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Q.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는데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통령 당선되기 전에 하셨던 말씀들이 굉장히 우려스러웠던 점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152시간 노동이라든지, 취임하고 나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다섯 차례를 만났다든지. 그리고 민주노총이나 이런 노동계 인사들을 만나는 건 없이 재벌 총수들만 만난다든지, 그들의 얘기를 듣고 핫라인을 개설한다고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저는 굉장히 우려스럽죠. 노동자, 민주노총 내에서도 윤석열 대통령을 찍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노동계에서는 굉장히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보죠. 저는 좀 균형 잡힌 시각에서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검찰에서 이제 오랫동안 생활하신 분이라 민주노총을 범죄자의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냥 불법의 틀을 씌워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죠. 그게 아니라 민주노총이 주장하고 역점을 두고 있는 일들, 그리고 노동자들이 바라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게 이 사회에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 일들 인지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누구 편을 들어달라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면 공정한 시선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Q.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2030 젊은 세대들이 많이 지지했는데요. 어떻게 보세요?
"이번에 윤석열 정부를 만들어 낸 것도 이른바 이대남이다 이런 얘기들도 있지만, 저는 그것도 불만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제 민주당 정권이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실업 문제들을 해결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이 안 되면서 반사이익을 국민의힘이 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그것이 ‘영원불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생존 문제를 계속 찾아갈 것이기 때문에 이 정권이 제대로 못 하면 그 힘은 다른 데로 모일 것으로 생각해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 김진숙 이름 앞에서 무슨 수식어가 붙어서 불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냥 '노동자 김진숙'으로 불렸으면 좋겠어요. 제 삶에서 저를 규정했던 것이 해고자였거든요. '해고자 김진숙' 그것은 족쇄 같은 거였죠. 언젠가는 복직을 해야 하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말이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해고자 딱지는 사라졌으니 평생을 노동 운동했던 사람으로서 노동자로 삶을 마감하는 게 제 생에서는 가장 영광스러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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