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전쟁의 상흔 간직한 38평화마을

입력 2022.06.25 (08:03) 수정 2022.07.0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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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양양에 있는 ‘38평화마을’이란 곳인데요.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38선이 그어지면서 이 선상에 있던 마을이 남북으로 갈린 겁니다.

안방은 남으로, 부엌은 북으로 나뉘어진 집도 있었다는데요.

이렇게 상처와 아픔이 큰 마을이어서 그런지 이름부터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하영 리포터가 38평화마을에 다녀오셨다고요?

[답변]

네, 그런 슬픈 역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였는데요.

그런데 막상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보니 전쟁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앵커]

함께하신 분들도 있었다고요?

[답변]

네, 맞습니다. 두 명의 청년 영화감독들과 마을을 함께 거닐었는데요.

영화보다 더 처절하고 리얼한 삶을 살았던 마을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으며, 새삼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3.8 평화마을 함께 가보시죠.

[리포트]

강원도 양양군의 작은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하지만 77년 전 이 마을은 분단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과 소련군은 이곳에 38선을 그었는데요.

하천을 기준으로 한쪽은 남한, 다른 한쪽은 북한 땅이 됐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물이 정말 얕아요.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네요."]

6.25전쟁 당시 잔교천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국군이 서로 총을 겨누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는데요.

[박광표/85세, 잔교리 주민 : "인민군들이 골짜기 저런데 다 집이 있었잖아. 우린 여기에 마을이 있고. 습격해 내려와서 다친 사람도 있어. 총 쏴서 총에 맞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후 6.25전쟁의 아픔을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마을 곳곳엔 미술 작품들이 설치됐습니다.

평화를 낚고 있다는 두 사람, 서로 다른 색깔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는데요.

작품 세계에 푹 빠져들 때쯤 이곳을 찾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안녕하세요. 여기 어떤 일로 오셨어요?) 최근에 평화를 주제로 영화 제작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래서 조금 평화마을이라고 해서 이런 곳도 구경하고 좀 더 뭘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감독님이랑 같이 오게 됐습니다."]

통일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청년평화영화제’에 ‘반갑습니다’, ‘흔들의자 트라우마’의 단편 영화를 출품한 유휘진, 윤성정 감독입니다.

청년 감독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는데요.

이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38평화마을입니다.

분단의 아픔과 평화를 동시에 상징하는 이름인데요.

전쟁의 상흔과 함께 평화의 상징물도 많다고 합니다. 이 마을 함께 보실까요?

마을을 걷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도로 옆에 일렬로 늘어선 포탄 모형들이었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군 생활 할 땐 가끔 (포탄을) 보게 되니까 실제 크기 맞춰서 만든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더 큰 거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때의 아픔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데요.

조금 더 걷다 보니, 마을에 평화의 소식을 전한다는 우체부가 보입니다.

밝은 웃음을 띤 얼굴로 편지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청년 감독들은 어떤 상상을 했을까요?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통일 전엔 오고 갈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전하지 못했던 편지들을 전해주는 그런 행복한 상황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반송돼서 못 보낸 편지들이라서 저렇게 쌓여 있지 않을까란 아픈 생각도 같이 먼저 들었던 거 같아요."]

이 레일 종은 38선이 그어진 뒤남북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주민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소리가 엄청 크네요.) 그러게요, 별로 세게 안 쳤는데도."]

얼마나 긴박했으면 기차 레일을 종으로 활용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새로운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홍기봉/잔교리 주민 :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으니까 언제 갖다 놨는지 모르지 우리는. 갖다 놓은 역사는 몰라. 남아있는 사람들, 그 양반들이 다 돌아가시고 없으니까 알 수가 없지."]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은 주민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상을 등지며 하나둘 잊혀 가고 있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어르신이 있다고 해서 직접 가서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잔교리에서 반평생 넘게 살고 있다는 이완산 할아버지,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는데요.

["어르신, 저희가 마을 둘러보다가 마을 이야기 듣고 싶어서 왔거든요. 어르신이 잘 아신다고 해서."]

