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과 절도…부처님, 이 불상 어디로 가야 할까요?

입력 2022.06.17 (08:00) 수정 2022.06.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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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시대 왜구에 약탈당한 서산 부석사 불상
문화재 절도범이 일본 관음사에서 훔쳐 국내 반입
충남 서산 부석사 vs 대마도 관음사, 10년째 소유권 분쟁
1심 부석사 승소…일본 언론 관심 속 2심에 日 주지 첫 출석

고려 때 제작된 금동관음보살좌상(우측)과 통일신라 때 제작된 동조여래입상(좌측)고려 때 제작된 금동관음보살좌상(우측)과 통일신라 때 제작된 동조여래입상(좌측)

“서산 부석사 불상처럼 제작 이력, 1330년 2월 남서주(현 충남 서산)에서 (시주한) 32명의 명단이 다 있거든요. 탄생 이력이 분명한 유일한 불상입니다. 특히 고려시대 불상은 대부분 귀족이나 왕족에 의해 조성됐는데, 이처럼 민초들에 의해 조성됐다는 큰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조사한 학계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2022.06.16. KBS1 라디오 KBS대전 생생뉴스 생생인터뷰)

온화한 미소로 가부좌한 국보급 불상이 있습니다. 고려 말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된 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과거 대한해협을 너머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2012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불상은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충청남도 서산 부석사충청남도 서산 부석사

■ 약탈과 절도 그리고 소송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 불상, 고려 말기인 1330년 2월 불자 32명의 시주로 만들어진 뒤 충청남도 서산 부석사에 봉안됐습니다. 이후 조선 중기인 1526년 왜구에 약탈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觀音寺·간논지)에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간논지)에서 불상이 사라진 뒤 수사를 벌이는 일본경찰.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간논지)에서 불상이 사라진 뒤 수사를 벌이는 일본경찰.

그런데 2012년, 한국의 문화재 전문 절도범들이 대마도에서 불상 2점 등을 훔쳐 국내에 반입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해신신사(海神神社·가이진신사)에 보관하던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이 세관에 의해 적발돼 경찰 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2개의 불상 가운데 앉아있는 모습의 좌상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서산 부석사와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대마도 관음사와 일본 정부의 기나긴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해외 원정을 통해 불상 2점 등을 훔친 문화재 절도단들에 대한 재판.해외 원정을 통해 불상 2점 등을 훔친 문화재 절도단들에 대한 재판.

■ 반환금지 가처분 신청

해외 원정 문화재 절도단이 일본에서 훔쳐 장물로 돌아온 국보급 불상.

일본 정부는 이 불상에 대한 환수, 그러니까 ‘몰수물 교부’를 요청했습니다. 불상의 인도 절차를 밟던 중에 이번엔 서산 부석사 측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약탈 문화재가 되돌아온 만큼 원래 주인이었던 부석사로 돌아가야지 일본으로 반환하지 말라는 겁니다.

법원은 2013년 2월 부석사의 신청을 받아들였고, 일본 측의 환수 절차는 중단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좌상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정부와 서산 부석사 간의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절도단이 훔친 또 다른 불상,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의 경우 대검찰청이 2015년 7월 일본 측으로 반환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대검은 불상이 불법 유출됐다는 증거를 비롯해 국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형사소송법에 따라 도난 당시 점유자에게 전달한다고 밝혔습니다.


■ 호적등본에 전입 기록이 없다?

불상의 소유권을 놓고 이제 부석사와 검찰의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2017년 1월 1심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제12민사부 문보경, 이경선 손호영 판사는 부석사에게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좌상을 약탈당했다는 부석사의 주장이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겁니다. 법원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과거에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의 방법으로 대마도 관음사로 운반돼 봉안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습니다.

