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생명’ 이야기하며 낙태권 폐지, 총기는 찬성하는 미국의 모순

입력 2022.06.25 (07:52) 수정 2022.06.2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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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권 폐지 결정을 반대하고 있는 시위대 ‘내 몸의 선택은 내가 한다’ KBS미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권 폐지 결정을 반대하고 있는 시위대 ‘내 몸의 선택은 내가 한다’ KBS

미국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했습니다. 미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 대법원은 50년 전 자신들이 내린 (로 대 웨이드 판결)- 여성은 헌법적 자유에 근거해 임신6개월까지는 임신중단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 -판례를 스스로 뒤집었습니다.
이로써 미국에서 연방법상 여성이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사라졌습니다. 물론 임신중단의 권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앞으로는 연방이 아닌 각 50개 주 마다 별도로 법이 달라질 거고, 그에 따르게 됩니다. 대법원의 판결이 미국을 두 쪽으로 찢어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14조 '사생활의 권리'... '낙태'는 사생활의 권리가 아니다

낙태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겠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인가. 엄마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사람인가, 뱃속으로부터 나와서도 생존이 가능한 시점부터 사람인가. 대단히 철학적인 이 논쟁은 어쩌면 인류가 태곳적부터 안고 있던 논쟁일 겁니다. 그래서 미 연방대법원도 1973년 낙태권을 인정하는 판례를 내릴 때, 임신 24주부터 태아는 생존력을 갖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임신 6개월 이전에는 낙태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이후 현대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태아는 임신 20주 전후로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이냐는 철학적 물음에 법적으로 답을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미 대법원이 들이댄 판단의 준거는 미국의 헌법입니다.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사생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1973년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사생활의 권리를 인정해 낙태에 과도한 규제가 따라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2022년 연방대법원은 같은 헌법 조항을 두고, 낙태권은 여성의 사생활이 아니라고 판결을 뒤집은 겁니다.

■생명권을 존중하면서 총기 규제는 반대하는 미 연방 대법원

아이러니한 것은 여성의 인권을 부정하고, 태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미 연방대법원이 총기 규제는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 연방대법원은 하루 전(현지시각 23일) 공공장소에서 권총 휴대를 금지하도록 한 뉴욕주 법률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2조를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최근 총기사고로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참사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생명보다는 개인의 자유, 총기의 자유를 더 무겁게 인정한 겁니다. 근거는 역시 수정헌법입니다.

총기참사로 어린이 19명 등 21명이 목숨을 잃은 텍사스 유밸디 롭 초등학교 앞총기참사로 어린이 19명 등 21명이 목숨을 잃은 텍사스 유밸디 롭 초등학교 앞

뉴욕주는 자위를 위한 필요성이 입증돼야 집 밖에서 총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는데, 우리 눈에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자유롭게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다 범죄가 벌어질 우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 연방대법원의 판단의 눈높이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번 판결로 캘리포니아, 뉴저지, 메릴랜드 등 총기 규제를 갖고 있는 주들의 법안들도 위헌으로 폐기될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살아있는' 헌법에서 300년 전 '죽은' 헌법으로 회귀

낙태와 총기규제에서 근거가 된 것은 모두 미국의 수정헌법. 미국에선 보수로 기울어진 미국 대법원 구성(6:3)의 특성 상 앞으로도 연방대법원의 판례는 헌법을 살아있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헌법으로 해석했다고 비판합니다. 낙태권을 폐지한 판결로 미국이 50년 전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300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한탄도 나옵니다.

물론 미국의 수정헌법이 '낙태'를 권리로 직접 보장하고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때문에 1973년 당시에도 미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인정 판결은 행동주의적 판결이라는 해석이 나왔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년 헌법 초안을 만드는 작업은 왕정시대에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조부터 10조까지는 인간의 존엄,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인권에 대한 권리장전으로 이뤄져 있고, 이후 미국 헌법은 우리가 아는 대로 고치지 않고 수정 조항을 이어 붙이는 형식으로 발전돼 왔습니다. 그렇게 추가된 조항들이 13조 노예제 폐지, 14조 사생활의 권리, 19조 여성의 참정권 규정 등입니다.

반대로 총기소지를 옹호하는 판단의 근거는 미 수정헌법 2조,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는 조문입니다. 1700년 대, 아메리카 대륙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한 미국이 인디언,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만들었던 조항을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보수화된 미 연방대법원. 보수와 진보의 비율이 6:3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보수화된 미 연방대법원. 보수와 진보의 비율이 6:3