고향이 북녘 땅인 할아버지는 전쟁 때 이곳으로 건너오면서 가족들과 영영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오래 걸려야 한 달 걸리고 잘 걸려야 일주일이면 다시 집에 들어갈 줄 알고 나왔는데 그래서 헤어진 거야. 나 혼자 여튼 나오는데 학도병이니까 총을 메고. (몇 살 때예요?) 그때? 그때 내가 열일곱인가, 그랬을 거야."]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어느덧 세월은 빠르게 흘렀는데요.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6.25 참전한 사람들은 여기 한 사람 죽고, 이 위에 한 명 있었는데 죽었고. 현북면엔 6.25 참전자가 23~4명 됐었는데 다 죽고 둘 남았어."]

올해 세상을 떠나보낸 부인 홍필녀 할머니를 바로 이곳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무슨 일 하고 나한테 얘기 하는 거 보면 미운 소린 그렇게 내가 들어본 적이 내 기억엔 없어. 가서 일해라 뭐 해라 소리는 천상 안하던 사람이었어."]

홍필녀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구십 평생,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었는데요.

홍 할머니는, “소련군과 미군이 38선에 장막을 치고 남쪽, 북쪽을 나누면서 윗집 순희네 집도 방은 이남, 부엌은 이북으로 갈라졌다”고 전했습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갈린 집은 저 위에 갈린 집이 있긴 있었는데 그땐 그랬죠. 그랬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되선 이렇게 되고 (아내가) 여기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

6.25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38평화마을’을 찾은 두 청년 감독들은 무엇은 느끼고 얻었을까요?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제가 영화는 삶을 이길 수 없단 말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여기라고 생각해요. 직접 여기 사시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고 하다 보니까 마음에 남는 게 많은 거 같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서로 낚시를 한 곳에서 하는데 같이 평화를 낚아 올린다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전 낚시를 생각하면 기다림이란 단어가 떠오르는데 지금 우리가 지내는 것도 좋은 결과물의 기다림의 순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혹한 전쟁에서 어렵게 살아남았지만 잊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도 이제는 조용히 물러나고 계신데요.

그 자리를 대신해 38평화마을이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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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전쟁의 상흔 간직한 38평화마을
    • 입력 2022-06-25 08:03:35
    • 수정2022-07-02 09: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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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6.25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마을이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양양에 있는 ‘38평화마을’이란 곳인데요.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38선이 그어지면서 이 선상에 있던 마을이 남북으로 갈린 겁니다.

안방은 남으로, 부엌은 북으로 나뉘어진 집도 있었다는데요.

이렇게 상처와 아픔이 큰 마을이어서 그런지 이름부터 평화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하영 리포터가 38평화마을에 다녀오셨다고요?

[답변]

네, 그런 슬픈 역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한 분위기였는데요.

그런데 막상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보니 전쟁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앵커]

함께하신 분들도 있었다고요?

[답변]

네, 맞습니다. 두 명의 청년 영화감독들과 마을을 함께 거닐었는데요.

영화보다 더 처절하고 리얼한 삶을 살았던 마을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으며, 새삼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3.8 평화마을 함께 가보시죠.

[리포트]

강원도 양양군의 작은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한적하지만 77년 전 이 마을은 분단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과 소련군은 이곳에 38선을 그었는데요.

하천을 기준으로 한쪽은 남한, 다른 한쪽은 북한 땅이 됐습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물이 정말 얕아요. 이 정도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네요."]

6.25전쟁 당시 잔교천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국군이 서로 총을 겨누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는데요.

[박광표/85세, 잔교리 주민 : "인민군들이 골짜기 저런데 다 집이 있었잖아. 우린 여기에 마을이 있고. 습격해 내려와서 다친 사람도 있어. 총 쏴서 총에 맞아서 돌아가신 분도 있고."]

이후 6.25전쟁의 아픔을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마을 곳곳엔 미술 작품들이 설치됐습니다.

평화를 낚고 있다는 두 사람, 서로 다른 색깔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는데요.

작품 세계에 푹 빠져들 때쯤 이곳을 찾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안녕하세요. 여기 어떤 일로 오셨어요?) 최근에 평화를 주제로 영화 제작했던 경험이 있는데 그래서 조금 평화마을이라고 해서 이런 곳도 구경하고 좀 더 뭘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감독님이랑 같이 오게 됐습니다."]

통일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청년평화영화제’에 ‘반갑습니다’, ‘흔들의자 트라우마’의 단편 영화를 출품한 유휘진, 윤성정 감독입니다.

청년 감독들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는데요.

