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대신 ‘기레기’를 요구하는 자본

입력 2022.06.14 (07:00) 수정 2022.06.14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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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라임 주가조작단’〉 (2021.02.07.)시사기획 창 〈‘라임 주가조작단’〉 (2021.02.07.)

■ 우리은행, 기사 나간 뒤 '언론사' 아닌 '기자 개인'에게 손배소

지난해 2월 7일 KBS 시사기획 창에서 '라임과 주가조작단'이란 제목의 방송이 나갔습니다. 라임펀드에 투자하면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데다 떼일 염려도 없다는 감언이설에 일반 투자자들의 돈 1조 6,000억 원이 묶여 버렸습니다. 삼성과 현대차 같은 망할 염려 없는 안전한 기업에 투자한다더니 사실은 상당수 투자금이 듣도보도 못한 코스닥 기업들 주가조작 자금으로 이용됐습니다.

이 보도가 나가고 난 직후 우리은행이 방송이 허위였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라임펀드를 가장 많이 판매한 금융기관이 우리은행이었는데, 방송에서 우리은행이 라임펀드가 반토막 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수수료를 챙기기 위해 계속 팔았다고 보도했거든요.

언론사의 보도에 억울함이 있다면 그 언론사에 법적인 책임을 묻고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야 언론사도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은행의 소송 제기는 좀 특이했습니다. 보통 언론 보도에 문제가 있으면 언론중재위원회라는 중재 기구를 통해 먼저 보도의 내용이나 절차에 문제가 없었는지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언론중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3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에 들어갔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소송의 대상이 KBS가 아니라 보도한 기자 개인이었습니다.

우리은행의 손해배상 청구 소장우리은행의 손해배상 청구 소장

보도한 기자가 프리랜서 언론인도 아닌 데다 취재 내용이 KBS라는 공중파의 9시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됐는데 KBS가 아닌 취재기자 개인에게 3억 원을 손해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3억 원은 개인에게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이렇게 보도한 기자 개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무슨 유행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KBS뉴스9  ‘호반건설 일감 몰아주기’ (2022.03.30.)KBS뉴스9 ‘호반건설 일감 몰아주기’ (2022.03.30.)

지난 3월엔 호반건설이 2세에게 일감을 몰아줬다는 KBS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호반건설은 KBS와 기자 개인에게 무려 1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특히 취재기자의 월급 가압류 신청까지 했습니다.

이거 뭐 손배 걸릴까 무서워서 어디 취재하겠습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취재하지 말라는 겁니다. 함부로 취재하고 다니면 개인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니 '쫄아보라'는 거죠. 후속 보도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말라는 전략입니다. 찍소리 못하는 약한 자들은 몰라도 대기업과 자본은 괜히 건드리면 기자 개인이 괴로워진다는 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 우리은행 손배소 청구 소송 기각됐지만…

라임 주가조작사건 보도를 놓고 우리은행과의 3억 원 손해배상 소송은 1년 3개월간 계속됐습니다. 공판에 출석해서 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말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KBS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는 우리은행이 KBS가 아닌 기자 개인에게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물론 취재기자인 제가 취재 과정에서 혹여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억울함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건 100%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되는 건 왜 보도가 KBS 뉴스를 통해 나갔는데, 책임을 KBS가 아닌 취재한 기자 개인에게 물을까하는 부분입니다. 목적은 너무나 뻔하지 않습니까? 쫄아보라는 겁니다. 후속보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런 취재는 이제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밖에 저는 해석이 안 됩니다. 정말 비겁합니다. 그리고 우리은행에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취재기자 개인에게만 소송을 제기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말이죠"

공판 과정에서 판사도 이번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취재기자 개인을 상대로 들어온 것은 재판부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은행 측에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언론기관의 보도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하므로, 언론기관이나 기자를 상대로 하는 소송도 최대한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건 보도는 보도의 내용, 보도 경위 및 방식에 있어 일반적인 보도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존재하고, 보도 자체에서 기자 개인의 감정마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자 개인이 우리은행에 가진 감정이 뭘 말하는지는 재판이 끝난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인 6월 10일,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재판부는 '우리은행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 일체도 우리은행이 부담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수많은 피해자를 낸 국민적 관심사인 라임사건에 대해 공영방송사인 KBS 소속 기자가 우리은행 내부 제보와 다수의 근거자료를 토대로 보도를 했으며, 우리은행이 라임펀드의 부실을 인지한 즉시 펀드 판매를 중단했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는 공익적 목적의 보도였다는 것이 판결 이유였습니다.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일이 유행처럼 일상화되는 건 나름 전략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만 해도 그랬거든요. 재판이 길어지면서 변호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만약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재판에서 지면 제 개인 돈으로 3억 원 진짜 물어야 하는건가요?" 했더니 "글쎄요, 확신할 순 없지만, 만약 지게 된다면 손배 금액에 대해 일단 회사가 지급하고 보도에 고의적 과실이 있었는지 회사가 따져서 구상권을 청구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쫄게 되더라고요. '괜히 오지랖 넓게 취재했나?'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더라고요. 개인 손배에 걸려 곤혹(?)스러운 언론인이 요즘 한, 두 명이 아닌데 이런 모습을 후배 기자들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힘이 센 기업이나 자본의 나쁜 짓에 대해 누군가 자신에게 제보하는 걸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기레기질'이나 하고 다니랬더니 왜 '기자질'을 하고 다니냐고, 자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시사기획 창, ‘라임과 주가조작단’
https://www.youtube.com/watch?v=Nynxmt0BKu0&t=4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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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 대신 ‘기레기’를 요구하는 자본
    • 입력 2022-06-14 07:00:09
    • 수정2022-06-14 08:40:03
    취재K
시사기획 창 〈‘라임 주가조작단’〉 (2021.02.07.)
■ 우리은행, 기사 나간 뒤 '언론사' 아닌 '기자 개인'에게 손배소

지난해 2월 7일 KBS 시사기획 창에서 '라임과 주가조작단'이란 제목의 방송이 나갔습니다. 라임펀드에 투자하면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데다 떼일 염려도 없다는 감언이설에 일반 투자자들의 돈 1조 6,000억 원이 묶여 버렸습니다. 삼성과 현대차 같은 망할 염려 없는 안전한 기업에 투자한다더니 사실은 상당수 투자금이 듣도보도 못한 코스닥 기업들 주가조작 자금으로 이용됐습니다.

