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호국보훈의 달’, 색다른 전쟁영화 한 편 어때요?

입력 2022.06.12 (08:03)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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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야곱의 사다리’ 중 한 장면. 출처 IMDB.영화 ‘야곱의 사다리’ 중 한 장면. 출처 IMDB.

전쟁 영화는 종종 액션 영화와 혼동된다. 쉴새 없이 울리는 총탄과 포탄 소리, 그에 맞춰 나자빠지는 적군의 시체 등 '전쟁 영화'하면 으레 떠올리는 장면은 슈팅 게임과도 닮았다. 통쾌하고 화끈한 재미는 보장하지만, 전장의 참혹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충일과 6·25전쟁일, 제2연평해전일 등이 있어 '호국보훈의 달'로 불리는 6월, 색다른 전쟁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1990년 만들어진 영화 '야곱의 사다리'는 여느 전쟁 영화처럼 밀림 속 전장을 비추는 데서 시작한다. 메콩강 줄기를 따라 헬기들이 오가는 베트남전 현장이다. 잠시 여유를 즐기던 미군 병사들에게 적이 숨어 있다는 무전이 들어오고, 갑자기 몇몇이 두통을 호소하다 졸도하거나 발작을 일으킨다. 이 틈을 탄 기습 공격에 주인공 제이콥(팀 로빈스)는 혼자 남겨지고, 곧이어 정체 모를 적의 칼에 찔리고 만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다음 장면에서 제이콥은 지하철 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도입부의 전투 장면은 8분을 넘기지 않는다. 전쟁에서 돌아온 제이콥은 자꾸만 기괴한 환상을 보고 악몽에 시달린다. 잃어버린 건 정신건강만이 아니다. 박사 학위를 갖고 좋은 직장에 다니던 그는 이제 우체국 말단 직원으로 일한다. 부인과 이혼하면서 귀여운 아들들도 잃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한 가정을 파탄 냈구나, 쯧쯧 혀를 찰 때쯤 영화는 한 번 더 점프한다.


이혼 뒤 우체국에서 일하며 여자친구와 동거하던 '현재'는 사실 제이콥의 꿈이었고, 그는 멀쩡히 첫 부인 사라 옆에서 깨어난다. "고열에 걸려서 얼음물에 처박히는 꿈을 꿨어." 죽었다던 아들과 다정한 대화도 나눈다. 뭐지? 몽중몽? 뭐가 진짜인 거지? 관객이 당황하는 동안 제이콥은 다시 잠들어 꿈 속에서 베트남을 회상한다. 그런데 눈을 뜨면? 제이콥은 다시 얼음물 가득한 욕조 안이다.

'곡성'을 떠올렸을 정도로 '제이콥의 사다리'는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기 힘들게 관객을 속인다. 깨도 깨도 깨어난 것 같지 않은 악몽 속에 갇힌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실제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이 이랬겠구나 싶게 제이콥의 환상은 기괴하고 음울하다. 여느 전쟁 영화였다면 이름 없는 '병사 1'에 불과했을 그가 어떻게 안팎으로 망가졌는지에 집중하면서, 영화는 화염과 총성 없이도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한다. 그러나 감독이 숨겨 놓은 '마지막 한 방'은 최후의 1분에 있다.

영화 중반, 제이콥은 비슷한 환각 증상을 겪고 있는 전우들을 은밀히 만나 모종의 음모를 추적한다. 익명 제보자로부터 당시 고위층이 병사들의 전투 성과를 높이기 위해 마약을 사용했다는 얘기도 듣는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제이콥을 수상한 남자들이 납치하고, 친절하던 변호사가 갑자기 소송에서 빠지겠다는 뜻을 전하는 등 일반적인 고발 영화 같은 전개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감독이 준비한 미끼였을 뿐. 지금까지 본 모든 건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이콥의 환상이었다는 반전이 관객을 기다린다. "죽었어요." 의무병은 사망 판정을 내리고 치료소를 빠져나간다. "평온해 보이는군. 꽤 오래 버텼는데." 허망한 마지막 대사에선 오히려 생을 향한 인간의 간절함이 사무친다.