그 이유로 1951년 대마도 관음사에서 불상 내부에 ‘복장물’이 발견된 점을 들었습니다. 복장물은 불상을 만들 때 가슴에 넣는 물건으로, 만다라와 후령, 관음결연문, 목합 등이 나왔는데, 이중 결연문에 ' 남섬주부고려국서주부석사당주관음주성결연문’이라는 제목과 함께 시주자 32명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무릇 듣기에 모든 불보살들이 큰 서원을 내어 중생 제도에 너나를 떠나 평등하게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인연이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 금구에 의거해 제자 등이 함께 대서원을 내어 관음존을 만들고 부석사에 봉안하고 영충공양하는 까닭은 현세에서는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부르는 것이며 후세에서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바람 때문이다. 천력 3년 2월.”
- 금동관음보살좌상 결여문 문구

충남 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은 서주. 서산 부석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17년, 그러니까 서기 677년에 의상대사가 세웠습니다. 그리고 천력 3년은 서기 1330년입니다. 부석사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이 좌상의 복장물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1심 재판부는 또 “국내 사찰에서는 불상의 개금(改金)과 보수, 이안(移安: 신주나 영정을 다른 곳으로 옮김)같은 불사가 있을 때는 새로운 기록과 유물을 넣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정상적인 교류로 불상이 이전될 경우 불상을 주는 측에선 복장물을 빼고 대신 어느 사찰에서 조성해 다른 사찰로 옮긴다는 기록을 넣는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고 판시했습니다.

특히 이운(移運·불상을 옮겨 모심)할 땐 내부에 원문을 적어 내용을 밝히는 점을 비춰 사람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호적등본인 복장물에 불상을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른바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호적등본에 일본으로 전입 신고한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 좌상은 일본에 약탈됐나?

그렇다면 좌상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요? 재판부는 서일본문화협회가 발행한 기고문에서 좌상의 이동 경로를 추측했습니다. '대마의 미술'이라는 제목의 일본 H대 교수 기고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관음사의 연혁에 의하면 ‘코노헤이사에몬 모리치카’가 조선으로 건너가 악행을 저질러 절연을 당한 후 불교를 수양하여 귀국해 관음사를 열었다고 한다. 왜구의 한 집단이었다고 생각되는 코노가 창립한 관음사에 천력 3년(1330년) 제작된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서일본문화협회 '대마의 미술' 기고문 中

재판부는 또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 불상이 제작된 1330년 이후 1352년부터 1381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왜구들이 충남 서산을 침입했다는 기록도 판결문에 적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불상이 불에 탄 ‘화상’의 흔적이 있고, 보관(寶冠)과 대좌(臺座)가 존재하지 않는 등 일부 손상된 상태를 비춰 정상적인 경로로 옮겼다고 보기 어렵다고 추정했습니다.

2017년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뒤 법정을 나오는 원우 부석사 주지.2017년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뒤 법정을 나오는 원우 부석사 주지.

■ 취득시효와 일방적 청구

1심 재판부의 판결 이후 검찰은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그러면서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부석사로 인도하라는 법원의 명령에 대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습니다.

결국, 불상은 다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지며 ‘도로 아미타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습니다.

소송은 5년간 16번에 달하는 변론기일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어제(15일) 16번째 변론기일이 열리던 대전고등법원 315호 법정에 처음으로 일본 대마도 관음사의 주지가 참석했습니다. 재판은 일본 NHK를 비롯해 NTV, TBS 등 일본 방송 매체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습니다.


검찰 측 보조참고인으로 출석한 다나카 세쓰료 관음사 주지는 법정에서 20여 분간의 변론을 통해 불상의 소유권은 일본, 그리고 대마도 관음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나카 주지는 "좌상은 1953년 관음사가 종교법인이 된 이후 명확하게 소유 의사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소지해왔으며, 이는 일본 민법이든 한국 민법이든 취득시효에 따라 우리에게 소유권이 성립돼 있다"면서 "당가의 마음의 의지로 삼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좌상은 관음사뿐 아니라 대마도 더 나아가 나가사키현 전체의 재산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012년 절도단에 의해 도난당하고, 불법적으로 한국에 흘러들어오게 됐다”며 “하루속히 거듭 되돌아오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금동관음보살 항소심 심리를 마치고 인터뷰하는 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2022.06.15.)금동관음보살 항소심 심리를 마치고 인터뷰하는 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2022.06.15.)

