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원전 폭발해도 ‘책임없음’…면죄부 유효할까?

입력 2022.06.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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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본에서 원전이 폭발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일본의 사법부가 처음으로 그에 대한 답을 내놨습니다.

“쓰나미 대책을 지시했어도 못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단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큰 쓰나미였기 때문에 장기평가를 전제로 행동했어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근거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최고재판소 판결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일본의 민영방송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최고재판소 판결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일본의 민영방송

일본 정부는 2002년 지진예측 ‘장기평가’를 공표했습니다. 도쿄전력은 2008년 장기평가에 기초해 후쿠시마 원전 부지의 남동쪽에서 최대 15.7미터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수소폭발이 발생한 직후의 후쿠시마원전 1호기(2011.3.12)수소폭발이 발생한 직후의 후쿠시마원전 1호기(2011.3.12)

이번 재판의 다수의견은 일본 정부가 도쿄전력에 대책을 세우게 했다면 장기평가의 예측에 따라 ‘방조제’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실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는 예측과 달리 원전의 '동쪽'에서도 대량의 해수가 유입됐습니다.

이에 따라 다수의견은 방조제가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전원 손실을 막을 수 없어 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소송에서의 2가지 쟁점인 ‘예측가능성’과 ‘결과회피가능성’에서 '결과회피가능성'에만 중점을 둬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소송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소송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
■ 후쿠시마원전 사고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

일본 정부가 대형 쓰나미를 예측할 수 있었나?
대책을 세웠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나?

20여 건의 재판에서 판단이 절반 정도로 엇갈려 온 것도 일부 재판부가 사고를 예측할 수 있었고, 대책도 세울 수 있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번 집단소송 4건의 1·2심에서도 각각 재판부 세 곳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이번 집단소송 4건의 1·2심에서도 각각 재판부 세 곳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판단한 최고재판소는 예측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결과회피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사고 발생 후, 방사능이 덮친 집과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던 주민만 16만여 명. 11년이 지난 지금도 11%에 해당하는 3만 명가량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책민영’ 방식으로 운영돼 온 일본 원전의 폭발과 방사능 사고에도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사법부의 결론이 나오면서 논란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로 집단소송 네 건(후쿠시마, 군마, 지바, 에히메)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도쿄전력이 안게 됐습니다. 도쿄전력의 배상 책임과 그에 따른 14억 엔의 배상액은 지난 3월 이미 확정됐습니다.

도쿄전력에 배상을 요구한 전체 소송은 33건. 원고는 만2천여 명에 이르고, 청구액은 1060억엔이 넘습니다.

최고재판소 앞에서 판결 소식을 전하고 있는 후쿠시마 소송 변호인최고재판소 앞에서 판결 소식을 전하고 있는 후쿠시마 소송 변호인

최고재판소 앞에서 긴 행렬을 이루며 승소 소식을 기다리던 피해 주민들은 허망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패소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오고, 휴대전화로 “어이없는 판결이 나왔다”며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선전차량 위에서 판결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피해 주민선전차량 위에서 판결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피해 주민

선전 차량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남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행렬 속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피해 주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두 손을 입에 대고 힘껏 외쳤습니다.

“최고재판소 판사여! 생명을 구한다는 당신의 정의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패소 소식을 전해들은 피해 주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패소 소식을 전해들은 피해 주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구마 에지 게이오대학 교수는 오히려 이번 판결이 '책임 소재' 논란의 시작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오구마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사업자의 배상책임액에 상한이 있고, 그것을 넘긴다면 대통령이 의회에 보상계획을 제출하게 돼 있다”며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원전을 가동해 왔고, 그 때문에 원전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안전신화’를 퍼뜨릴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 이번 소송의 의의라고 봤습니다.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에는 원전 사고가 발생한 경우, 전력회사는 과실의 유무에 관계 없이 원칙적으로 무제한의 배상책임을 지게 돼 있습니다.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오구마 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원전 사고의 책임 소재 논란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번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책임을 피해갔지만 일본 원전은 늘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지진(NHK홈페이지)일본 전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지진(NHK홈페이지)

무엇보다도 일본은 대형 지진과 화산 폭발, 쓰나미의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입니다. 최고재판소 판결 이후, 일본 언론과 SNS에서는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 지진대국인 일본에서는 모든 원전 가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때마침 기시다 정권은 판결이 나오기 열흘 전 원전 추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7일 발표한 ‘경제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에서 기존의 ‘가능한 의존도를 저감’한다는 문구는 없애고, 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자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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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20 11:34:16
    특파원 리포트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본에서 원전이 폭발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일본의 사법부가 처음으로 그에 대한 답을 내놨습니다.