시인 정현종은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일생이 함께 오는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썼다. 같은 이유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역시 '죽음은 진부한 사건이지만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라고 했다. 민간인 사망자 몇 명, 군인 사망자 몇 명. 숫자로 표현되는 죽음은 딱딱하고 무심하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는 반전(反轉)구조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다시 조명한다. 살아남았더라면 그의 몫이었을, 한 사람의 '일생'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라는 걸. 한 인터넷 이용자는 이 영화를 '최고의 반전(反戰) 영화'로 꼽았다. 호국 보훈의 달, 전쟁의 참극을 다른 방식으로 곱씹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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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12 08:03:06
    • 수정2022-12-26 09:39:21
    씨네마진국
영화 ‘야곱의 사다리’ 중 한 장면. 출처 IMDB.
전쟁 영화는 종종 액션 영화와 혼동된다. 쉴새 없이 울리는 총탄과 포탄 소리, 그에 맞춰 나자빠지는 적군의 시체 등 '전쟁 영화'하면 으레 떠올리는 장면은 슈팅 게임과도 닮았다. 통쾌하고 화끈한 재미는 보장하지만, 전장의 참혹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현충일과 6·25전쟁일, 제2연평해전일 등이 있어 '호국보훈의 달'로 불리는 6월, 색다른 전쟁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1990년 만들어진 영화 '야곱의 사다리'는 여느 전쟁 영화처럼 밀림 속 전장을 비추는 데서 시작한다. 메콩강 줄기를 따라 헬기들이 오가는 베트남전 현장이다. 잠시 여유를 즐기던 미군 병사들에게 적이 숨어 있다는 무전이 들어오고, 갑자기 몇몇이 두통을 호소하다 졸도하거나 발작을 일으킨다. 이 틈을 탄 기습 공격에 주인공 제이콥(팀 로빈스)는 혼자 남겨지고, 곧이어 정체 모를 적의 칼에 찔리고 만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다음 장면에서 제이콥은 지하철 열차 안에서 깨어난다. 도입부의 전투 장면은 8분을 넘기지 않는다. 전쟁에서 돌아온 제이콥은 자꾸만 기괴한 환상을 보고 악몽에 시달린다. 잃어버린 건 정신건강만이 아니다. 박사 학위를 갖고 좋은 직장에 다니던 그는 이제 우체국 말단 직원으로 일한다. 부인과 이혼하면서 귀여운 아들들도 잃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한 가정을 파탄 냈구나, 쯧쯧 혀를 찰 때쯤 영화는 한 번 더 점프한다.


이혼 뒤 우체국에서 일하며 여자친구와 동거하던 '현재'는 사실 제이콥의 꿈이었고, 그는 멀쩡히 첫 부인 사라 옆에서 깨어난다. "고열에 걸려서 얼음물에 처박히는 꿈을 꿨어." 죽었다던 아들과 다정한 대화도 나눈다. 뭐지? 몽중몽? 뭐가 진짜인 거지? 관객이 당황하는 동안 제이콥은 다시 잠들어 꿈 속에서 베트남을 회상한다. 그런데 눈을 뜨면? 제이콥은 다시 얼음물 가득한 욕조 안이다.

'곡성'을 떠올렸을 정도로 '제이콥의 사다리'는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알기 힘들게 관객을 속인다. 깨도 깨도 깨어난 것 같지 않은 악몽 속에 갇힌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실제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내면이 이랬겠구나 싶게 제이콥의 환상은 기괴하고 음울하다. 여느 전쟁 영화였다면 이름 없는 '병사 1'에 불과했을 그가 어떻게 안팎으로 망가졌는지에 집중하면서, 영화는 화염과 총성 없이도 전쟁의 참혹함을 전달한다. 그러나 감독이 숨겨 놓은 '마지막 한 방'은 최후의 1분에 있다.

영화 중반, 제이콥은 비슷한 환각 증상을 겪고 있는 전우들을 은밀히 만나 모종의 음모를 추적한다. 익명 제보자로부터 당시 고위층이 병사들의 전투 성과를 높이기 위해 마약을 사용했다는 얘기도 듣는다. 진실에 접근하려는 제이콥을 수상한 남자들이 납치하고, 친절하던 변호사가 갑자기 소송에서 빠지겠다는 뜻을 전하는 등 일반적인 고발 영화 같은 전개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감독이 준비한 미끼였을 뿐. 지금까지 본 모든 건 칼에 찔려 죽어가는 제이콥의 환상이었다는 반전이 관객을 기다린다. "죽었어요." 의무병은 사망 판정을 내리고 치료소를 빠져나간다. "평온해 보이는군. 꽤 오래 버텼는데." 허망한 마지막 대사에선 오히려 생을 향한 인간의 간절함이 사무친다.

시인 정현종은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일생이 함께 오는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썼다. 같은 이유에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 역시 '죽음은 진부한 사건이지만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라고 했다. 민간인 사망자 몇 명, 군인 사망자 몇 명. 숫자로 표현되는 죽음은 딱딱하고 무심하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는 반전(反轉)구조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다시 조명한다. 살아남았더라면 그의 몫이었을, 한 사람의 '일생'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이라는 걸. 한 인터넷 이용자는 이 영화를 '최고의 반전(反戰) 영화'로 꼽았다. 호국 보훈의 달, 전쟁의 참극을 다른 방식으로 곱씹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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