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진국] 왜 파업을 하냐고요? 영화가 그려낸 투쟁의 이유

입력 2022.06.19 (08:00) 수정 2022.12.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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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랜드 그룹의 홈에버 대량 해고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 (2014). 출처 네이버 영화.2007년 이랜드 그룹의 홈에버 대량 해고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 (2014). 출처 네이버 영화.

지난 14일 저녁, 8일간에 걸친 화물연대 파업이 막을 내리기까지 이번 주의 가장 큰 시사 이슈는 단연 파업이었습니다. 핵심 쟁점이었던 안전 운임제와 정치권의 논의, 경제적 손실 등을 다룬 기사들이 한바탕 지나간 이번 주말, 이번엔 노동자의 입장에서 파업을 그린 영화를 골랐습니다. 2007년 홈에버 비정규직 계산원 대량 해고 사태를 다룬 2014년 영화 '카트'입니다.

영화 '카트'의 주인공 선희(염정아)는 5년 동안 한 번도 벌점을 받은 적이 없을 만큼 성실한 직원입니다. 상품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돕는 게 주 업무지만, 창고에 쌓인 제품을 매대에 채워 넣는 속칭 '까대기'와 성난 손님을 달래기 위해 때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 감정 노동도 선희를 비롯한 캐셔들의 몫입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복도에 놓인 '생각 의자'에 앉아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반성문을 쓰고,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계단 밑 창고가 유일한 휴식 공간인 마트 노동자들의 현실을 '카트'는 영화 전반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그러나 회사의 요구에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일하던 선희는 정규직 전환을 기다리던 중 청천벽력같은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선희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한 회사는 "아웃소싱(인력 외주화)이 트렌드"라며, 아직 남은 계약 기간에도 불구하고 해고를 강행합니다. 반찬값 벌러, 심심풀이로 나오는 곳이 아니라 생계가 걸려 있는 일터이기에 결국 선희를 비롯한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마트 점거에 들어갑니다. 실제로 512일 동안 이어진 이랜드-홈에버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이 영화의 바탕이 됐습니다.


현실에서는 노조 지도부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조합원의 복직이 이뤄졌지만, 영화 '카트'는 거기까지 보여주지 않고 이른바 열린 결말 구조로 끝을 맺습니다. 가장 먼저 단체 행동을 제안했을 만큼 똑똑하고 야무진 성격이지만, 아들이 다친 뒤 병원비 때문에 결국 마트로 복귀하고 마는 혜미(문정희)가 선희와 함께 카트를 밀며 경찰에게 돌진하는 장면이 마지막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연대에 대한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까요?

어쩌면 노조에 대한 배신으로 비칠 법한 혜미의 선택에도 선희는 야속해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라면 꿈도 못 꿀 일을 네 덕분에 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심전심, 모두가 비슷한 처지이기에 마트의 여성 노동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습니다. 농성장으로 변한 마트 안에서 '여사님'들이 각자 가져온 식재료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나눠 먹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흔히 '강철' 같은 '투쟁'으로 묘사되는 노동자들의 쟁의 행위에, 부지영 감독은 따뜻하고 끈끈한 여성 공동체의 모습을 더했습니다.

집에 전기가 다 끊기고 아들 급식비에 수학 여행비도 못 낼 판이 되도록, 왜 저렇게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거지? 영화를 보며 누군가 떠올릴 질문에, 주인공들은 제 목소리로 답을 내놓습니다. 억울하니까, 악 소리라도 한 번 내봐야겠으니까. 묵묵히 일만 하니까 쉬워 보이느냐고, 우리가 투명인간이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2014년 개봉한 작품임에도, 1990년 만들어진 한국 노동영화의 전설 '파업 전야'가 제기하던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파업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카트'의 여성 노동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섭 단체를 만들어 협상에 나섰을 때 회사는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회유해 노조를 무산시키려고도 합니다. 이 역시 '파업 전야' 속 철강 노동자들과 똑같습니다. 결국, 참다 참다 못해 모든 걸 잃을 각오로 선택하는 게 파업이라는 걸 두 작품은 비슷한 결말을 통해 말합니다. 파업이 '절대 선(善)'이라는 거야? 무조건 옳다는 거야? 손쉽게 묻기 전에 두 작품을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24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왜 두 영화는 이렇게 비슷한지, 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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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네마진국] 왜 파업을 하냐고요? 영화가 그려낸 투쟁의 이유
    • 입력 2022-06-19 08:00:14
    • 수정2022-12-26 09:39:21
    씨네마진국
2007년 이랜드 그룹의 홈에버 대량 해고 사태를 다룬 영화 ‘카트’ (2014). 출처 네이버 영화.
지난 14일 저녁, 8일간에 걸친 화물연대 파업이 막을 내리기까지 이번 주의 가장 큰 시사 이슈는 단연 파업이었습니다. 핵심 쟁점이었던 안전 운임제와 정치권의 논의, 경제적 손실 등을 다룬 기사들이 한바탕 지나간 이번 주말, 이번엔 노동자의 입장에서 파업을 그린 영화를 골랐습니다. 2007년 홈에버 비정규직 계산원 대량 해고 사태를 다룬 2014년 영화 '카트'입니다.