이 보도가 나가고 난 직후 우리은행이 방송이 허위였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왔습니다. 라임펀드를 가장 많이 판매한 금융기관이 우리은행이었는데, 방송에서 우리은행이 라임펀드가 반토막 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도 수수료를 챙기기 위해 계속 팔았다고 보도했거든요.

언론사의 보도에 억울함이 있다면 그 언론사에 법적인 책임을 묻고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야 언론사도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은행의 소송 제기는 좀 특이했습니다. 보통 언론 보도에 문제가 있으면 언론중재위원회라는 중재 기구를 통해 먼저 보도의 내용이나 절차에 문제가 없었는지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언론중재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3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에 들어갔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소송의 대상이 KBS가 아니라 보도한 기자 개인이었습니다.

우리은행의 손해배상 청구 소장
보도한 기자가 프리랜서 언론인도 아닌 데다 취재 내용이 KBS라는 공중파의 9시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됐는데 KBS가 아닌 취재기자 개인에게 3억 원을 손해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3억 원은 개인에게 적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런데 2,3년 전부터 이렇게 보도한 기자 개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이 무슨 유행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KBS뉴스9  ‘호반건설 일감 몰아주기’ (2022.03.30.)
지난 3월엔 호반건설이 2세에게 일감을 몰아줬다는 KBS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호반건설은 KBS와 기자 개인에게 무려 1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특히 취재기자의 월급 가압류 신청까지 했습니다.

이거 뭐 손배 걸릴까 무서워서 어디 취재하겠습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취재하지 말라는 겁니다. 함부로 취재하고 다니면 개인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러니 '쫄아보라'는 거죠. 후속 보도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말라는 전략입니다. 찍소리 못하는 약한 자들은 몰라도 대기업과 자본은 괜히 건드리면 기자 개인이 괴로워진다는 점을 노리고 있습니다.

■ 우리은행 손배소 청구 소송 기각됐지만…

라임 주가조작사건 보도를 놓고 우리은행과의 3억 원 손해배상 소송은 1년 3개월간 계속됐습니다. 공판에 출석해서 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 말한 내용을 옮겨보겠습니다.

"KBS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는 우리은행이 KBS가 아닌 기자 개인에게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물론 취재기자인 제가 취재 과정에서 혹여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억울함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는 건 100%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안되는 건 왜 보도가 KBS 뉴스를 통해 나갔는데, 책임을 KBS가 아닌 취재한 기자 개인에게 물을까하는 부분입니다. 목적은 너무나 뻔하지 않습니까? 쫄아보라는 겁니다. 후속보도 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런 취재는 이제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밖에 저는 해석이 안 됩니다. 정말 비겁합니다. 그리고 우리은행에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취재기자 개인에게만 소송을 제기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 말이죠"

공판 과정에서 판사도 이번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취재기자 개인을 상대로 들어온 것은 재판부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은행 측에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언론기관의 보도의 자유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하므로, 언론기관이나 기자를 상대로 하는 소송도 최대한 자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건 보도는 보도의 내용, 보도 경위 및 방식에 있어 일반적인 보도와는 상당히 다른 점이 존재하고, 보도 자체에서 기자 개인의 감정마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자 개인이 우리은행에 가진 감정이 뭘 말하는지는 재판이 끝난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인 6월 10일,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재판부는 '우리은행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 일체도 우리은행이 부담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수많은 피해자를 낸 국민적 관심사인 라임사건에 대해 공영방송사인 KBS 소속 기자가 우리은행 내부 제보와 다수의 근거자료를 토대로 보도를 했으며, 우리은행이 라임펀드의 부실을 인지한 즉시 펀드 판매를 중단했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는 공익적 목적의 보도였다는 것이 판결 이유였습니다.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 개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거는 일이 유행처럼 일상화되는 건 나름 전략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만 해도 그랬거든요. 재판이 길어지면서 변호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만약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재판에서 지면 제 개인 돈으로 3억 원 진짜 물어야 하는건가요?" 했더니 "글쎄요, 확신할 순 없지만, 만약 지게 된다면 손배 금액에 대해 일단 회사가 지급하고 보도에 고의적 과실이 있었는지 회사가 따져서 구상권을 청구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솔직히 쫄게 되더라고요. '괜히 오지랖 넓게 취재했나?' 라는 쓸데없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더라고요. 개인 손배에 걸려 곤혹(?)스러운 언론인이 요즘 한, 두 명이 아닌데 이런 모습을 후배 기자들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힘이 센 기업이나 자본의 나쁜 짓에 대해 누군가 자신에게 제보하는 걸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겁니다. '기레기질'이나 하고 다니랬더니 왜 '기자질'을 하고 다니냐고, 자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연관 기사] 시사기획 창, ‘라임과 주가조작단’
https://www.youtube.com/watch?v=Nynxmt0BKu0&t=4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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