이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38평화마을입니다.

분단의 아픔과 평화를 동시에 상징하는 이름인데요.

전쟁의 상흔과 함께 평화의 상징물도 많다고 합니다. 이 마을 함께 보실까요?

마을을 걷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도로 옆에 일렬로 늘어선 포탄 모형들이었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군 생활 할 땐 가끔 (포탄을) 보게 되니까 실제 크기 맞춰서 만든 거 같기도 하고 조금 더 큰 거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그때의 아픔을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데요.

조금 더 걷다 보니, 마을에 평화의 소식을 전한다는 우체부가 보입니다.

밝은 웃음을 띤 얼굴로 편지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청년 감독들은 어떤 상상을 했을까요?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통일 전엔 오고 갈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전하지 못했던 편지들을 전해주는 그런 행복한 상황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반송돼서 못 보낸 편지들이라서 저렇게 쌓여 있지 않을까란 아픈 생각도 같이 먼저 들었던 거 같아요."]

이 레일 종은 38선이 그어진 뒤남북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주민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소리가 엄청 크네요.) 그러게요, 별로 세게 안 쳤는데도."]

얼마나 긴박했으면 기차 레일을 종으로 활용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새로운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홍기봉/잔교리 주민 :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있었으니까 언제 갖다 놨는지 모르지 우리는. 갖다 놓은 역사는 몰라. 남아있는 사람들, 그 양반들이 다 돌아가시고 없으니까 알 수가 없지."]

전쟁의 아픔을 직접 겪은 주민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상을 등지며 하나둘 잊혀 가고 있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어르신이 있다고 해서 직접 가서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잔교리에서 반평생 넘게 살고 있다는 이완산 할아버지, 아흔이 넘은 연세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는데요.

["어르신, 저희가 마을 둘러보다가 마을 이야기 듣고 싶어서 왔거든요. 어르신이 잘 아신다고 해서."]

고향이 북녘 땅인 할아버지는 전쟁 때 이곳으로 건너오면서 가족들과 영영 이별해야만 했습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오래 걸려야 한 달 걸리고 잘 걸려야 일주일이면 다시 집에 들어갈 줄 알고 나왔는데 그래서 헤어진 거야. 나 혼자 여튼 나오는데 학도병이니까 총을 메고. (몇 살 때예요?) 그때? 그때 내가 열일곱인가, 그랬을 거야."]

치열하게 싸웠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어느덧 세월은 빠르게 흘렀는데요.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6.25 참전한 사람들은 여기 한 사람 죽고, 이 위에 한 명 있었는데 죽었고. 현북면엔 6.25 참전자가 23~4명 됐었는데 다 죽고 둘 남았어."]

올해 세상을 떠나보낸 부인 홍필녀 할머니를 바로 이곳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무슨 일 하고 나한테 얘기 하는 거 보면 미운 소린 그렇게 내가 들어본 적이 내 기억엔 없어. 가서 일해라 뭐 해라 소리는 천상 안하던 사람이었어."]

홍필녀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구십 평생,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었는데요.

홍 할머니는, “소련군과 미군이 38선에 장막을 치고 남쪽, 북쪽을 나누면서 윗집 순희네 집도 방은 이남, 부엌은 이북으로 갈라졌다”고 전했습니다.

[이완산/93세/잔교리 주민 : "갈린 집은 저 위에 갈린 집이 있긴 있었는데 그땐 그랬죠. 그랬는데 그러다가 어느 정도 되선 이렇게 되고 (아내가) 여기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

6.25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38평화마을’을 찾은 두 청년 감독들은 무엇은 느끼고 얻었을까요?

[윤성정/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제가 영화는 삶을 이길 수 없단 말을 좋아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여기라고 생각해요. 직접 여기 사시는 분의 얘기를 들어보고 하다 보니까 마음에 남는 게 많은 거 같습니다."]

[유휘진/청년평화영화제 감독 : "서로 낚시를 한 곳에서 하는데 같이 평화를 낚아 올린다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전 낚시를 생각하면 기다림이란 단어가 떠오르는데 지금 우리가 지내는 것도 좋은 결과물의 기다림의 순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혹한 전쟁에서 어렵게 살아남았지만 잊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도 이제는 조용히 물러나고 계신데요.

그 자리를 대신해 38평화마을이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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