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오키나와 곳곳 ‘불발탄 1,900톤’…전쟁의 그늘 ‘여전’

입력 2022.06.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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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주년 위령의 날을 맞아 추도식이 열린 오키나와 평화공원(2022.06.23.)/NHK화면 갈무리제77주년 위령의 날을 맞아 추도식이 열린 오키나와 평화공원(2022.06.23.)/NHK화면 갈무리

첫 공습은 1944년 10월 10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해 일본 본토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이날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하루 동안 폭격기를 1,300회 넘게 출격시켰고 500여 톤의 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일본군뿐 아니라 민간인도 다수 숨져 7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이후 미군 55만 명과 일본군 10만 명 사이에 지옥 같은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오키나와 국지전은 9월 7일까지 이어졌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사망자는 20만 명가량이나 됐습니다.

제77주년 위령의 날 추도식에서 묵념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2022.06.23.)/NHK화면 갈무리제77주년 위령의 날 추도식에서 묵념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2022.06.23.)/NHK화면 갈무리

■ 77번째 '위령의 날' 추도식 열려

어제(23일) 낮 12시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 등 3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제77주년 위령의 날을 맞아 추도식에 참석해 1분간 묵념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전쟁의 참화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 이 결연한 다짐을 통해 세계 누구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오키나와현은 1945년 6월 23일 일본군 사령관의 자결과 함께 조직적인 전투가 끝난 그 날을 '위령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6월 23일이면 추도 행사를 통해 희생자의 넋을 달래 왔습니다.

오키나와 내 불발탄을 처리해 오고 있는 전담부대인 제101 불발탄처리대/홈페이지 갈무리오키나와 내 불발탄을 처리해 오고 있는 전담부대인 제101 불발탄처리대/홈페이지 갈무리

■오키나와 곳곳엔 지금도 불발탄 1,900톤이…

하지만 오키나와에는 지금도 곳곳에 전쟁이 남긴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발탄 문제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은 공습과 함포 사격 등으로 20만 톤이 넘는 포탄과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고도 2년 뒤인 1974년 현청 소재지인 나하시 중심가에서는 불발탄이 터져 유치원생 등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육상자위대에 불발탄 처리 전담 부대까지 두고 있지만 찾아야 할 양이 너무 많습니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금도 찾지 못한 불발탄이 약 1,900톤으로 추정됩니다. 2021년 처리한 불발탄은 약 11톤에 그쳤습니다. 주민들은 지금도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 '평화의 섬', 그 아득한 소망

올해로 오키나와는 미국으로부터 반환된 지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는 주일 미군 전용시설의 70% 이상이 집중돼 있습니다. 미군기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사건 사고와 소음, 환경오염과 미군 범죄를 우려합니다.

이날 추도식에서 다마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 현민들이 과중한 기지 부담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집중돼 있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입니다. 중국 해양 진출 등 주변 안보 환경이 변화하면서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군사시설을 더욱 늘려가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비극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평화의 섬으로 남고 싶다'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소망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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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24 08:00:09
    특파원 리포트
제77주년 위령의 날을 맞아 추도식이 열린 오키나와 평화공원(2022.06.23.)/NHK화면 갈무리
첫 공습은 1944년 10월 10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해 일본 본토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이날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했습니다. 하루 동안 폭격기를 1,300회 넘게 출격시켰고 500여 톤의 폭탄을 떨어트렸습니다. 일본군뿐 아니라 민간인도 다수 숨져 7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이후 미군 55만 명과 일본군 10만 명 사이에 지옥 같은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오키나와 국지전은 9월 7일까지 이어졌습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오키나와. 사망자는 20만 명가량이나 됐습니다.

제77주년 위령의 날 추도식에서 묵념하고 있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2022.06.23.)/NHK화면 갈무리
■ 77번째 '위령의 날' 추도식 열려

어제(23일) 낮 12시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다마키 데니 오키나와현 지사 등 30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제77주년 위령의 날을 맞아 추도식에 참석해 1분간 묵념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전쟁의 참화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 이 결연한 다짐을 통해 세계 누구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오키나와현은 1945년 6월 23일 일본군 사령관의 자결과 함께 조직적인 전투가 끝난 그 날을 '위령의 날'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6월 23일이면 추도 행사를 통해 희생자의 넋을 달래 왔습니다.

오키나와 내 불발탄을 처리해 오고 있는 전담부대인 제101 불발탄처리대/홈페이지 갈무리
■오키나와 곳곳엔 지금도 불발탄 1,900톤이…

하지만 오키나와에는 지금도 곳곳에 전쟁이 남긴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심각한 것은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발탄 문제가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은 공습과 함포 사격 등으로 20만 톤이 넘는 포탄과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고도 2년 뒤인 1974년 현청 소재지인 나하시 중심가에서는 불발탄이 터져 유치원생 등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육상자위대에 불발탄 처리 전담 부대까지 두고 있지만 찾아야 할 양이 너무 많습니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금도 찾지 못한 불발탄이 약 1,900톤으로 추정됩니다. 2021년 처리한 불발탄은 약 11톤에 그쳤습니다. 주민들은 지금도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 '평화의 섬', 그 아득한 소망

올해로 오키나와는 미국으로부터 반환된 지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에는 주일 미군 전용시설의 70% 이상이 집중돼 있습니다. 미군기지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사건 사고와 소음, 환경오염과 미군 범죄를 우려합니다.

이날 추도식에서 다마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 현민들이 과중한 기지 부담을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일본 정부에 문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집중돼 있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어 보입니다. 중국 해양 진출 등 주변 안보 환경이 변화하면서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군사시설을 더욱 늘려가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비극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평화의 섬으로 남고 싶다'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소망은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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