영화 '카트'의 주인공 선희(염정아)는 5년 동안 한 번도 벌점을 받은 적이 없을 만큼 성실한 직원입니다. 상품 바코드를 찍고 계산을 돕는 게 주 업무지만, 창고에 쌓인 제품을 매대에 채워 넣는 속칭 '까대기'와 성난 손님을 달래기 위해 때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 감정 노동도 선희를 비롯한 캐셔들의 몫입니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복도에 놓인 '생각 의자'에 앉아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반성문을 쓰고,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계단 밑 창고가 유일한 휴식 공간인 마트 노동자들의 현실을 '카트'는 영화 전반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그러나 회사의 요구에 싫은 소리 한번 없이 일하던 선희는 정규직 전환을 기다리던 중 청천벽력같은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선희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한 회사는 "아웃소싱(인력 외주화)이 트렌드"라며, 아직 남은 계약 기간에도 불구하고 해고를 강행합니다. 반찬값 벌러, 심심풀이로 나오는 곳이 아니라 생계가 걸려 있는 일터이기에 결국 선희를 비롯한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마트 점거에 들어갑니다. 실제로 512일 동안 이어진 이랜드-홈에버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이 영화의 바탕이 됐습니다.


현실에서는 노조 지도부가 복직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나머지 조합원의 복직이 이뤄졌지만, 영화 '카트'는 거기까지 보여주지 않고 이른바 열린 결말 구조로 끝을 맺습니다. 가장 먼저 단체 행동을 제안했을 만큼 똑똑하고 야무진 성격이지만, 아들이 다친 뒤 병원비 때문에 결국 마트로 복귀하고 마는 혜미(문정희)가 선희와 함께 카트를 밀며 경찰에게 돌진하는 장면이 마지막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연대에 대한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까요?

어쩌면 노조에 대한 배신으로 비칠 법한 혜미의 선택에도 선희는 야속해 하지 않습니다. 대신 "나라면 꿈도 못 꿀 일을 네 덕분에 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심전심, 모두가 비슷한 처지이기에 마트의 여성 노동자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습니다. 농성장으로 변한 마트 안에서 '여사님'들이 각자 가져온 식재료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나눠 먹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흔히 '강철' 같은 '투쟁'으로 묘사되는 노동자들의 쟁의 행위에, 부지영 감독은 따뜻하고 끈끈한 여성 공동체의 모습을 더했습니다.

집에 전기가 다 끊기고 아들 급식비에 수학 여행비도 못 낼 판이 되도록, 왜 저렇게 승산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거지? 영화를 보며 누군가 떠올릴 질문에, 주인공들은 제 목소리로 답을 내놓습니다. 억울하니까, 악 소리라도 한 번 내봐야겠으니까. 묵묵히 일만 하니까 쉬워 보이느냐고, 우리가 투명인간이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2014년 개봉한 작품임에도, 1990년 만들어진 한국 노동영화의 전설 '파업 전야'가 제기하던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파업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건 '카트'의 여성 노동자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섭 단체를 만들어 협상에 나섰을 때 회사는 무시로 일관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을 회유해 노조를 무산시키려고도 합니다. 이 역시 '파업 전야' 속 철강 노동자들과 똑같습니다. 결국, 참다 참다 못해 모든 걸 잃을 각오로 선택하는 게 파업이라는 걸 두 작품은 비슷한 결말을 통해 말합니다. 파업이 '절대 선(善)'이라는 거야? 무조건 옳다는 거야? 손쉽게 묻기 전에 두 작품을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24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왜 두 영화는 이렇게 비슷한지, 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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