다나카 대마도 관음사 주지는 또 변론기일에 앞서 제출한 5장의 준비서면을 통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관음사 설립자인 '종관'이 1526년경 조선에서 불상을 적법하게 취득해 일본으로 받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

부석사 측은 다나카 주지에게 적법하게 들어왔다는 증거 자료가 있는지 재판부에 물어달라고 요청했고, 재판부는 이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재판부의 질문에 대해 다나카 주지는 "남아있는 이야기로는 종관이 1527년 조선에서 쓰시마로 돌아와 절을 세웠다는 것밖에 없다"며 "일본으로 돌아가 관련 자료를 찾아본 뒤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원우 전 서산 부석사 주지원우 전 서산 부석사 주지

이날 재판을 참석한 원우 부석사 전 주지는 "관음사 측이 참가에 감사를 드리며, 그쪽의 주장을 들었으니 검토를 충분히 하고 법리적인 준비를 해서 다음 재판에 임하겠다"면서 "일본 측이 새로 주장한 조선에 와서 수행을 했다던가 여러 많은 주장에 대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 약탈이냐 절도냐

쟁점은 두 가지입니다. 애초 왜구에 의한 약탈로 불상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만큼 서산 부석사가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소유권을 갖느냐, 아니면 문화재 절도단에 의해 장물로 들어온 만큼 대마도 관음사로 반환되느냐.


2012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긴 분쟁과 소송. 항소심 재판부의 결정이 있더라도 대법원 판결까지 고려할 경우 좌상의 거취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갈짓자(之)'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어디로 갈지 부처님은 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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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탈과 절도…부처님, 이 불상 어디로 가야 할까요?
    • 입력 2022-06-17 08:00:12
    • 수정2022-06-17 10: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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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ong>조선시대 왜구에 약탈당한 서산 부석사 불상<br />문화재 절도범이 일본 관음사에서 훔쳐 국내 반입<br />충남 서산 부석사 vs 대마도 관음사, 10년째 소유권 분쟁<br />1심 부석사 승소…일본 언론 관심 속 2심에 日 주지 첫 출석</strong><br />
고려 때 제작된 금동관음보살좌상(우측)과 통일신라 때 제작된 동조여래입상(좌측)
“서산 부석사 불상처럼 제작 이력, 1330년 2월 남서주(현 충남 서산)에서 (시주한) 32명의 명단이 다 있거든요. 탄생 이력이 분명한 유일한 불상입니다. 특히 고려시대 불상은 대부분 귀족이나 왕족에 의해 조성됐는데, 이처럼 민초들에 의해 조성됐다는 큰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조사한 학계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 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2022.06.16. KBS1 라디오 KBS대전 생생뉴스 생생인터뷰)

온화한 미소로 가부좌한 국보급 불상이 있습니다. 고려 말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제작된 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과거 대한해협을 너머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2012년 다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불상은 소유권을 둘러싸고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충청남도 서산 부석사
■ 약탈과 절도 그리고 소송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이 불상, 고려 말기인 1330년 2월 불자 32명의 시주로 만들어진 뒤 충청남도 서산 부석사에 봉안됐습니다. 이후 조선 중기인 1526년 왜구에 약탈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觀音寺·간논지)에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일본 나가사키현 대마도의 사찰 관음사(간논지)에서 불상이 사라진 뒤 수사를 벌이는 일본경찰.
그런데 2012년, 한국의 문화재 전문 절도범들이 대마도에서 불상 2점 등을 훔쳐 국내에 반입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관음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해신신사(海神神社·가이진신사)에 보관하던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이 세관에 의해 적발돼 경찰 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2개의 불상 가운데 앉아있는 모습의 좌상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서산 부석사와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대마도 관음사와 일본 정부의 기나긴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해외 원정을 통해 불상 2점 등을 훔친 문화재 절도단들에 대한 재판.
■ 반환금지 가처분 신청

해외 원정 문화재 절도단이 일본에서 훔쳐 장물로 돌아온 국보급 불상.