“쓰나미 대책을 지시했어도 못 막았을 가능성이 높다”

“단적으로 말하면 너무나 큰 쓰나미였기 때문에 장기평가를 전제로 행동했어도 회피할 수 있었다고 판단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판단한 근거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 소송에 대한 최고재판소 판결 소식을 속보로 전하는 일본의 민영방송
일본 정부는 2002년 지진예측 ‘장기평가’를 공표했습니다. 도쿄전력은 2008년 장기평가에 기초해 후쿠시마 원전 부지의 남동쪽에서 최대 15.7미터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수소폭발이 발생한 직후의 후쿠시마원전 1호기(2011.3.12)
이번 재판의 다수의견은 일본 정부가 도쿄전력에 대책을 세우게 했다면 장기평가의 예측에 따라 ‘방조제’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실제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는 예측과 달리 원전의 '동쪽'에서도 대량의 해수가 유입됐습니다.

이에 따라 다수의견은 방조제가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전원 손실을 막을 수 없어 같은 사고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소송에서의 2가지 쟁점인 ‘예측가능성’과 ‘결과회피가능성’에서 '결과회피가능성'에만 중점을 둬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손해배상소송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
■ 후쿠시마원전 사고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

일본 정부가 대형 쓰나미를 예측할 수 있었나?
대책을 세웠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나?

20여 건의 재판에서 판단이 절반 정도로 엇갈려 온 것도 일부 재판부가 사고를 예측할 수 있었고, 대책도 세울 수 있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번 집단소송 4건의 1·2심에서도 각각 재판부 세 곳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판단한 최고재판소는 예측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고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결과회피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사고 발생 후, 방사능이 덮친 집과 고향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던 주민만 16만여 명. 11년이 지난 지금도 11%에 해당하는 3만 명가량이 피난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책민영’ 방식으로 운영돼 온 일본 원전의 폭발과 방사능 사고에도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사법부의 결론이 나오면서 논란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로 집단소송 네 건(후쿠시마, 군마, 지바, 에히메)에 대한 모든 책임은 도쿄전력이 안게 됐습니다. 도쿄전력의 배상 책임과 그에 따른 14억 엔의 배상액은 지난 3월 이미 확정됐습니다.

도쿄전력에 배상을 요구한 전체 소송은 33건. 원고는 만2천여 명에 이르고, 청구액은 1060억엔이 넘습니다.

최고재판소 앞에서 판결 소식을 전하고 있는 후쿠시마 소송 변호인
최고재판소 앞에서 긴 행렬을 이루며 승소 소식을 기다리던 피해 주민들은 허망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패소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나오고, 휴대전화로 “어이없는 판결이 나왔다”며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선전차량 위에서 판결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피해 주민
선전 차량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던 남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행렬 속 노인들이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피해 주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는 두 손을 입에 대고 힘껏 외쳤습니다.

“최고재판소 판사여! 생명을 구한다는 당신의 정의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패소 소식을 전해들은 피해 주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구마 에지 게이오대학 교수는 오히려 이번 판결이 '책임 소재' 논란의 시작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오구마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는 사업자의 배상책임액에 상한이 있고, 그것을 넘긴다면 대통령이 의회에 보상계획을 제출하게 돼 있다”며 최종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원전을 가동해 왔고, 그 때문에 원전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안전신화’를 퍼뜨릴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 이번 소송의 의의라고 봤습니다.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에는 원전 사고가 발생한 경우, 전력회사는 과실의 유무에 관계 없이 원칙적으로 무제한의 배상책임을 지게 돼 있습니다.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오구마 교수의 말처럼 일본에서 원전 사고의 책임 소재 논란이 끝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번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책임을 피해갔지만 일본 원전은 늘 사고의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지진(NHK홈페이지)
무엇보다도 일본은 대형 지진과 화산 폭발, 쓰나미의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입니다. 최고재판소 판결 이후, 일본 언론과 SNS에서는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준 것이라면 지진대국인 일본에서는 모든 원전 가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때마침 기시다 정권은 판결이 나오기 열흘 전 원전 추진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7일 발표한 ‘경제재정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에서 기존의 ‘가능한 의존도를 저감’한다는 문구는 없애고, 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자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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