■미국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유' '인권'....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미국 대통령들이, 미국인들이 가장 높이 외치는 슬로건이 있습니다. 자유, 프리덤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누구에게 주어지는 자유일까요.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의 임부, 강간을 당했지만 신고하지 못한 임부, 학교에 등교했다가 아무 이유 없이 총에 맞아 죽은 아이들, 아침에 조깅하다 이유 없이 총에 맞아 죽은 흑인. 미국의 헌법은 이들에게는 자유와 생명의 존중을 허용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헌법의 헌법을 갖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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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6-25 07:52:23
    • 수정2022-06-25 07:53:59
    특파원 리포트
미 연방대법원 앞에서 낙태권 폐지 결정을 반대하고 있는 시위대 ‘내 몸의 선택은 내가 한다’ KBS
미국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했습니다. 미국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좀 더 엄밀히 이야기하면, 미국 대법원은 50년 전 자신들이 내린 (로 대 웨이드 판결)- 여성은 헌법적 자유에 근거해 임신6개월까지는 임신중단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 -판례를 스스로 뒤집었습니다.
이로써 미국에서 연방법상 여성이 낙태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사라졌습니다. 물론 임신중단의 권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앞으로는 연방이 아닌 각 50개 주 마다 별도로 법이 달라질 거고, 그에 따르게 됩니다. 대법원의 판결이 미국을 두 쪽으로 찢어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미국 수정헌법 14조 '사생활의 권리'... '낙태'는 사생활의 권리가 아니다

낙태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겠다는 겁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인가. 엄마의 뱃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사람인가, 뱃속으로부터 나와서도 생존이 가능한 시점부터 사람인가. 대단히 철학적인 이 논쟁은 어쩌면 인류가 태곳적부터 안고 있던 논쟁일 겁니다. 그래서 미 연방대법원도 1973년 낙태권을 인정하는 판례를 내릴 때, 임신 24주부터 태아는 생존력을 갖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임신 6개월 이전에는 낙태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겁니다. (이후 현대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태아는 임신 20주 전후로 생존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부터 사람이냐는 철학적 물음에 법적으로 답을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미 대법원이 들이댄 판단의 준거는 미국의 헌법입니다. 미국의 수정헌법 14조는 사생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1973년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사생활의 권리를 인정해 낙태에 과도한 규제가 따라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고, 2022년 연방대법원은 같은 헌법 조항을 두고, 낙태권은 여성의 사생활이 아니라고 판결을 뒤집은 겁니다.

■생명권을 존중하면서 총기 규제는 반대하는 미 연방 대법원

아이러니한 것은 여성의 인권을 부정하고, 태아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미 연방대법원이 총기 규제는 반대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 연방대법원은 하루 전(현지시각 23일) 공공장소에서 권총 휴대를 금지하도록 한 뉴욕주 법률에 대해 위헌이라고 판시했습니다. 총기 소유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2조를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최근 총기사고로 무고한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참사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대법원은 생명보다는 개인의 자유, 총기의 자유를 더 무겁게 인정한 겁니다. 근거는 역시 수정헌법입니다.

총기참사로 어린이 19명 등 21명이 목숨을 잃은 텍사스 유밸디 롭 초등학교 앞
뉴욕주는 자위를 위한 필요성이 입증돼야 집 밖에서 총기를 휴대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는데, 우리 눈에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자유롭게 총기를 휴대하고 다니다 범죄가 벌어질 우려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 연방대법원의 판단의 눈높이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번 판결로 캘리포니아, 뉴저지, 메릴랜드 등 총기 규제를 갖고 있는 주들의 법안들도 위헌으로 폐기될 위험에 직면했습니다.

■'살아있는' 헌법에서 300년 전 '죽은' 헌법으로 회귀

낙태와 총기규제에서 근거가 된 것은 모두 미국의 수정헌법. 미국에선 보수로 기울어진 미국 대법원 구성(6:3)의 특성 상 앞으로도 연방대법원의 판례는 헌법을 살아있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는 헌법으로 해석했다고 비판합니다. 낙태권을 폐지한 판결로 미국이 50년 전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300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한탄도 나옵니다.

물론 미국의 수정헌법이 '낙태'를 권리로 직접 보장하고 있는 조항은 없습니다. 때문에 1973년 당시에도 미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인정 판결은 행동주의적 판결이라는 해석이 나왔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년 헌법 초안을 만드는 작업은 왕정시대에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조부터 10조까지는 인간의 존엄,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인권에 대한 권리장전으로 이뤄져 있고, 이후 미국 헌법은 우리가 아는 대로 고치지 않고 수정 조항을 이어 붙이는 형식으로 발전돼 왔습니다. 그렇게 추가된 조항들이 13조 노예제 폐지, 14조 사생활의 권리, 19조 여성의 참정권 규정 등입니다.

반대로 총기소지를 옹호하는 판단의 근거는 미 수정헌법 2조,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는 조문입니다. 1700년 대, 아메리카 대륙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한 미국이 인디언,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만들었던 조항을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보수화된 미 연방대법원. 보수와 진보의 비율이 6:3
■미국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유' '인권'....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미국 대통령들이, 미국인들이 가장 높이 외치는 슬로건이 있습니다. 자유, 프리덤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누구에게 주어지는 자유일까요.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의 임부, 강간을 당했지만 신고하지 못한 임부, 학교에 등교했다가 아무 이유 없이 총에 맞아 죽은 아이들, 아침에 조깅하다 이유 없이 총에 맞아 죽은 흑인. 미국의 헌법은 이들에게는 자유와 생명의 존중을 허용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헌법의 헌법을 갖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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