일본 정부는 이 불상에 대한 환수, 그러니까 ‘몰수물 교부’를 요청했습니다. 불상의 인도 절차를 밟던 중에 이번엔 서산 부석사 측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약탈 문화재가 되돌아온 만큼 원래 주인이었던 부석사로 돌아가야지 일본으로 반환하지 말라는 겁니다.

법원은 2013년 2월 부석사의 신청을 받아들였고, 일본 측의 환수 절차는 중단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좌상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정부와 서산 부석사 간의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절도단이 훔친 또 다른 불상, 통일신라 동조여래입상의 경우 대검찰청이 2015년 7월 일본 측으로 반환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대검은 불상이 불법 유출됐다는 증거를 비롯해 국내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형사소송법에 따라 도난 당시 점유자에게 전달한다고 밝혔습니다.


■ 호적등본에 전입 기록이 없다?

불상의 소유권을 놓고 이제 부석사와 검찰의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2017년 1월 1심 재판부인 대전지방법원 제12민사부 문보경, 이경선 손호영 판사는 부석사에게 승소 판결을 내립니다. 좌상을 약탈당했다는 부석사의 주장이 법원으로부터 인정받은 겁니다. 법원은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과거에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의 방법으로 대마도 관음사로 운반돼 봉안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습니다.

그 이유로 1951년 대마도 관음사에서 불상 내부에 ‘복장물’이 발견된 점을 들었습니다. 복장물은 불상을 만들 때 가슴에 넣는 물건으로, 만다라와 후령, 관음결연문, 목합 등이 나왔는데, 이중 결연문에 ' 남섬주부고려국서주부석사당주관음주성결연문’이라는 제목과 함께 시주자 32명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무릇 듣기에 모든 불보살들이 큰 서원을 내어 중생 제도에 너나를 떠나 평등하게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인연이 없는 중생은 교화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 금구에 의거해 제자 등이 함께 대서원을 내어 관음존을 만들고 부석사에 봉안하고 영충공양하는 까닭은 현세에서는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부르는 것이며 후세에서는 함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바람 때문이다. 천력 3년 2월.”
- 금동관음보살좌상 결여문 문구

충남 서산의 고려시대 명칭은 서주. 서산 부석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17년, 그러니까 서기 677년에 의상대사가 세웠습니다. 그리고 천력 3년은 서기 1330년입니다. 부석사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이 좌상의 복장물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1심 재판부는 또 “국내 사찰에서는 불상의 개금(改金)과 보수, 이안(移安: 신주나 영정을 다른 곳으로 옮김)같은 불사가 있을 때는 새로운 기록과 유물을 넣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정상적인 교류로 불상이 이전될 경우 불상을 주는 측에선 복장물을 빼고 대신 어느 사찰에서 조성해 다른 사찰로 옮긴다는 기록을 넣는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고 판시했습니다.

특히 이운(移運·불상을 옮겨 모심)할 땐 내부에 원문을 적어 내용을 밝히는 점을 비춰 사람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호적등본인 복장물에 불상을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른바 금동관음보살좌상의 호적등본에 일본으로 전입 신고한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 좌상은 일본에 약탈됐나?

그렇다면 좌상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요? 재판부는 서일본문화협회가 발행한 기고문에서 좌상의 이동 경로를 추측했습니다. '대마의 미술'이라는 제목의 일본 H대 교수 기고문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관음사의 연혁에 의하면 ‘코노헤이사에몬 모리치카’가 조선으로 건너가 악행을 저질러 절연을 당한 후 불교를 수양하여 귀국해 관음사를 열었다고 한다. 왜구의 한 집단이었다고 생각되는 코노가 창립한 관음사에 천력 3년(1330년) 제작된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왜구에 의한 불상 등의 일방적 청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서일본문화협회 '대마의 미술' 기고문 中

재판부는 또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 불상이 제작된 1330년 이후 1352년부터 1381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왜구들이 충남 서산을 침입했다는 기록도 판결문에 적시했습니다. 이와 함께 불상이 불에 탄 ‘화상’의 흔적이 있고, 보관(寶冠)과 대좌(臺座)가 존재하지 않는 등 일부 손상된 상태를 비춰 정상적인 경로로 옮겼다고 보기 어렵다고 추정했습니다.

2017년 1심 재판에서 승소한 뒤 법정을 나오는 원우 부석사 주지.
■ 취득시효와 일방적 청구

1심 재판부의 판결 이후 검찰은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그러면서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부석사로 인도하라는 법원의 명령에 대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도 냈습니다.

결국, 불상은 다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지며 ‘도로 아미타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습니다.

소송은 5년간 16번에 달하는 변론기일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어제(15일) 16번째 변론기일이 열리던 대전고등법원 315호 법정에 처음으로 일본 대마도 관음사의 주지가 참석했습니다. 재판은 일본 NHK를 비롯해 NTV, TBS 등 일본 방송 매체들까지 참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습니다.


검찰 측 보조참고인으로 출석한 다나카 세쓰료 관음사 주지는 법정에서 20여 분간의 변론을 통해 불상의 소유권은 일본, 그리고 대마도 관음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나카 주지는 "좌상은 1953년 관음사가 종교법인이 된 이후 명확하게 소유 의사를 가지고 공공연하게 소지해왔으며, 이는 일본 민법이든 한국 민법이든 취득시효에 따라 우리에게 소유권이 성립돼 있다"면서 "당가의 마음의 의지로 삼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좌상은 관음사뿐 아니라 대마도 더 나아가 나가사키현 전체의 재산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012년 절도단에 의해 도난당하고, 불법적으로 한국에 흘러들어오게 됐다”며 “하루속히 거듭 되돌아오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금동관음보살 항소심 심리를 마치고 인터뷰하는 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2022.06.15.)
다나카 대마도 관음사 주지는 또 변론기일에 앞서 제출한 5장의 준비서면을 통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관음사 설립자인 '종관'이 1526년경 조선에서 불상을 적법하게 취득해 일본으로 받아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나카 세쓰료 일본 대마도 관음사 주지
부석사 측은 다나카 주지에게 적법하게 들어왔다는 증거 자료가 있는지 재판부에 물어달라고 요청했고, 재판부는 이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재판부의 질문에 대해 다나카 주지는 "남아있는 이야기로는 종관이 1527년 조선에서 쓰시마로 돌아와 절을 세웠다는 것밖에 없다"며 "일본으로 돌아가 관련 자료를 찾아본 뒤 서면으로 제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원우 전 서산 부석사 주지
이날 재판을 참석한 원우 부석사 전 주지는 "관음사 측이 참가에 감사를 드리며, 그쪽의 주장을 들었으니 검토를 충분히 하고 법리적인 준비를 해서 다음 재판에 임하겠다"면서 "일본 측이 새로 주장한 조선에 와서 수행을 했다던가 여러 많은 주장에 대해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 약탈이냐 절도냐

쟁점은 두 가지입니다. 애초 왜구에 의한 약탈로 불상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간 만큼 서산 부석사가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소유권을 갖느냐, 아니면 문화재 절도단에 의해 장물로 들어온 만큼 대마도 관음사로 반환되느냐.


2012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진 긴 분쟁과 소송. 항소심 재판부의 결정이 있더라도 대법원 판결까지 고려할 경우 좌상의 거취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갈짓자(之)' 신세를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어디로 갈지 부처님은 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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